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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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26화
125화. 아귀들의 전장
간양.
사천의 동쪽.
북쪽과 남쪽의 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평원 안에 자리 잡은 도시.
평화로웠던 도시의 관도를 사이에 두고 두 세력이 서로를 마주 보며 일렬로 길게 늘어서 대치했다.
그리고, 마천의 무리들에게서 도망쳐 거대한 관도를 가로질러 오는 수백의 인마.
“은공!”
섬뢰와 함께 도착한 소청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모자겸이었다.
“대족장.”
소청이 반가운 얼굴로 그와 인사했다.
이제껏 그를 알게 된 이후로 가장 반가운 순간 중 하나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적절한 때에 잘 도착하셨습니다. 섬뢰 님과 대족장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습니다.”
소청이 모자겸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제갈상아가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소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소강을 찾았다.
내심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형님!”
소강과 옥명자, 무가의 후계들이 지친 모습으로 다가왔다.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입고 있는 옷은 넝마처럼 변해 있었고 핏물이 여전히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지쳐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여전히 힘이 넘쳤다.
“고생했네.”
신승, 멸절사태와 백인회, 승혜와 소혜.
소청은 그들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아는 모두가 살아남았다.
하지만 얼굴을 모르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죽었다.
어떤 이들은 잘린 팔다리를 붕대로 동여 메고 검을 쥔 채 전의로 가득 찬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처음 마천과 싸우기 위해 서천맹에 모였던 이들 중 고작 반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휴우…….”
가볍게 숨을 내쉰 소청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간양의 입구에 길게 늘어선 무리, 마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가?
중원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전쟁이라는 것은 그렇다.
그저 정복자들의 욕심일 뿐이다.
좀 더 많은 땅을 가지고 싶은 자들이 만들어 낸 전쟁일 뿐이었다.
역사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다.
자신의 이름 한 줄을 남기고 싶은 것, 내가 이만큼 했다라는 위업을 쌓고 싶은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전쟁의 끝은 수많은 죽음을 남길 뿐이었고 죽어 간 자들에게는 기껏해야 위령비가 고작이었다.
전쟁은 그저 몇몇 통치자들에 의해 벌어지는 잔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아래는 어떤가?
그저 물결에 휩쓸린 것뿐이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고작 그런 전쟁에 어째서 모두가 목숨을 거는가?
공격해 온 자들도 막아서는 자들도…….
소청의 생각으로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그럼에도 싸워야 하는 이유는 중원의 주인이 마천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누가 되어도 상관없는 주인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포악하고, 잔인했으며 돌보지 않는다.
동료의 죽음, 수하의 죽음…….
그 어디에도 슬픔은 없었다.
용의 아홉 번째 자식이라는 영수 ‘탐’처럼 그저 먹어 치우는 것.
그저 죽이는 것.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것.
마천은 그것에 미쳐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결국 무(無), 아무것도 남지 않는 세상.
그렇기에 그들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소청의 시선이 정천의 무인들을 향했다.
두려움, 분노, 열망…….
그들의 눈에는 수많은 것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 이거 정말 이길 수 있는 거겠지?”
“시끄럽소!”
“…….”
선두에 선 황보인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소곤거리자 소강이 짜증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별동대의 그 누구도 더 이상 소강을 노려보지 않는다. 오히려 황보인을 향해 눈을 찡그렸다.
왠지 익숙한 모습이 되어 버린 듯해 소청이 피식 웃고 말았다.
“씨발, 이젠 전술 같은 건 필요도 없겠네.”
언제나 제 기분에 차지 않으면 ‘씨발’이라는 욕설을 달고 사는 약간 이상한 성격을 가진 제갈상아는 검을 들었다.
앞선 자들에 비해 자신의 무공이 모자람을 알고 있으면서도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뭘 꼬나봐요?”
“…….”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은공! 어찌할까요?”
모자겸이 묻는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향해 ‘은공’이라 불렀다.
