패월진천 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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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29화
128화. 혈승과의 대화
막아야 했다.
이제 막 어렵게 얻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혈승들은 고작 수백에 불과했지만 정사의 무인들은 너무도 지쳐 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백타!”
“예!”
“혈마궁이다. 은공께 혈마궁이 왔음을 알려라!”
“족장께선?”
“막아야지.”
“…….”
긴장하고 있다.
한 번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모자겸의 충직한 수하였던 백타는 고민했다.
어째서? 중원과 운남은 전혀 관계없다.
모자겸의 명령에 의해 동맹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지키려 한단 말인가?
“백타.”
“…….”
모자겸이 그런 백타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지막하게 불렀다.
“중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지키려는 것은 은공이다. 그분으로 인해 우리 고강족의 역사가 이어졌고 길고 긴 부족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나는 운남이 통일되는 순간부터 그분을 따르기로 결정한 몸이다.”
“대족장…….”
백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길…….
“모충!”
“예!”
“이곳은 대족장과 고강족의 전사들이 맡겠다. 서둘러 은공께 알리고 뒤를 준비해라!”
백타가 자신의 거치도를 들고 모자겸의 옆에 나란히 서자 고강족의 무인 일백여 명이 그의 뒤로 다가왔다.
“이런 멍청한…….”
“저도 고강족입니다. 저 역시 그분께 목숨을 빚졌습니다. 그리고 고강족은 우두머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전언은 누구라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백타가 히죽 멍청한 웃음을 짓자 모자겸이 눈을 찡그리며 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세우고 기운을 극도로 끌어 올렸다.
“좋다. 죽지 마라. 모두…….”
모자겸은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
그 모습에 혈승이 주름이 더해지도록 미소를 지었다.
“홀홀, 좋은 투기로고……. 하나 상대를 잘못 골랐구나, 아이야.”
혈승이 자신의 몸에 걸쳐진 붉은 가사를 풀어내었다.
“운남의 구음백골조. 홀홀, 한 세력의 수장이니 만큼 노납도 전력을 다해 주겠다.”
취리릭!
넓은 소매가 펄럭이고 앙상한 손목이 드러나 비틀렸다.
혈승의 두 눈에서 붉은 혈광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손에 쥔 가사가 뻗어져 나왔다.
거대하다.
길이 여덟 자, 폭 두 자 반의 가사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해 질 녘 석양처럼 쏟아졌다.
붉은 기운은 잔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물들이며 모자겸의 전신을 짓눌러 놓았다.
압사당할 것만 같았다.
우우웅!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모자겸의 손가락이 검게 물들어 갔다.
“으하압!”
모자겸의 손이 뻗어졌다.
콰아아앙!
“이, 이게 무슨?”
소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전방에서 느껴져 오는 막대한 존재감이 느껴져 왔다.
마천의 잔당을 쫓아간 모자겸의 기운이 아니었다.
음험(陰險)한 느낌이었다.
멀리 떨어졌음에도 알 수 있었다. 구자겸에 비해 밀리지 않는다.
방금의 충돌은 분명 모자겸이 막아선 것이 분명했다.
대족장 그가 위험하다.
“진 공자!”
같은 기운을 느낀 것인지 신승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다가왔다.
“상황이 더럽게 되었습니다. 싸울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해 서둘러 진형을 다시 갖추어 주십시오.”
“알겠네.”
의논이고 자시고 시간이 없다.
충돌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모자겸이 막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치잇!’
서쪽으로 갔던 전서구가 저들의 지원군을 불러온 것이다.
가 봐야 하는가? 아니면 이곳을 지켜야만 하는가?
소청이 창대를 움켜쥐었다.
부르르…….
완전히 움켜쥐어지지 않는다. 구자겸의 일전으로 충격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만약 저들의 수가 이전과 같다면…….’
막을 수 없다.
모자겸이 막아서는 틈을 타서 사천을 버리고 퇴각해야 했다.
망할, 그를 버려야 하는가?
진가의 식솔들 이외에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제길 아직 힘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소청의 시선이 모두를 향했다.
신승, 소강, 무가의 후계들, 백인회…….
모두 지쳐 있다.
그들 역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제힘을 내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씨발, 서천맹에 무슨 꿀 발라 놓은 것도 아닌데…….
이만이라는 숫자라면 저들에게도 적지 않은 수였다.
그럼에도 또다시 지원군을 보낼 정도라니…….
쉽게 판단이 서질 않는다.
소청의 고민이 이어지는 사이 더 이상 충돌음이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대족장이?
그때 멀리서 운남의 무인들이 무언가에 도망치듯이 달려왔다.
“은공!”
모자겸의 수하인 모충이라는 자였다.
“어찌 된 일입니까?”
“혈마궁입니다.”
소청의 눈이 일그러졌다.
결국…….
“대족장은? 대족장은 어찌 되었습니까?”
“대족장과 고강족의 전사 일백이 그들을 막겠다고 하시면서 적의 존재를 알리라고만…….”
“멍청이……. 차라리 도망치지 않고…….”
소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쩔 수 없다.
일단 최대한 힘을 회복한다.
“형님.”
간단한 치료를 받은 소강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소강.”
“정말 끈질긴 놈들이네요.”
“…….”
멍청하게 웃기는…….
그 옆으로 옥명자가 눈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이거 정말 이길 수 있는 건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황보인이 투덜거리며 다가오고 그 뒤로 무가의 후계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멍청이들…… 조금은 바뀐 것인가?
