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00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00화
99화. 소강의 무위
되레 창을 놓아 버리는 그의 모습에 악표의 턱 언저리에 진한 근육이 잡히고 가공할 기세가 피어올랐다.
“죽여 주마!”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살기와 함께 창대가 비틀리듯 내질러지자 창극이 수십 개로 나누어졌다.
“아니! 갑자기 살수를!”
확 하고 뻗어 나오는 가공할 살기에 운검자가 끼어들려는 찰나 소강의 걸음이 내디뎌졌다.
픽!
내질러진 창극이 잔상을 벌집으로 만드는 순간 몸을 비틀어 창대를 스친 소강의 손이 악표의 가슴에 얹혔다.
순간 소강의 서늘한 눈에 악표는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 같았다.
퉁!
가벼운 튕김에 악표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
단 한 걸음, 가벼운 손짓에 파훼되어 버리자 모두가 경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경탄성은 모두 소강을 향해 있었다.
“이, 이 자식이!”
소강의 여유로운 얼굴에 열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악표가 악가의 모든 창식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악가창식의 묘리가 모조리 뿜어지고 날카로운 기세가 객점 안을 가득히 채웠지만 소강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창을 들어라! 이 개자식아!”
악표의 눈에 핏발이 돋아 올랐다.
‘쯧, 너무 흥분했군.’
악이군은 동생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악에 받친 악표의 창이 점점 더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었다.
텅!
또다시 소청의 손이 이전과 같은 자리를 때려 악표를 밀어내었다.
같은 자리를 두 번이나 허용했다.
승부는 이미 첫수에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소강이 마음을 먹었다면 이미 악표는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대는 두 번의 공격을 허용했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죠.”
“닥쳐라!”
외침에 실린 기세가 객점 안을 날카롭게 할퀴어 대었다.
“이 쓰레기 같은 자식이 감히…….”
악표의 얼굴에 굵은 힘줄이 돋아 오르고 눈동자는 실핏줄이 터져 올라 붉게 변했다.
“흐아아압!”
양발은 넓게 벌어지고 창대를 움켜쥔 팔뚝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악가창식의 금기 살초인 만혼쇄(萬魂碎)였다.
“흠, 결국 쓰러뜨리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군요.”
소강이 가볍게 발을 벌리고 주먹을 움켜쥐자.
휘리링!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단전의 두 개의 기운이 태극을 이루었다.
“죽어라!”
악표의 손에 잡힌 창극에서 뿜어진 빛이 객점 안을 밝게 물들이는 순간.
소강이 가볍게 뒷발을 찼다.
사라졌다.
이전까지의 움직임이 아니라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일보월하.
한 걸음에 강을 넘는다는 경공술이 소청이 아닌 소강의 몸에서 재현되었다.
“저런 움직임이…….”
일보월하를 처음 본 옥명자는 눈을 부릅떴다.
일순간 사라졌던 소강이 또다시 악표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죽이진 않겠습니다.”
소강의 손에서 확 하고 뿜어지는 기운에 악이군이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소강의 손을 통해 빠져나온 기운은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거대했다.
뿌드득! 쩌어엉!
놓친 창대가 허공을 떠오르고 눈을 까뒤집고 입을 벌린 악표의 신형이 튕기듯 날아가 객점 벽에 처박혔다.
콰앙!
고개를 젖히고 주저앉은 악표는 단 한 수에 정신을 잃어버렸다.
두 개의 기운을 모아 터트리는 천뢰충파의 기술.
“…….”
움푹 파인 장인(掌印: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악표의 가슴에 그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이럴 수가.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힘이다.’
너무 빨라 보이지도 않았던 움직임이었지만 옥명자는 소강의 강함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악이군도 마찬가지였다.
악표의 가슴에 손이 닿는 찰나에 느껴진 힘은 자신에게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더욱이 그만한 힘을 보이고도 소강의 호흡은 너무도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이놈! 감히 이 공자님을!”
객점에 있던 악가의 무인들이 소강을 둘러싸고 일제히 창극을 겨누었다.
“흠,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될까요?”
소강이 남광에게서 자신의 창 ‘월영’을 건네받자 옥명자와 운검자가 검을 뽑아 들었다.
