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21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21화
120화. 기습, 지치게 하다
황보인이 깨어난 것은 반나절은 족히 지나,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였다.
“으으으…….”
몸을 일으키던 황보인은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 정도 맞으면 어디 한 곳이 부러지거나 정양을 해도 모자랄 것인데 움직이는 데 전혀 이상이 없었다.
상대에게 극심한 고통만 전해 주고 부상은 입히지 않는 완벽한 구타.
실로 무서운 놈이었다.
“으으으…….”
흐릿하던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무가의 후계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지도를 펼쳐 놓은 제갈상아는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어, 일어났냐?”
“…….”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소청이 자신을 향해 씩 하고 웃었다.
그저 웃음일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머릿속으로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으으으…….”
대꾸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신음 소리를 내며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엄살 적당히 피우고 이리 와.”
“…….”
모른 체해야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치욕스럽게 얻어맞았다.
저 간악한 놈과 엮이면 또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다.
“야 빨리 안 오냐?”
소청이 눈을 찌푸렸다.
“으, 음.”
못 이기는 척 일어난 황보인은 고개를 돌린 채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그 정도로 정신을 차릴 리가 없지. 제가 보기엔 아직 매가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제갈상아의 말에 황보인이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았다.
‘이년이!’
딱!
“으극!”
눈에 불이 번쩍하고 정수리에 엄청난 고통이 몰려들었다.
“눈 똑바로 안 떠?”
“…….”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도대체 이놈은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었기에 사사건건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까?
황보인이 소청을 노려봤지만 그 이상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상대를 봐 가면서 반항해야 했다.
진소강이라면 몰라도 진소청과는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자, 다 일어났으니까 시작해 볼까?”
뭘?
“다들 숙지했지?”
“예.”
뭘 숙지했단 말인가?
모두가 대답했지만 황보인은 듣지도 못했다.
“뭐 하냐, 준비 안 하고?”
소청의 눈빛에 황보인이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놔두세요. 어차피 또 도망이나 안 치면 다행인데…….”
이년이 정말!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서문중걸과 팽천기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러다 한쪽 구석에 피 떡이 되어서 널브러져 있는 그들을 발견했다.
설마 아직 깨어나지 못한…….
“일어나자마자 욕하면서 덤비길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아마도 깨어나자마자 소청을 향해 덤볐을 테고 무자비하게 맞았을 것이다.
다른 무가의 후계들이 저리도 말을 잘 듣는 것은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깨어나자마자 반항을 안 한 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지난 구타의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별동대의 임무는 전면전이 있기 전에 최대한 적의 힘을 빼놓는 것이다.”
“예!”
어느새 충실한 수하라도 된 것처럼 무가의 후계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힘을 빼놓다니?
“넌, 대답 안 해?”
“……아, 알겠소.”
황보인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아, 그럼 출발한다.”
“예? 어딜?”
“서천맹.”
“…….”
서천맹? 설마 공격하자는 말인가?
고작 이 인원으로?
황보인의 눈이 부릅뜨였다.
이미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가슴 가득히 쌓여 있었다.
수백, 아니 수천은 동원해도 모자랄 판인데 고작 열 명 남짓으로 공격을 운운하다니.
“저는 아직 부상에서…….”
스윽!
소청이 창대를 거꾸로 움켜쥐자 황보인이 벌떡 일어났다.
역시 매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서천맹의 서쪽 성벽.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접근한 소청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쪽은 성벽이 너무 높습니다. 다른 쪽을 공격하시는 것이…….”
황보인은 여전히 불안했다.
고작 열 명 정도로 서천맹을 공격하는 소청이 미친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소청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말했다.
“돌입하면 적들이 몰릴 거야. 필요한 만큼만 죽이고 물러난다.”
“아니, 이보시오. 진 공자. 성벽이…….”
“…….”
소청이 눈을 찡그리며 쳐다보자 황보인이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쪽 경계가 제일 약해.”
“…….”
물론 다른 곳과 달리 그곳만은 성 밖을 경계하는 병력이 없었다.
경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의 높이라면 단번에 넘기에는 힘들었다.
기습은 공수 전환이 빨라야 했다.
공격할 때는 노도처럼 몰아쳐야 했고 물러날 때는 바람처럼 빨라야만 했다.
그런데 침입할 장소가 좋지 못했다.
“네놈들, 이번에 도망치면 내 손에 죽는다. 최선을 다해서 적을 죽여.”
소청이 무가의 후계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광기 어린 소청의 눈빛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강, 선두를 맡아. 천뢰충파는 두 번으로 한정한다. 적들의 시선이 집중되면 바로 퇴각 신호를 내려. 황보인은 좌측, 옥명자는 우측. 나머지는 그 뒤를 따른다.”
소청이 빠르게 명령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 아니, 진 공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넘기에는 성벽이 높소. 혹여 들어갔다 해도 적에게 둘러싸이면 빠져나오기가……. 전략이라도 세우고…….”
황보인이 다시 한 번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넘겠다 한 적 없는데?”
“…….”
성벽을 향해 다가가는 소청의 뒷모습에 황보인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넘지 않겠다면?
설마? 부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서천맹주가 되고자 했던 황보인이었다.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이 서천맹을 둘러싼 성벽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성벽 중에서도 가장 높고 두꺼운 위치.
병서에도 공성을 할 때는 가장 약한 곳을 먼저 부수는 법이다.
설사 그곳에 아무리 많은 적이 있어도 그것이 정석이었다.
“쓸데없는 고집을…….”
황보인은 따라 나온 것을 후회했다.
맞아 죽더라도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서문중걸과 팽천기가 너무 부러워졌다.
“뛰어들 준비나 하시오.”
