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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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20화
119화. 별동대
“어찌하실 겁니까?”
불도 밝히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 한 떼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입과 눈을 제외하고 붕대로 얼굴을 감은 황보인을 중심으로 서문중걸, 팽천기를 비롯한 오대 무가의 자제들이었다.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형님.”
팽천기의 말에 황보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서천맹주의 자리는 이미 저들에게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차라리 세가로 돌아가는 것이…….”
“시끄럽다. 이 꼴을 하고 어찌 돌아가란 말이냐!”
황보인이 화를 내자 팽천기가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쨌든 선택을 해야 합니다. 황보 형의 결단을 따르겠습니다.”
서문중걸의 말에 황보인이 눈을 감았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뿐이었다.
정천맹과 결별하고 각자의 무가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고개를 숙이며 저들에게 협조해야 하는가?
하지만 얼굴의 상처가 쓰라려 왔다.
‘진소강…….’
과거 그의 형 소청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한 것도 모자라 동생 소강의 급습에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의원의 말로는 코뼈와 광대뼈가 함몰되어 고칠 수 없다 했다.
평생을 흉측한 몰골로 얼굴을 가리고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눈엣가시 같은 진가의 형제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혹, 악이군의 소식을 들은 것은 없는가?”
황보인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소강에게 당한 악이군은 아직 요양 중이었다.
마천의 공격 당시 성도 밖의 의원에 있었기에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악 가주가 진가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진가의 약방으로 옮겼다.
서천맹주의 자리를 놓고 겨루었던 그가 자신들의 편에 서 준다면 더없이 좋을 터였다.
“진가신 그자가 악 가주를 어찌 구워삶은 것인지 배상은 물론이거니와 고개까지 조아리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자존심도 없는 자식…….”
황보인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황보 형, 속히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오명을 씻기는커녕 모든 것을 저들에게 내어 주게 될 것입니다.”
서문중걸이 그의 결정을 재촉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꼬리를 만 개처럼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서천맹에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서천맹 전투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자신들의 존재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기에 도망쳐 온 것을 알았음에도 신승이 따로 처벌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가문의 무인들이 등을 돌렸지만 방 안에 모인 후계들만 잘 규합한다면?
모두가 각 가문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전력이다.
악이군이 빠진 지금 열 명밖에 되지 않지만 신승이 끌고 온 백인회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알겠…….”
황보인이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방문이 힘차게 열렸다.
그리고.
“이 새끼들 봐라. 한 놈도 안 보인다 했더니 쥐새끼처럼 모여 있었네? 불도 안 켜고?”
진소청과 제갈상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 연놈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마음 같아서는 꼬리를 만 개 따위는 그냥 내버려 두고 싶은데 너희들이 해 줄 일이 있어서 말이지.”
역시나 그들의 전력을 무시할 순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흥, 부탁이라도 하러 온 모양이군. 정중하게 다시 와라.”
“…….”
황보인의 말에 제갈상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청이 말하지 않았으면 오지 않았을 걸음이었다.
그들의 얼굴만 봐도 화가 치밀었다.
“역시 대가리에 똥만 찬 놈들입니다. 쓸모없어요. 가시죠.”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팽천기가 눈을 부릅뜨고 나섰다.
“하, 이런 찢어 죽일 년이……. 신승 때문에 물러나 줬더니!”
살기를 피워 올리며 다가서는 그를 향해 제갈상아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병신 새끼, 왜? 마천에는 벌벌 떨면서 나 같은 연약한 여인은 만만해 보이냐?”
둘의 대화를 재미있게 지켜보던 소청이 피식 웃었다.
참 재미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만 해도 현숙하기 짝이 없는 여류 학사의 모습을 하고 있더니, 갑자기 돌변해 쌍욕을 내뱉었다.
“네년이 감히 뭘 믿고 나대는지 모르겠다만! 내 오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이미 한번 당한 바 있던 팽천기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파앙!
쾌속하게 뽑혀 나온 그의 도가 제갈상아의 연약한 목을 향해 날아갔다.
슈가가각! 턱!
소청의 손가락에 잡힌 도의 끝이 제갈상아의 목 한 치 앞에서 멈춰 버렸다.
절체정명의 순간에도 제갈상아는 눈조차 감지 않고 팽천기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거 물건이네. 제갈휘문과는 상당히 다른데?’
피식 웃은 소청이 도를 빼내기 위해 기를 쓰는 팽천기를 바라보았다.
“야, 팽가의 애새끼.”
“…….”
“얻다 대고 함부로 칼질이야? 그리고 내가 부탁이나 하러 온 것 같아?”
“뭐?”
쩡!
도의 끝이 소청의 손가락에 깨어져 나갔다.
그리고.
쩍!
“컥!”
주먹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극심한 고통에 허리를 접어 버린 팽천기는 토사물을 게워 내듯이 컥컥거렸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던 소청이 창대를 거꾸로 움켜쥐었다.
퍽! 퍽! 퍽!
엄청난 속도로 내려쳐지는 창대에 팽천기의 몸이 개구리처럼 쫙 펼쳐졌다.
퍽퍽퍽!
도대체 한 호흡에 몇 대를 때리는 것인지 창대가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을 저렇게 때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모습에 오대 무가의 후계들은 물론 함께 온 제갈상아마저도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후우…….”