진한 긴장감이 객점을 가득 채우고 당장이라도 싸움으로 이어지려 하자 손님들이 겁에 질려 밖으로 도망쳤다.
객점주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무인들의 대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핫핫핫!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다 옛말인가 보군.”
악이군의 웃음소리가 긴장감을 깨 버렸다.
“실례가 많았소. 진 공자. 이걸로 은원은 끝을 맺읍시다.”
악이군이 갑자기 소강을 향해 포권을 했다.
“…….”
소강의 시선이 그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한데 보아하니 진 공자께서도 서천맹주에 욕심이 많은 모양입니다.”
“…….”
“화산이 뒷배를 봐준다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일깨워 준 한 수였소.”
악이군이 웃으며 인사를 해 오자 소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록 살수를 펼칠 수 없어 천뢰충파를 약하게 펼치기는 했지만 그 충격은 상당했을 터였다.
하지만 악이군은 제 동생의 안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떻소.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끼리 술이라도 한잔하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이?”
악이군의 말에 소강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가슴에 음흉한 뜻을 품은 사람과 동석하지 않습니다.”
“저런, 안타깝구려.”
“더 이상 은원을 묻지 않겠다 하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소강이 짧게 인사를 하고 객점을 나가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악이군의 모습에 악가에서 그를 따라온 비룡창수들의 수장 모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가주님. 어찌 그냥 보내십니까? 이 공자를 저리 만든 놈입니다.”
“하면 네가 따라가서 놈의 목줄이라도 따 올 테냐?”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모개의 말에 악이군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멍청한 놈.”
“…….”
“대단한 일격이었다. 서천맹주에 도전할 자격이 충분한 자야. 더욱이 화산의 매화검수가 함께하고 있다. 네놈들과 비룡창수들 모두가 나서도 잡을 수 없어.”
“…….”
“친분을 두어 후에 써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만 본인이 거절하니 어쩔 수 없지.”
“무슨 말씀이신지…….”
“황보인과 서문중걸의 싸움이 내일이다. 한데 새로운 놈이 서천맹주의 자리에 도전하겠다고 하면 부전승이 결정된 나와 싸우게 되지 않겠느냐?”
“…….”
“인근에 암시장이 있다 들었다.”
“예.”
“쓸 만한 살수들을 찾아보아라.”
“살수요? 비룡단으로도 어쩔 수 없는 자들을 어찌 살수만으로?”
“훗, 죽이진 못해도 작은 상처만 입힌다면 충분하지.”
“…….”
“암시장의 살수들은 정천의 무인들과는 달리 독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
“아! 알겠습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악이군의 말뜻을 알아차린 모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 공자는 어찌…….”
그 말에 악이군이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쯧, 하등 쓸모없는 놈……. 이룡으로 불렸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구나. 본가로 돌려보내라!”
“예.”
* * *
서천맹의 창설은 정천에 또 다른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막 창설을 알린 서천맹은 젊은 무인들에게는 등용문(登龍門)이나 진배없었다.
각지에서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무인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성도의 객점들은 빈방이 없을 정도로 채워졌다.
그들을 들뜨게 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서천맹주의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비무 대회였다.
벌써부터 약삭빠른 자들은 후보로 나온 세 가문의 적자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도박장에는 연일 수만 냥의 거금이 추가되었다.
서천맹주 위를 놓고 벌어지는 비무 대회의 당일.
세력에 끼지 못한 자들과 구경꾼들은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루었다.
정문이 열리자 각자의 소속을 알리는 기를 따라 행렬이 이어져 서천맹의 대연무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자리를 채운 무인들은 각 파에서 선별된 자들인지라 쉬이 보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수십 열을 지어 연무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그들의 위용은 출병을 앞둔 군세만큼이나 대단했다.
황보가, 서문가, 악가를 비롯해 중립을 지키는 곤륜, 아미, 청성의 무인들이 자리를 잡자 그 뒤로 세력이 없는 무인들과 구경꾼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채워졌다.
징!
때마침 울린 징 소리에 고요가 찾아들고 모두의 시선이 연무대의 상석에 위치한 단상으로 집중되었다.