그저 원래 그가 가졌어야 할 삼두홍사의 내단을 주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다시 사는 삶의 기연을 얻은 그였기에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는 소청을 위해 진가와 운남 간의 독점 거래를 했고, 당가로부터, 남궁천세의 감찰단으로부터 진가를 지켜 주었다.
소청은 눈을 감았다.
어째서 하늘은 자신을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냈는가?
어째서 도적이었던 자신을 무인의 길로 이끌었는가?
사파조차 외면했던 그를 어찌하여 정천에 연을 만들게 했는가?
하늘이 돌려보냈지만 선택은 결국 스스로가 한 것이다.
“진 공자, 여전히 저들에 비해 우리의 수가 적네.”
신승.
전생에는 바라보지도 못했던 그가 자신에게 정천의 미래를 걸겠다며 선뜻 소림의 대환단을 내어 주었다.
정천의 무인들 시선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서 담겼다.
‘젠장, 결국 지키기 위해서겠지?’
지키기 위한 싸움.
꽤나 오글거리는 말이었지만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주위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또한 전쟁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정복을 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 정복자를 막아선다.
소청의 시선이 다시 마천을 향했다.
그들의 중심에 있는 자, 역천대공 구자겸.
그의 손이 들렸다가 천천히 내려졌다.
두두두두.
전열을 정비한 마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커멓게 세상을 물들이며 내달리는 그들의 발걸음에 지축이 뒤흔들렸다.
차자자작!
소청의 창대가 쇳소리를 내며 뽑혀 나와 장창으로 변했다.
내력은 돌아와 있었다.
단중, 백회, 명문, 회음.
그리고 단전.
가득히 채워진 힘이 전신 세맥으로 퍼져 나갔다.
남은 건,
파앙!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미 모두가 같은 마음인 것을…….
긴 호흡이 끝나는 순간 창대를 등뒤로 잡은 소청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가자! 놈들을 죽여라!”
무림의 역사 그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못했던 최대 규모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략, 전술…….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힘겨루기만이 남았다.
‘구자겸!’
그가 시커먼 마라강기를 전신에 두르고 마천의 선두를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파앙!
소청이 대열이 이탈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구자겨엄!”
허공으로 솟구친 소청이 새하얀 기운이 응축된 창대를 휘둘렀다.
그리고 고개를 쳐든 구자겸의 손이 뻗어 나왔다.
꾸아아아앙!
둘의 공력이 부딪치며 폭발했다.
콰콰콰!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거대한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먼지바람을 뚫고 정사의 무인과 마천의 무인들이 충돌했다.
모든 것이 부서져 나갔다.
“와아아아!”
으악! 크아악!
함성과 비명 소리에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소리마저 감추어졌다.
모두가 미쳐 날뛰었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조차 판단이 불가능할 만큼의 접전이 재앙처럼 펼쳐졌다.
퍼퍼퍽!
살점이 터져 오르고 뼈가 잘렸다.
“적을 몰아내라! 죽여라!”
승자는 없었다.
적을 죽였다 기뻐할 겨를도 없었다. 검을 꽂은 자의 등에 또 다른 검이 꽂힌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뒤엉킨다.
쐐애액! 쾅쾅쾅!
탄식, 비명, 고통이 지배하는 아비규환의 전장은 지옥을 펼쳐 놓았다.
“혈독지괴를 투입하라!”
식육충으로 전방의 무인들을 쓸어버린 충마의 외침에 강렬한 독을 머금은 괴인들이 정사의 무인들 사이를 파고든다.
“끄아아악!”
가공할 위력으로 사람을 팔을 뽑아내고 목을 뜯어 버리는 괴인들의 모습은 몸이 떨려 올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물러나지 마라! 진형을 정비하라!”
신승이 금빛 불기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혈독지괴 한 구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하지만 혈독지괴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몇몇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오존인 자신조차 호흡을 멈추었음에도 현기증이 몰려올 정도로 강렬한 독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혈독지괴가 전장에 끼어드는 순간 전세가 밀려나기 시작했다.
