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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월진천 128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9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패월진천 128화

127화. 혈승의 등장

 

 

 

 

“커억!”

자하검이 충마의 옆구리를 깊이 찢어 놓고 지나갔다.

뒤이은 소강의 창이 복부에 꽂혔고 천뢰충파의 기운이 터트려졌다.

쩌억!

옆구리가 너덜거리며 찢어졌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충마의 복부에 황보인의 주먹이 꽂혔다.

“크윽!”

새우처럼 몸이 숙여지는 순간 서문중걸의 검이 팔을 자르고 지나갔다.

“끄아악!”

바닥을 구르다 겨우 몸을 세운 충마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노려보았다.

잘려 나간 어깨와 터져 버린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가 울컥이며 흘러나오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충마는 악귀처럼 변한 얼굴로 소강 등을 노려보았다.

풋내 나는 핏덩이들에게…….

흐려지는 시선을 돌려 보니 모자겸이 전충사 무인의 목을 뽑아내고 있었다.

축융단주 노독형은 신승의 일장에 온몸이 짓이겨졌다.

혈독지괴는 모조리 찢겼고 폭멸마동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정사의 무인들은 거친 숨을 헐떡이면서도 마천의 무인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고 있었다.

“이 개자식들…….”

충마는 역천의 진언을 일으켰다.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그 순간.

콰곽!

수직으로 찍어 누른 소강의 창대가 그의 목 뒤에서 엉덩이까지 틀어 박혔다.

“끄아아악!”

척추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충마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멀리 구자겸의 모습이 보였다.

소청의 손에 멱살이 잡혀 정신을 잃은 듯이 늘어진…….

얼굴이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짓이겨져 있었다.

‘대공……. 허, 진 것이오…….’

허망하게 초점이 흐려지는 그의 귓가로 창을 움켜쥔 소강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뢰충파…….”

퍼엉!

창대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충마의 몸이 순간적으로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폭발했다.

역천의 진언은…… 그를 살려 내지 못했다.

그의 몸이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로 찢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적들의 수장이 쓰러졌다!”

마천 무인의 목을 베어 낸 제갈상아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와아아아!”

그녀의 한마디가 지쳐 있던 정사 연합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전쟁은 끝났다.

구자겸과 충마, 축융단주 노독형을 비롯해 주요 무인들을 모두 잃어버린 마천의 무인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게 하지 마라! 적의 잔당을 쓰러뜨려라!”

신승의 목소리와 함께 무인들이 도망치는 마천의 무인들을 뒤쫓았다.

 

“은공!”

모자겸이 소청을 향해 다가왔다.

털썩.

힘이 빠져 버린 소청이 지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

“괜찮으십니까?”

“예.”

“좀 쉬십시오. 남은 것은 놈들의 잔당뿐입니다! 제가 수하들을 이끌고 정리하겠습니다.”

소청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자겸이 운남의 무인들을 이끌고 마천의 뒤를 쫓았다.

지쳐 버린 소청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형님…….”

소강이 다가왔다.

“너…….”

소강 역시 온전하지 않았다. 어디 한 곳 성한 곳이 없었다.

식육충에게 살점이 뜯어 먹히고 병장기에 찔려 서너 개의 구멍이 흉하게 뚫려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볼에 길게 찢어진 상처가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제수씨에게…… 야단을 맞겠구나.”

“…….”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볼을 쓰다듬는 소청의 손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안타까움이 진득하게 느껴져 왔다.

소강은 그저 형을 향해 묵묵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나 다쳐 놓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진 공자!”

제갈상아가 기쁜 얼굴로 다가왔다.

“대승입니다! 대승이에요! 우리가 사천을 지켜 내었습니다!”

그녀의 표정에 모두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짜악!

불같이 몸을 돌린 소청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제갈상아의 뺨을 때렸다.

“…….”

제갈상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소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뺨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부풀어 오르자 다른 모두도 갑작스러운 소청의 행동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가?”

“…….”

“뭐가 대승이냐?”

소청은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제갈상아를 바라보았다.

“봐라!”

소청이 제갈상아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힘주어 돌렸다.

“이겨서 좋아해야 할 일이냐?”

제갈상아의 눈에 보인 것은 참혹한 전쟁의 참상이었다.

무너져 버린 건물들…….

수많은 시신들…….

사방에 뿌려진 피…….

“…….”

너무 많이 죽었다.

마천도 정사의 연합군도…….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죽어 있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았다.

“저들은 어떠냐?”

또 다른 곳.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팔다리가 잘리고 크고 작은 상처가 그득한 부상자뿐이었다.

“죽은 저들은, 저들의 가족들은 삶을 잃었다. 그런데 어째서 기뻐하는 거냐? 어째서 기분 좋게 승전을 즐거워할 수 있단 말이냐!”

제갈상아는 소청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너도 그렇지 않느냐고!

너도 똑같은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포로를 구할 때 그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죽였다.

그의 손에 죽어 간 이들도 많았다.

그가 분명히 말했다.

포로들을 구할 때 초사에게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위험해지면 버리라고…….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의총진을 생각해 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아 승리하는…….

분명 그도 동의를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을 나무란단 말인가?

어째서 승리 앞에서 기뻐하지 말라 이야기하는가?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제갈상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승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아야 하는 전술을 세워야 할 때도 있다. 나 역시 몇 번이나 그런 결정을 했다. 하지만…….”

소청이 제갈상아의 멱살을 잡고 얼굴 가까이로 당겼다.