그곳에는 임시 서천맹주인 명진자와 곤륜의 장문인 연화자, 그리고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본도는 청성의 명진이오!”
명진자가 앞으로 나서자 대연무장 안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중원 무림은 마천의 위협으로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이해 서북 전선을 튼튼히 하기 위해 서천맹을 창설하였소. 하나 그에 어울리는 인재를 찾지 못한바 오늘 비무 대회를 통해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맹주를 선출하려 하오.”
“와아아아!”
군중들의 함성이 연무장을 떠들썩하게 울렸다.
“하나 이는 공정을 기해야 하기에 신임 군사께서 주관하기로 결정하였소.”
명진자가 옆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이 웃으며 일어나 단상으로 향했다.
“제갈가의 제갈상아입니다. 새로이 서천맹의 군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사에 또 한 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럼 기다릴 것 없이 비무를 시작하겠습니다. 맹주 위에 도전하시는 후보들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제갈상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혹여 질세라 세 사람이 연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황보인, 서문중걸, 악이군.
각기 다른 곳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혹 다른 분들은 없습니까?”
제갈상아가 다시 한 번 물었지만 모두가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 나서는 자는 없었다.
‘어찌 된 것이지?’
악이군은 예의 주시하고 있던 소강을 바라보았다.
연무대로 올라올 것이라 생각했다.
당장에 후보로 등록하고 자신들과 자웅을 겨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형님…….’
소강은 악이군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련하게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훌쩍 떠나 버린 소청의 모습이 연무장 중앙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진작에 서천맹주의 위를 승낙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도대체 어디에 가신 것인지…….’
소강의 생각이 이어지는 사이 미리 약속된 황보인과 서문중걸의 비무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패월, 대막입니다.”
초사의 말에 소청이 고개를 들었다.
뒤를 쫓고 있는 독마 일행 너머로 붉은 사막이 펼쳐졌다.
독마 북궁려강의 뒤를 쫓아온 지 닷새.
그들은 예상했던 대로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해약은?”
“완전하지는 않으나 일각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초사와 비마대의 무공을 봤을 때 그들의 무공은 독혈보의 무인들에 비해 모자람이 없었다.
문제는 화혈독이었지만 일각이라면 독이 뿌려지는 순간 도주하기에 충분하리라.
“지금부터는 사막을 넘는다. 중원의 경계를 넘어야 하니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는 군사님께 알리고 바로 뒤따르겠습니다.”
초사는 자신의 행적을 담은 전서구를 날리고 소청의 뒤를 따랐다.
거대한 사막.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어디까지 이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모래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사막에 접어든 지 사흘이 지났음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폭풍을 피해야 했고 푹푹 빠지는 모랫길에 피로가 누적되었다.
작은 바람에도 지형이 바뀌고 흔적은 금세 지워졌다.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릴 때면 앞서고 있는 독마 일행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들키지 않기 위해 거리를 좁힐 수가 없으니 독마를 추적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벌써 뒤처지는 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초사와 비마대와 함께했다가는 독마의 행적을 놓칠 것만 같았다.
“초사.”
“예. 패월.”
“먼저 가겠다. 최대한 조심해서 경계를 넘어라. 대막을 넘으면 연락은 적서를 통해 하겠다.”
“알겠습니다.”
소청과 다시 떨어져야 하는 것이 못내 불안했지만 능력의 차이를 알기에 초사는 반문하지 않았다.
파앙!
발이 모래를 파헤치자 순간 불어오는 모래바람 사이로 소청의 신형이 쏘아지듯이 날아갔다.
* * *
한참 동안이나 소청을 생각하던 소강의 시선이 비무대를 향했다.
쾅!
콰앙!
황보인과 서문중걸의 비무는 두 시진 동안이나 치열하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둘의 싸움에 눈을 떼지 못했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권강과 검강의 혈투.
그들은 한 수 한 수에 최선을 다했다.
황보가의 권격은 뇌전보다 격렬했고 거악보다 무거웠다.
하지만 서문세가의 무공도 만만치 않았다.
한번 무너졌음에도 명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도록 저력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