전선의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리고 수많은 무인들이 독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랫동안 독을 사용해 온 운남의 무인들만이 버티고 있었다.
“대족장! 저놈들부터 처리해야 하오!”
“예! 신승!”
마천의 무인들의 목줄기를 뽑아낸 모자겸이 혈독지괴를 향해 날아갔다.
“이 새끼들! 목을 뽑아내는 건 내 방법이다!”
삼두홍사의 내단을 흡수한 그는 소청을 제외하고는 무림에 있어 독에 대한 내성이 가장 강하다 자부했다.
텁, 쫘아아악!
모자겸은 두툼한 손으로 혈독지괴의 머리를 잡아 터트리고 사지를 찢어발겼다.
“이 공자! 조심하시오!”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혈독지괴의 모습에 모자겸이 외쳤다.
휘리리리.
하지만 그의 외침이 있기도 전에 창대를 휘돌린 소강이 금세 태극의 기운을 모아 터트렸다.
콰아아앙!
천뢰충파의 폭발력이 혈독지괴를 찍어 누르고 옥명자의 매화가 살을 발라내었다.
파사사삭!
“독이다! 퍼져라!”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독에 황보인의 주먹이 뻗어져 나갔다.
후우웅!
막대한 권풍이 일어나 죽은 혈독지괴의 독성이 역으로 밀려 나가 마천의 무인들을 덮쳤다.
“끄아아악!”
독에 대비하지 못했던 마천의 무인의 살점이 녹아내렸다.
“이놈들!”
축융단주 노독형이 사방으로 열기를 뿜어내었다.
“끄아악!”
휘몰아친 열기가 그를 향해 다가섰던 무인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사방에 화염과 함께 살이 태워지는 냄새가 진동했다.
콰아아앙!
난전 속에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났다.
회백색 눈동자를 가진 어린아이. 폭멸마동.
화광을 만들며 폭발하자 수십 장이 터져 나가고 육편이 비처럼 뿌려진다.
“서둘러 비워진 자리를 메꿔라!”
축융단의 무인을 걷어차 밀어 버린 제갈상아가 전선을 지휘했다.
그녀의 외침에 폭멸마동의 폭발로 구멍이 뚫린 곳을 차지하기 위해 마천과 정사의 무인들이 뒤섞였다.
“이년!”
적의 지휘부를 끊어 버릴 생각이었던 충마가 제갈상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충마의 손을 통해 뻗어진 식육충들이 암기처럼 날아갔다.
“젠장!”
까아아앙!
절체절명의 순간 끼어든 섬뢰가 뇌기를 뿌리며 식육충들을 때려 내었다.
“군사! 물러나 후방을 지휘하라!”
“예!”
물러나는 그녀를 대신해 섬뢰의 뇌격도가 충마를 향해 날아갔다.
“상대해 주마!”
쾅! 콰콰쾅!
사방을 날아다니며 정사의 무인들을 공격하던 식육충들이 뇌전에 맞아 바닥으로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런 개자식이!”
충마의 일장과 섬뢰의 일도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하지만 열두 세주 중 하나인 그의 무위는 섬뢰를 뛰어넘고 있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밀려난 섬뢰를 대신해 어느새 다가온 소강이 충마를 향해 천뢰충파의 기운을 머금은 창대를 휘둘렀다.
쩌어어엉!
“크으윽!”
충격에 서너 걸음을 밀려 버린 충마를 향해 별동대의 무인들이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검격에 충마의 손이 어지러워졌다.
순식간에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게 생겨났다.
“이것들이! 으하합!”
슈가가가각!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식육충들이 회전하며 날아오르자 암기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피융! 피피피핑!
그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벌집처럼 꿰뚫렸다.
“전충사! 전진하라! 적의 수좌들을 향해 공격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