갑자기 옆에 있던 옥명자가 자하검을 뽑아 들고 소강은 창대를 뒤로 잡았다.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면양에서 세상을 갈라놓았던 소청의 힘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들이…….’
황보인이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
우우웅!
대기의 흐름이 변했다.
어?
그리고 성벽 앞에 선 소강의 몸이 시퍼런 불길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창대가 맹렬히 휘둘러졌다.
콰아아아앙!
“……!”
황보인은 입이 벌어지다 못해 턱이 빠지는 듯했다.
무너졌다.
아니 아예 터져 버렸다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그 두꺼웠던 성벽이 폭격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가고 소강과 옥명자가 섬전처럼 무너진 성벽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뭐, 저런 괴물이……. 내, 내가 저런 놈하고 싸우려 했던 거야?’
“야!”
“…….”
“뛰어!”
소청의 외침에 얼이 빠져 있던 황보인과 무가의 후계들이 다급히 안쪽으로 달렸다.
“으아악!”
“끄아악!”
내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강의 천뢰충파가 만들어 낸 폭발이 대지를 잘게 떨려 놓았다.
“후우…….”
소청은 들어가지 않았다.
단중혈은 아니어도 성벽을 부수며 사용한 단전의 공력을 회복해 두어야만 했다.
탈태환골을 한 이후로 굳이 자리를 잡고 운기할 필요는 없었다.
잠시 동안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호흡만으로도 비어 버린 단전을 채울 수 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마천과의 첫 번째 전투.
서천맹을 되찾기 위한 첫 번째 전투이자 마천과의 전면전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때와는 다른 싸움이 될 거야.’
짓밟히지 않을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이 생겼다.
밤 동안 쉬지 않고 몰아붙여야 했다.
지치고 지칠 때까지…….
쾅!
두 번째 천뢰충파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익!
호각이 불렸으니 무인들이 몰려들 것이다.
몇 명을 죽이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도망칠 시간이었다.
“진 공자!”
무가의 후계들이 빠져나왔고.
“형님.”
옥명자와 소강이 빠르게 소청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충마와 마천의 무인들이 그 뒤를 쫓아왔다.
“쫓아라! 절대 놓치지 마라!”
그들이 다가오는 모습에 소청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단중혈의 기운을 회복하자면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릴 터였지만 단전의 공력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후우…….”
소청의 눈에 하얀 기운이 일렁거렸고 백회의 뇌기가 단전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우우우웅!
두 개의 기운이 거칠게 회전하며 응축되며 거친 울음을 만들어 내었다.
지직, 지지직!
하얀 뇌전이 소청의 몸에서 튀어 올랐다.
소청의 눈에서 백광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 창대가 휘둘러졌다.
꽈르르르릉!
백색 뇌기(雷氣)가 성벽을 넘어오는 마천의 무인들을 후려쳤다.
“이, 이런! 피해…….”
별안간 나타난 가공할 기운에 대경실색한 충마가 서둘러 바닥에 몸을 숙였다.
콰콰콰콰!
한번 부서졌던 성벽이 또다시 무너졌다.
별동대를 뒤쫓던 마천의 무인들은 무너지는 돌 더미에 깔리고 뇌기에 의해 참혹하게 찢겨 나갔다.
“망할!”
적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피해는 크지 않았다. 자신이 나타나는 순간 그들이 퇴각했기에 이백여 명의 인원밖에 죽지 않았다.
* * *
“형님!”
퇴로를 지켜 준 소청이 돌아오자 소강이 반갑게 맞이했다.
“기습은 성공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잔뜩 흥분한 그들의 감탄사에 소청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쉬라고 했지?”
“예?”
“겨우 이 정도로 기습이 끝난 것 같아? 이제 시작일 뿐이다.”
“…….”
“우리의 목표는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저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 것.”
“…….”
“공력을 회복해라. 다시 간다.”
“자, 잠은?”
황보인의 물음을 무시해 버린 소청이 서천맹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아주 긴 밤이 될 거야.”
“…….”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기습은 밤 동안 네 번이나 계속되어 마천의 무인들을 괴롭혔다.
방법은 간단했다.
적진을 확인한 소청이 돌아오면 기습이 이어졌다.
별동대는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어야 했다.
회복하기 무섭게 공력을 쏟아붓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슬슬 몸에 무리가 왔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콰아아앙!
대지를 터트려 적을 막아 버린 소청이 물러났다.
하룻밤 사이에 퀭해져 버린 별동대의 무인들은 소청을 괴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모두가 ‘제발,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소청을 보고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장 많은 수의 무인을 죽이고 가장 먼 거리를 뛰어다닌 것이 그였다.
가장 먼저 기습할 통로를 열고 가장 나중에 퇴로를 지키며 빠져나왔다.
“후우…….”
멀리 동이 터 올 때가 되어서야 소청이 멈췄다.
“끄, 끝입니까?”
지친 숨을 몰아쉬며 황보인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 소청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끝? 교대다.”
“교, 교대…….”
그때를 맞춰서 진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인들이 도착했다.
“진 공자!”
신승이 날듯이 소청에게 다가왔다.
“고생했네.”
“낮을 부탁드립니다.”
“해야 할 일은 군사에게 들었네.”
“예. 적이 나오면 대충 상대하다가 적을 물리십시오. 멀리까지 쫓지는 않을 겁니다.”
“알겠네.”
소청과 대화를 나눈 신승이 완전히 지쳐 버린 황보인과 별동대를 향해 다가왔다.
“자네들도 고생 많았네.”
“…….”
정천의 최고 어른이 웃으며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이다 보니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고생은…….”
소청이 들뜨려 했던 그들의 마음을 짓밟아 놓았다.
“최선을 다해서 쉬어라. 밤이 되면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