끝난 것일까?
소청이 허리를 곧게 펴고 심호흡하며 구타를 멈추는가 싶더니.
퍼억! 퍽, 퍽퍽!
어느 순간부터 팽천기는 비명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정신을 잃어버린 것인지 매질을 할 때마다 몸만 들썩일 뿐이었다.
“어? 이 새끼 기절했네.”
기절은 한참 전에 한 것 같은데…….
소청이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았다.
오대 무가의 후계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각자의 무기로 손을 가져갔다.
“하, 이것들 봐라.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
“닥쳐라! 네놈이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
주먹을 움켜쥐고 노려보는 황보인의 모습에 소청이 코웃음을 쳤다.
“흠.”
모두 열 명.
아니 팽천기가 실신했으니 아홉이었다.
“어이, 군사.”
“네?”
소청이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보자 죄를 진 것도 아닌 제갈상아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깐 나가 있어야겠는데?”
“아, 예!”
제갈상아가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 순간.
“쳐라!”
황보인의 주먹, 서문중걸의 검을 비롯해 각종 무기가 소청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래. 말해 뭐 하겠냐? 썩어 빠진 정신 상태를 바로잡는 데는 매가 최고의 약이지.”
소청의 눈에 시퍼런 안광이 뻗어 나오고 높게 쳐들었던 발이 바닥을 찍어 눌렀다.
콰아아앙!
건물이 통째로 폭발했다.
부서진 나뭇조각과 함께 오대 무가의 후계들이 모조리 튕겨 나갔다.
“크윽!”
바닥에 쓰러졌던 서문중걸이 미간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난 또 한 방에 죽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들 제법 튼튼한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섬찟한 목소리에 서문중걸이 튕겨 오르며 몸을 비틀었다.
슈아아악! 텁!
“…….”
잡혔다.
세상에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강기를 머금은 검날이 소청의 손에 너무도 쉽게 잡혔다.
까드득.
검날이 소청의 손아귀에 엿가락처럼 휘었다.
그리고 소청의 입가에 악귀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검이 당겨지는 순간 놓았어야 했다.
쩍! 쩍쩍!
소청의 주먹이 서문중걸의 머리, 가슴, 배를 가리지 않고 날아왔다.
“크허헉!”
얼굴을 감싸 쥐며 웅크린 그의 등을 향해 소청의 창대가 마구잡이로 내리쳐졌다.
“이놈! 멈추지 못하겠느냐!”
고성을 지르며 황보인이 붕산격(崩山擊)을 날렸다.
거대한 권강이 허리께에서 휘말렸다가 소청을 향해 뻗어졌다. 아니 뻗어지려 했다.
하지만 채 다 뻗어지기도 전에 소청의 손이 그의 주먹을 잡아 버렸다.
소청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 띤 얼굴로 무자비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퍼어억! 퍼억!
복부와 가슴.
황보인의 주먹을 움켜쥔 소청의 마구잡이식 구타가 시작되었다.
주먹이 잡혀 있어 쓰러지지도 못하고 있는 황보인은 피부를 뚫고 내장을 두들기는 듯한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독히 아프다.
주먹이 그의 손에 박혀 있는 것처럼 빠져나오지도 않았다.
퍽퍽퍽!
소름 끼치는 격타음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끄으으…….”
구타가 멈추자 황보인이 주먹을 잡힌 채로 소청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듯 고개가 힘없이 처져 있었다.
소청의 광기 어린 시선과 미소가 나머지 후계들을 향했다.
“도, 도망쳐!”
누군가의 외침에 후계들이 일제히 지면을 박찼다.
우우웅!
그저 손을 들었다가 내렸을 뿐인데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크윽!”
튀어 오르려 했던 무인들이 그대로 다리를 접으며 주저앉았다.
졸지에 모두가 소청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 되어 버렸다.
‘와아…….’
그 순간 제갈상아는 소청의 모습이 지상에 현신한 무의 신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싸웠다?
말도 안 된다.
나름 오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황보인, 서문중걸이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모두를 짓눌러 버린 기운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두려움. 공포.
소청을 바라보는 후계들의 눈동자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감정이었다.
“어이, 군사.”
소청이 한쪽 구석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갈상아를 불렀다.
“예? 예!”
“대충 들을 준비는 된 것 같은데?”
“수, 수고하셨습니다.”
뭐를 수고했단 말인가?
구타를?
제갈상아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다가온 신승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전각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고 무가의 후계들이 모조리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정신을 잃은 황보인.
곤죽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서문중걸과 팽천기.
“혀, 형님. 이게…….”
소강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소강, 의원을 불러라.”
“예?”
“못 들었냐?”
“예!”
순간 소강은 형의 스산한 목소리에 기겁을 하며 뛰어나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째서…….”
신승이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답을 요구했다.
“아, 교육이 지나쳤습니다.”
“교육?”
“예. 이 친구들이 하도 말을 안 들어서…….”
“아니 무슨 교육이길래 이들을 이리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그저 흔적만 보아도 소름이 끼쳤다.
황보인은 둘째 치고 서문중걸과 팽천기는 엎어진 채로 맞은 것이 분명했다.
“이들이 서천맹 수복의 주력이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주력이라니?”
“예. 지금부터 이들은 마천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설 별동대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