숨이 막혔다.

잘생겼다 생각했던 그의 얼굴이 지옥 야차보다 두렵게 느껴졌다.

“사람은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마땅히 슬퍼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음에 미안해하고 가슴이 먹먹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들의 죽음 앞에서 절대로 웃고 떠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저들이 무엇을 위해 싸운 것 같으냐? 모두가 똑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지키기 위해서…….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 동생과 진가의 식솔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저런 자들의 죽음 앞에서 고작 상처만 가득한 승리에 기뻐할 참이냐!”

소청의 목소리는 제갈상아뿐 아니라 모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소청이 황보인을 비롯한 무가의 후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천이라는 잔학무도한 자들에게서 중원을 지키기 위해, 저들처럼 죽게 만들지 않기 위해……. 그렇기에 저들보다 강해야 한다. 그렇기에 저들보다 더욱 영민해야 한다. 서천맹주의 자리나 차지하고 앉아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

무가 후계들의 고개가 푹 하고 숙여졌다.

부끄러워졌다.

자신들보다 어린 소청의 말에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소강은 화를 내는 소청의 모습에 잠시 예전 일이 생각이 났다.

소청이 단신으로 당가에서 진무월창의 무인들을 구해 내었을 때였다.

당가를 무너뜨린 소청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청연을 안고 그의 가족들을 찾아가 사죄하는 일이었다.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울고 또 울며 사죄했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위해 위령비를 만들고 그들의 가족들을 진가에서 보살피게 했다.

진무월창의 무인들을 더욱 혹독하게 가르치고 단련시켰다.

그들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소청과 함께해 온 초사도 그와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언제나 후미에 있었다.

언제나 그들의 후미에서 탈출로를 지켜 주었고 언제나 홀로 싸워 왔다.

소청은 그런 사람이었다.

“형님, 그만하십시오. 다들 지쳐 있습니다.”

“…….”

소강의 말에 모두를 노려보던 소청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소청의 말을 듣고 있던 신승이 미소를 가득히 머금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대환단을 준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승은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옥명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런 친구라네.”

“예. 그렇군요.”

옥명자는 어째서 무림의 명숙이라는 자들이 소청을 인정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보기에는 거칠고 투박하고 제멋대로인 사내였다.

하지만 그 안에 가진 마음은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정천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모두 전장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라!”

옥명자의 어깨를 두드려 준 신승의 외침에 무인들이 죽은 이들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기 시작했다.

전장은 조금씩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사이 초사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구자겸의 맥을 짚었다.

미약하지만 살아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아작이 날 정도로 얻어맞고도 살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월, 이자는 어찌할까요?”

“적의 수장이다. 마천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의원에게 목숨만 붙여 놓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너무 심한 상처를 입었기에 초사가 의원을 데리고 오기 위해 움직였다.

 

* * *

 

마천의 잔당을 뒤쫓던 모자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파하학!

피가 뿌려졌다.

도망치던 마천의 선두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

핏빛 가사를 걸친 수백의 승려들.

그들은 마치 핏빛 물결 같았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도망치는 마천의 잔당을 잔인하게 죽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선 노승.

그자를 보는 순간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그와 싸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 모두 물러나라!”

모자겸의 외침에 적들의 뒤쪽에 깊숙하게 따라갔던 운남의 무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아, 안 돼! 이 멍청이들아! 도망치란 말이야!”

모자겸이 지면을 박차고 쏘아져 나갔다.

차아악!

닿지 못했다.

눈앞에서 휘저어진 응조공에 그들의 얼굴이 다섯 줄기로 갈라졌다.

“으아압!”

수하들의 죽음에 분노한 모자겸의 솥뚜껑 같은 주먹이 유성처럼 쏘아져 나갔다.

쩌어엉!

핏빛 가사의 승려들이 재빨리 뛰어나와 노승의 앞을 막아섰다.

주르륵!

한데 모자겸의 주먹을 막은 자들이 물러났을 뿐, 쓰러지지 않았다.

“홀홀, 이곳에서 운남의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노승이 앞을 막은 승려들을 비껴 내며 모자겸을 마주했다.

“보아하니 네가 바로 운남을 통일했다는 생사독이라는 아이인 모양이구나.”

“…….”

그가 나서는 순간 모자겸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회색빛 막에 싸여 있는 눈동자.

그리고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도무지 나이를 추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얼굴은 웃고 있으되 허점을 찾을 수가 없었고 사위는 순식간에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홀홀, 아이야. 겁먹을 필요 없느니. 노납은 마궁의 혈승이라 한다.”

“혀, 혈승!”

어찌 모르겠는가?

운남, 대막, 북해와 더불어 새외 무림의 하나로 불리는 토번의 혈마궁을 이끄는 주인이다.

이미 소청으로부터 혈마궁이 마천에 복속되었음을 전해 들은 뒤였다.

하지만 설마 그가 직접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혈승들을 이끌고…….

“홀홀, 아이야. 노납이 사람 하나를 찾고 있는데 안내해 줄 터이냐?”

“그, 그럴 순 없소! 어찌 혈마궁이 중원으로 들어온단 말이오?”

“홀홀, 재미있는 말이로구나. 마치 중원에 주인이라도 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그, 그건…….”

“홀홀, 노납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을 수 있는 분은 마종, 그분만이 유일한 것을……. 안내하지 않을 것이라면 비켜나거라.”

혈승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세상의 어떤 말이나 행동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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