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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월진천 117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7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패월진천 117화

116화. 도주시키다

 

 

 

 

화악!

곳곳에서 화광(火光)이 솟구쳤다.

기름기를 머금은 시커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넘실거리는 불꽃이 전각을 삽시간에 집어삼키며 번져 나갔다.

삐이익!

사나운 호각성과 함께 마천의 무인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불이다! 놈들의 습격이다!”

“잡아라!”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을까?

천추관 대연무장에서 포로들을 지키던 은신자들의 기운이 흐트러졌다.

그에 맞춰서 갑자기 남쪽 성벽이 소란스러워졌다.

긴박감을 느낀 무인들이 대거 몰려가기 시작했다.

화광이 오르자 인근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신승이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제길! 놈들의 기습이다! 경계를 위한 최소 인원을 남기고 남쪽으로 이동해라!”

달빛이 닿지 않는 그늘에 몸을 반쯤 가린 사내의 외침이 있었지만 은신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 하는 게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어둠 속의 사내가 호통을 치며 다가와 벽면을 향해 손을 쑥 하고 집어넣었다.

‘억!’ 하는 신음과 함께 뽑혀 나온 은신자가 패대기쳐졌다.

“누, 누구십니까? 저희는 이곳을 지키라는 명만을 받은지라.”

바닥에 처박힌 은신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내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은신자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누구?”

쩍!

“컥!”

쩍, 쩌억!

“내가 누군지 몰라?”

콰득,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든 사내가 쓰러진 은신자를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나를 몰라?”

급기야 손에 시퍼런 강기까지 피워 올리자.

“고, 고정하십시오.”

그대로 두었다가는 수하가 죽을 것 같다는 느낌에 은신자의 수장 지광헌이 모습을 드러내고 사내를 말렸다.

“후우, 후우. 이런 개자식이. 감히 얻다 대고……. 너도 내가 누군지 몰라?”

사내의 서릿발 같은 기세에 지광헌은 모른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 그것이 아니라. 저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을 벗어나지 말라 명을 받아서…….”

“호오, 그래? 내가 지금 대공께서 내리신 명령을 그대로 전했거늘! 네놈들이 항명을 하고자 함이구나!”

“예? 대, 대공께서요?”

“네놈 눈깔은 개 눈깔이냐? 화광을 보지 못했어? 적들이 지금 남쪽으로 총공세를 해 왔거늘!”

“열화사(烈火沙)의 지광헌! 명을 받듭니다!”

대공을 들먹이자 은신자들이 쭈뼛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둘러라! 남쪽을 지원한다!”

“예!”

명을 내리고 있는 사내의 정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찌 마천의 인물들을 모두 알겠는가?

단지 그가 보인 강기만 보아도 마천에서 그 위치가 낮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또한 ‘대공’의 명령을 직접 듣고 전할 정도의 인물이니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광헌의 채근에 열화사의 은신자들이 남쪽 성벽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내달렸다.

“짜식들이…….”

사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휑하니 비어 버린 천추관에는 오십여 명의 경계 무인뿐이었다.

“저어…….”

이미 한 명의 무인이 피 떡이 되는 것을 보았던 포로 경계의 책임자 종획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뭐냐?”

“저는 축융단의 종획입니다.”

“그런데?”

“다름이 아니오라…… 처음 뵙는 듯하여…….”

종획은 혹시나 사내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자와 같은 꼴이 될까 봐 연신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당연히 처음 보겠지.”

역시…….

종획이 잘못 보지 않았다 생각하며 물었다.

“제 안목이 미천하여 상좌(上座)께서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합니다. 혹 어느 곳에 소속된 분이신지……?”

종획은 지극하게 예를 갖추어 물었다.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가 목숨이 달아나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나?”

사내가 히죽 웃자 얼굴이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포로 훔치러 온 도둑놈.”

“……!”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으드득!

종획의 목이 반대로 돌아갔다.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검병을 잡은 무인들을 향해 열 줄기의 지풍이 연달아 쏘아졌다.

“켁!”

“커억!”

억눌린 숨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십수 명이 쓰러졌다.

차자자작! 스걱!

“뭐, 뭐…….”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던 무인은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목이 잘려 떨어졌다.

“저, 적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었던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크악!”

비명 소리가 천추관 앞뜰을 가득히 채웠다.

무언가 지나간다 싶으면 목 하나가 허공에 떠오르고 피 분수가 솟구쳤다.

창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이고 지풍이 사방에서 쏘아졌다.

순식간에 오십여 명의 무인들은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모조리 쓰러졌다.

“장문인!”

경계하던 무인 오십이 순식간에 쓰러지는 모습에 포로들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사내는 양중선과 명진자, 여인의 포승을 잘랐다.

“누구?”

곤륜의 장문인 양중선이 소청을 알아보고 반가운 표정을 떠올렸다.

“자네!”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목표는 서 측방 야산 녹문동! 도주합니다!”

소청이 손가락으로 녹문동 방향을 가리켰다.

“안 됩니다! 미끼입니다. 성벽까지는 가 보지도 못할 것입니다.”

여인, 제갈상아가 소청을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알아! 그러니까 닥치고 일단 튈 준비나 해!”

소청의 말에 제갈상아가 발끈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끼라 말했음에도 저 반응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는 서천맹의 군사 제갈…….”

내부의 경계 병력이 쓰러지자 그곳을 지나치던 무인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엎드려!”

소청은 제갈상아의 머리를 짓눌러 회전하며 창대를 그었다.

창대를 타고 나온 강기가 거대한 원을 그려 내었다.

슈가가각!

“크아악!”

피아 따위는 고려되지 않았다.

