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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월진천 97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5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패월진천 97화

96화. 탐욕스러운 자들

 

 

 

 

콰아앙!

“크으윽…….”

팽천기의 몸이 한참을 밀려 나갔다.

황보세가가 자랑하는 천왕삼권의 제 일초 붕산격(崩山擊).

단 일 권이었다.

무지막지하게 뻗어 나온 일격에 팽가의 자랑이던 단문도의 초식이 모조리 휩쓸려 나갔다.

핏물을 울컥이며 무릎을 꿇은 팽천기가 핏발이 선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많이 발전했구나. 천기.”

“…….”

우람하다 못해 거대한 탑처럼 강건해진 황보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라졌다.

자신은 이미 팽가의 최고수가 되었다.

격체전공을 끝내고 팽가가 자랑하는 혼원벽력대 일백으로 구성된 혼원진(混元陳)을 무너뜨렸다.

떠나올 때 아비가 자랑스러워하며 그의 어깨를 두들겨 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천맹의 주인이 되어라 했었다.

자신 역시 당연한 일이라 장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천 성도에서 황보인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깔아 보고 있었다.

이룡이라 불렸던 그때처럼…….

팽천기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과거와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오호 단문도에 실린 내기가 관도의 건물들을 짓눌러 놓았다.

그리고.

무려 오십여 초를 겨루고 무너졌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천왕삼권의 힘은 정말로 산악을 허물어뜨릴 듯이 강맹해졌다.

오로지 권공에 실린 힘만으로 자신을 처참하게 짓눌러 놓았다.

짙은 패배감이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천기, 나는 언제나 너를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다.”

황보인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너라면 옆에 둘 수 있다. 어떠냐.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천하를 도모해 보지 않겠느냐?”

“…….”

또다시 황보인의 아래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인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잘 생각해라. 천기. 나는 지금 강하다. 넓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라. 이미 구시대는 끝났다. 나는 앞으로 오존보다 뛰어나질 것이고 무황보다 더 강해져 무림을 이끌어 갈 것이다.”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악이군, 서문중걸, 언두광이 사천에 도착해 있었다.

그들 역시 각 가문에서 격체전공을 받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황보인만큼 강해지지는 않았으리라.

“아버님께서 실망이 크시겠네요.”

팽천기는 결국 손을 잡았다.

황보인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생겨났다.

팽천기는 동맹이라 생각하겠지만 황보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쓰기 편한 수하가 하나 생긴 것일 뿐이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한 놈씩 무너뜨려 주마. 그리고 내가 서천맹의 주인이 된다.’

서천맹의 주인 자리를 놓고 욕심을 내는 첫 번째 전투는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다음 날 아침.

황보인과 팽천기는 당가타를 보수해 만들어진 서천맹으로 향했다.

삼 개월에 걸친 대단위 보수의 작업으로 인해 새롭게 탄생한 거대한 성곽에는 정천맹의 기치를 세운 의기천추(義氣千秋)라 적힌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서천맹(西天盟).

황보인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인들은 성곽에 걸린 현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가 시작이다.’

황보인의 눈은 뱀처럼 차갑게 빛났고 탐욕이 가득하게 채워져 있었다.

“들어가지.”

활짝 열린 성문 안으로 무수히 많은 무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청성, 아미, 곤륜, 그리고 오대 무가와 사천 인근에서 몰려온 정도의 문파들…….

대연무장을 가득하게 메운 무인들의 면면을 천천히 살피던 황보인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화산?”

자신이 알기로 서천맹은 분명 사천 인근 문파와 오대 무가의 무인들로 구성된다 들은 참이었다.

그런데 화산의 도사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으니 고개를 갸웃거릴 만했다.

“자네는 옥명자가 아닌가!”

옥명자 고진광.

함께 칠룡에 올랐으니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한데 표주(漂周: 세상을 떠돌다)를 나간 이후 소식이 끊어졌던 그가 어찌하여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보인은 자신의 인사에 공손하게 화답하는 옥명자의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옥명자와 함께한 것은 고작해야 매화이십사수였다.