“진 공자. 저도 싸우겠습니다.”
제갈상아가 다가왔다.
그 뒤로 백인회를 비롯해 정사의 무인들이 줄을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투지가 진득하게 느껴져 왔다.
죽음을 각오한 자들의 투기는 언제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군사.”
“예?”
“너는 물러나라.”
“하지만…….”
소청은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전술이 필요하지 않아. 저들도 계책 따위는 세우지 않을 거야. 곧장 밀어붙일 거다. 부상자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의미한 죽음일 뿐이다. 그들과 함께 사천 밖으로 물러나.”
“…….”
제갈상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소강, 초사.”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자 소강과 초사가 눈에 힘을 주었다.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청의 말은 그들의 의지를 무시했다.
“비마대와 함께 부상자들을 호위해라.”
“형님!”
“소강…… 부모님, 진가의 사람들을 부탁한다.”
소청의 음성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헛헛, 이 공자. 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네.”
신승이 소강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옥명자가 그를 향해 환하게 웃는다.
“젠장, 차라리 나를 보내 주지…….”
황보인이 투덜거리면서도 주먹을 움켜쥐었다.
소강의 시선은 소청에게 고정되어있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모두 최대한 힘을 모아라. 적이 지척에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 물러난 자들이 안전하게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소청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강은 턱 언저리에 근육이 잡히도록 입을 다물고 몸을 돌렸다.
“온다.”
소청이 창대를 움켜쥐었다.
회복된 것은 단전과 단중혈의 내기뿐이었다.
부족하지만…….
소청의 시선이 바닥에 누워 있는 구자겸을 슬쩍 바라보았다.
마종의 사형제인 그였다.
아무리 독종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소청은 가능성 없는 한 줄기 희망이라도 부여잡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다.
수백의 승려들이 핏빛 물결을 만들며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춘 그들의 사이로 혈승이 모습을 드러내고 천천히 다가왔다.
“홀홀, 어째 분위기가 결사 항전을 각오한 것처럼 보이누?”
“…….”
웃으며 다가오는 노승의 모습에 소청이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자연스럽다.
걸음걸이 하나, 숨소리 하나 어느 곳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숨이 막혀 온다.
딱히 기운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짙은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러 왔다.
구자겸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
어찌하여 마천에는 이런 놈들 천지란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뒤따른 검붉은 피부의 승려들이 내뿜는 투기가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강해 보였다.
정련된 쇠처럼 단단하고 갈대처럼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소청의 눈이 그들 중 한 곳에 닿아 씰룩거렸다.
짐승처럼 끌려오는 피투성이의 인물.
대족장…….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첫 번째 충돌음이 있고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운남의 일만 부족을 이끄는 모자겸이 저리 변했다.
강하다.
이길 수 있을까?
지금의 내력이라면 구자겸과 다시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것인데…….
“홀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누구와 말하면 될까?”
혈승의 시선이 신승에게 닿았다.
“소림의 문하로구나.”
하지만 신승의 시선이 소청에게로 향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의 시선이 소청을 향해 있었다.
“호오? 고작 약관이 조금 넘어 보이거늘……. 노납은 탑리격이라 한다.”
“…….”
적의 수장이 앞으로 나와 대화를 요청했다.
소청은 창대를 뒤로 잡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었다. 아직 모두가 회복되기 전이니 최대한 시간을 끌어 주어야 했다.
“홀홀, 무엇을 주저함이더냐? 시간을 벌어 주려는 것이냐?”
“…….”
망할 중놈이 눈치가…….
“걱정 말거라, 아이야. 대화만 잘 이루어진다면 피를 보지는 않을 터이니…….”
자신의 의도가 들켰음에도 소청은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천천히 걸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진소청이다.”
“호오?”
혈승 탑리격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진소청이라…….”
얼마나 많이 들어 왔던가?
한동안 그의 이름이 마천을 떠들썩하게 울려 놓았다.
무황뿐이라 생각했던 중원에 또 다른 인물이 있음을 알려 준 장본인이었다.
충마의 전서구를 통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놀라운 아이로고……. 한데 어찌 마종을 뵈었을 때와 같은 느낌인가?’
주름 속에 가려진 혈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종에 비하면 약하기 짝이 없다.
마종을 보았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완전한 마(魔)였다.
다른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소청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 사? 마?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홀홀홀…….”
백여 년 이상을 살아와 자신의 나이조차 잊어버린 혈승이었다.
한데 이런 자를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어찌 마종과 비슷하다 느껴지는 것인가?
어째서 그의 몸에 인(因)과 연(緣)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듯한 어그러짐이 느껴지는 것인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홀홀, 재미있는 아이로구나.”
“재미있으라고 한 말이 아니다.”
“고놈 참, 매운 입이 사파 같은데 지키려는 마음은 정천이라……. 하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으면 명이 짧아지는 게야.”
“흥! 아가리로 어른 소릴 들어 온 모양이지?”
“뭐라?”
혈승의 눈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오홀홀홀.”
혈승이 이전보다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호기심 넘치는 놈이 아닌가?
“좋다. 좋아. 홀홀홀! 마종께서 대공을 넘겨받길 원하실 터이니…….”
“구자겸을?”
“오냐.”
소청의 매서운 시선이 슬쩍 돌려져 구자겸에게 향했다가 승려들에게 잡혀 있는 모자겸에게 닿았다.
“홀홀홀, 본 궁에 필요 없는 아이들이니라. 돌려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