대연무장 내에서 소청의 외침에도 엎드리지 못한 이들은 모조리 죽었다.

“이쪽에도 적이 나타났다! 이쪽이다!”

적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소청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런 씨발! 순식간에 몰려드는구먼!”

얼굴을 찡그린 소청이 천추관의 입구로 몰려든 적을 향해 창대를 휘둘렀다.

반월형의 강기가 대기를 찢으며 날아갔다.

콰아아앙!

천추관의 문이 담벼락과 함께 폭발했고 공격해 오던 무인들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이런 제길, 통로가 막혔잖아! 그러게 빨리 뛰라니까!”

잡혀 있는 포로들 대다수가 부상을 당했거나 점혈을 당해 기운을 사용할 수 없었다.

담을 넘기도 힘든 상태니 길을 뚫어 주어야 했다.

“흐아압!”

소청이 뻗은 일 장이 서쪽 담벼락을 때렸다.

쿠아앙!

서쪽 벽이 통째로 뜯겨 나가고 밖이 훤히 드러났다.

“야, 여자! 녹문동이다! 안쪽 서가에 당가의 표식이 있어! 그쪽이 비밀 통로다. 길을 뚫어 주겠다.”

‘뭐 이런 새끼가?’

제갈상아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처음 보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양중선과 명진자를 비롯해 포로들 중 일부가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구출대인 것 같기는 한데…….

정천에서 저 정도의 무위를 가진 자들 중 이런 거친 언사를 하는 무인이 있었던가?

“엎드려!”

두 번째.

제갈상아의 머리가 또다시 짓눌렸다.

슈가가각!

이미 한번 경험이 있었던 포로들은 소청의 외침과 동시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크아악!”

비명이 들렸고, 소청은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제갈상아를 향해 외쳤다.

“뛰어!”

“…….”

소청으로 인해 짓눌러 돌려진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버렸지만 제갈상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비밀 통로의 존재.

만약 성벽을 넘어 밖으로 도망친다면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적을 뚫고 가야 했다.

포로들의 대부분이 죽을 터였다.

하지만 안쪽으로 도망친다면 상황은 달랐다.

안쪽은 지키는 이가 적다.

비밀 통로가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했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무위는 일전에 보았던 황보인이나 서문중걸 따위와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뭐 해! 이 멍청아!”

그의 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따지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깨달았다.

소청이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그들이 할 일은 열심히 달리는 것뿐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슈가각!

창이 휘둘러질 때마다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 강기가 마천의 무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달린 포로들은 녹문동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잡아라! 죽여라!”

선두는 진입했으나 뒤처진 이들은 뒤쫓는 마천의 무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되고 있었다.

서천맹을 공격했던 마천의 무인이 이만에 달했다.

남쪽을 공격받아 대거 몰려가기는 했어도 포로들을 쫓을 수백의 무인은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길은 열어 줬으니 나머진 당신들의 운명이다. 하지만, 도망치기 전까지는 최대한으로 시간을 벌어 주지.”

양손으로 창대를 움켜쥔 소청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파앙!

소청이 쏘아져 나갔다.

휘둘러지는 창에 팔다리가 잘리고 피 분수가 솟구쳤다.

소청은 포로를 보호하지 않았다. 그저 적들을 향해 창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마천의 주요 고수들이 남쪽 성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승에게 싸우는 척만 해 달라 했으니 소란은 끝날 것이고, 식량 창고를 태운 불길은 점차 수그러들고 있었다.

포로들이 탈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모두가 몰려들 터였다.

그 전에 빠져나가야만 했다.

아무리 소청이라지만 홀로 저들과 일전을 벌이는 것은 무리였다.

소청은 녹문동의 앞을 포로들의 꼬리가 그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지켰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소청의 모습은 마치 조맹덕을 보호하던 전위처럼 매서웠다.

소청이 달려드는 적을 닥치는 대로 베어 내는 사이 어느새 적들이 겹겹이 녹문동 앞을 에워싸고 있었다.

“많이도 몰려들었네. 하지만 내 역할은 여기까지!”

포로들이 녹문동 안으로 모두 모습을 감추자 소청이 히죽 웃었다.

“네놈은 누구냐?”

막 소청의 앞으로 들어선 축융단주 노독형이 이를 갈며 물었다.

“병신 새끼. 보면 모르냐? 당연히 적이지!”

취리리릭!

쩌어어엉!

소청은 창대를 돌려 녹문동의 입구를 강타했다.

꾸우우…….

거친 진동과 함께.

꽈드드드드, 우르르…….

녹문동의 입구가 무너져 내렸다.

어차피 뒤를 지켜 줄 시간이 없으니 무너뜨려 버리는 게 나았다.

그 모습에 노독형이 얼굴을 찌푸렸다.

동료의 목숨을 구하러 와서 굴에 가둬 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설마? 비밀 통로가 있었나?”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잖아? 안 그래?”

소청이 싱글거리며 웃자 약이 잔뜩 오른 노독형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근데, 구자겸은 어디 있나?”

“뭐?”

“네놈들이 대공이라고 부르는 그놈 어디 있냐고…….”

“이놈! 감히 대공의 함자를!”

꽈르릉!

마치 제 친구 대하듯 묻는 모습에 노독형이 참지 못하고 성난 파도같이 강맹한 일장을 뻗어 내었다.

일문의 수장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위력이었다.

하나 상대는 소청이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장력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그 중심을 때렸다.

쩌어어엉!

장력이 폭발하며 거센 충격파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저, 저럴 수가…….”

폭발의 여파가 가시고 드러난 모습에 무인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서로 일 장씩 겨룬 것이 아니었다.

소청은 그저 막기만 했을 뿐인데 노독형이 세 걸음이나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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