과거였다면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 정도로 고강한 무인들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서천맹이 결성된다는 소식에 구경이라도 온 모양이군? 아니면 검존의 명이라도 받고 온 건가?”

“…….”

피식 웃는 황보인의 모습에 무표정하던 옥명자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

감히 사문의 존장을 칭함에 있어 어른으로서 공경하지 않고 ‘검존’이라 했다.

동류처럼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굳이 그와 드잡이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잘해 보세. 알아서 잘 굽히기만 하면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겠네.”

어깨를 두들겨 주고 가는 황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옥명자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옥명자와 화산을 스쳐 대열의 선두로 나아간 황보인이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인사를 건넸다.

“어이, 란!”

황보인이 다가오자 서문란이 얼굴을 찡그리며 살짝 고개를 까딱거렸다.

곁에 있던 악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아, 이것들 보게. 한때는 그래도 함께 어울려 다녔던 친구인데. 인사가 고작 그거야?”

황보인이 이죽거리면서 다가가자 서문란이 그 뒤를 따르는 팽천기를 향해 조소를 머금었다.

“성취를 얻었다더니 결국은 예전처럼 개가 되기로 결정한 모양이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팽천기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채 칼에 손을 가져가자 서문란의 뒤에서 한 사내가 다가왔다.

황보인만큼이나 거대한 덩치의 사내였다.

“뽑지 마. 죽기 싫으면.”

“서문중걸…….”

격체전공을 받은 또 한 명의 무인이었다.

서문세가의 대공자 서문중걸.

그 역시 과거의 칠룡이었던 자다.

방유현에 의해 가문이 무너지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기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무공만큼은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꽤나 회자된 적이 있었다.

“지랄하네. 망한 가문의 아들놈이 어디서 감히!”

팽천기가 비웃으며 칼을 당겼지만 가볍게 뻗어 낸 서문중걸의 손에 의해 막혀 버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뻗은 발이 서문중걸의 가슴에 흔적을 남겼다.

“명을 재촉하는군.”

가슴에 묻은 흙을 털어 낸 서문중걸이 스물거리며 기세를 피워 올리자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들의 싸움을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서로의 힘을 확인해야 할 상황이었다.

황보인은 물론 서문중걸, 악표의 형 악이군. 그리고 격체전공을 믿고 서천맹으로 온 강남 칠패의 후계들…….

모두가 ‘서천맹의 주인’을 가슴에 품고 도착한 경쟁자일 뿐이었다.

“멈추거라!”

소란이 일자 청성의 장문인 명진자가 노성을 토하며 그들의 사이로 날아들었고 곤륜의 연화자가 그 뒤를 따랐다.

“서천맹, 창설을 알리는 공표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게 무슨 짓인가!”

명진자가 화를 내었지만 후계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놈들이…….”

눈을 잔뜩 찌푸리고 팽천기와 서문중걸을 노려보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쳇, 다음에 그 목을 잘라 주겠다.”

“꼬리를 만 개 따위는 상대하고 싶지 않군. 물러나라. 나는 이제 네 주인에게만 관심이 있으니…….”

서문중걸의 시선이 황보인에게 향하자 팽천기의 눈이 매서워졌다.

모두가 안하무인이었다.

명진자가 있다는 사실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휴우…….”

명진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제갈휘문은 무슨 생각으로 오대 무가와 이따위 거래를 했단 말인가? 서천맹의 창설을 공표하기도 전에 무너질 판이 아닌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서천맹의 주인으로 내정하고 있던 진소청이 죽었다는 소식으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난 참이었다.

그런데.

지난밤 제갈휘문은 서천맹의 창설을 미루지 않고 진행한다는 서찰을 보냈다.

사태를 중재해야 할 멸절사태마저 무한으로 불려 갔으니 결국은 명진자가 옴팡 뒤집어쓸 상황이었다.

‘휴우, 제갈 군사가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이겠지.’

 

상황이 일부 정리되고 난 뒤 명진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서천맹의 창설을 알렸다.

각파의 거처가 정해지는 동안 수뇌들은 과거 당가의 본전각인 삼양전을 대신해 지어진 의천관(義天官)에 모였다.

“아시다시피 본인은 청성의 명진이오. 본디 아미의 멸절사태께서 주관을 하셔야 하나 무한으로 가시는 바람에 임시 맹주를 맡게 되었소.”

‘백인회’가 만들어졌다는 말이 정천맹에 널리 알려졌기에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자는 없었다.

“창설은 되었으나 아직 정식으로 맹주가 정해지지 않았소. 원래 우리는 진혼창으로 이름을 드높인 진소청 공자를 추대할 생각이었으나…….”

명진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보인이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죽은 자의 이름을 꺼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

“사실 살아 있다고 해도 고작 진가 같은 천한 가문의 인물이 서천맹주와 같은 중임을 맡을 수야 없지요.”

“말을 삼가시게.”

듣고 있던 명진이 질책하자 황보인은 그저 비웃었다.

“삼가라. 글쎄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실인데.”

“뭣이…….”

오랫동안 선도의 검술을 닦아 온 명진자도 화를 참지 못하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대충 결론은 하나이지 않겠습니까? 누가 맹주 위에 앉을 것인가? 모두들 아니 그렇습니까?”

황보인의 말에 좌중에 모여 있던 자들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옳은 말이오. 창설을 했으니 비워 둘 수는 없는 일이지.”

악이군이 동조했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시지요.”

서문중걸이 나서서 명진자를 재촉했다.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깨문 명진자는 모두를 노려보며 말했다.

“진소청 공자가 유명을 달리했으니 서천맹주의 자리를 표결로 정하겠소. 혹 추천을 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말하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팽천기를 제외한 오대 무가의 후계들이 모조리 일어났다.

모두가 제가 하겠다 주장하고 있었다.

‘허, 난잡하구나. 난잡해…….’

한탄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제가 한 말씀 올리지요.”

악가의 후계인 악이군이 일어나 좌중을 정리했다.

“팽가를 제외한 모두가 서천맹주의 자리에 관심이 많은 듯하니 표결은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

“서천맹의 목적은 마천의 발호를 대비해 서측방을 방비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들어 알고 가담한 적이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 것입니다.”

“…….”

“하니 서천맹의 주인은 마땅히 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지금 나선 이들이 공평하게 대결을 하여 서천맹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생각을 대변하는 한마디였다.

아무도 자신이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면 어찌 진행할 것이오?”

서문중걸이 묻자 악이군이 답했다.

이미 회의를 주관하는 명진자의 의견은 필요 없었다.

“날을 정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결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비무를 열잔 말인가?”

“뭐 그리 생각해도 되겠군요.”

“좋지. 무인이라면 응당 스스로 강함을 증명해야지!”

모두가 동조의 뜻을 표했다.

“대결 상대는 어찌 나눌 것이오?”

“제 생각에는 내일까지 추천을 받고 그 추천된 자들을 중심으로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 그리합시다!”

순식간에 대결로 의견이 모였다.

‘허, 이런 망할 놈들을 보았나. 어떤 이는 그리 강하면서도 거절한 자리였거늘…….’

명진자는 과거 진소청이 은장소에게 거절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하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내 품에 들어오면 내주기도 싫고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꿀보다 더 단 탐욕의 산물이다.

그들의 어떤 말과 모습에서도 마천에 대비해 정천을 지켜야겠다는 의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탐욕만이 가득한 아귀들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향후 정천맹의 중심이 될 서천맹주의 자리는 그런 것이다.

‘군사는 이런 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가.’

후계들의 모습에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 명진자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그사이에도 후계들은 세부적인 논의를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범이 사라진 자리에 개떼가 몰려들었구나.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후계들이 이끄는 정천을 위해 사조께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넘기신 것이란 말이냐.’

구석에서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옥명자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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