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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월진천 84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7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패월진천 84화

83화. 혁련휘, 알게 되다

 

 

 

 

밤새 마신 술에 숙취가 찾아왔다.

“아이고 머리야.”

소청은 왕칠이 가져온 꿀물에 겨우 몸을 일으키고 눈을 떠서 방 안을 돌아보았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열두 살 소청이 보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예.”

소청은 왕칠과 모처럼 한 상에 앉아 예전처럼 밥을 먹었다.

“세가는 어떻습니까?”

“뭐가요?”

“표국이라든가 무관이라든가?”

“아이고, 뭘 묻고 그러세요? 다들 난리지요.”

“…….”

“요새는 표물이 넘쳐서 다 받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진가 표국.

사천은 물론 중원 전 지역에 분점이 생겼다.

진가의 월문기(月文旗)만 달고 배를 타면 수적들이 알아서 비켜 가고 산에 오르면 녹림이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그 모두가 소청을 존중한 처사였으리라.

하지만 그 이득은 고스란히 표국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중원에서는 천하제일까지는 아니어도 천하에서 제일 ‘안전한’ 표국으로 이름이 나고 있었다.

표국의 위상이 사천을 넘어 중원을 향해 가고 있었다.

표국과 사업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더욱이 이번엔 은가의 혼첩이 왔으니 상단과의 교류도 활발해질 것이었다.

문제는 시기와 질투였다.

‘뭐 아버님께서 알아서 잘하시겠지. 중도를 걸으시는 분이니까.’

소청이 전날 진가신에게 건네받은 묵색 단창을 쳐다보았다.

“꽤 쓸 만하게 잘 만들었어.”

 

식사를 마친 소청이 단창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 초사와 비마대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군. 숙취가 심했을 텐데…….”

“패월을 지키는 것 또한 저희의 임무입니다.”

“그랬군. 난 또 이제까지 내가 지켜 준 줄 알았지.”

소청이 피식 웃자 초사와 비마대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다들 어디 갔어?”

“대족장께선 아직 주무시는 것 같고 소가주님과 혁련 소련주께서는 이른 새벽부터 무관으로 가셨습니다. 아마도 비무를 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인근에서 모자겸이 우렁차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비무라.”

혁련휘라면 소강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진가를 이끌어야 하는 소강은 더 강해져야 했다.

적어도 오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 보도록 하지.”

왕칠을 뒤로한 소청은 진가의 풍경을 찬찬히 눈에 담으며 무관으로 향했다.

 

진가의 무관.

삼천 평에서 시작했던 무관이 이제는 만 평 가까이 늘어나 있었고, 대연무장의 주위로는 다섯 개의 중소 연무장이 지어져 있었다.

무관주 진가성은 애초에 그러했던 대로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장래를 보고 무인들을 선발해 무관을 채웠다.

훈련생의 신분을 졸업한 이들은 다섯 개 대로 나뉘어 진가의 무인으로 배속되었고, 그중 뛰어난 자를 선별해 소강이 이끄는 독립 무인대 진무월창 소속으로 배정되었다.

‘하, 이건 뭐 내가 신경 쓸 것이 없네.’

과거에는 소청이 계획을 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진가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탄탄하게 커 나가고 있는 것이다.

“어이 소청!”

멀리서 대연무장으로 들어서는 소청을 알아본 혁련휘가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무관 담벼락의 그늘에 자리를 깔고 우진혜와 함께 앉은 그의 앞에는 비어 버린 술병이 널려 있었다.

‘하아, 밤새 술을 마시고는…….’

소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가갔다.

대연무장에는 수련을 하고 있는 무인들이 가득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핀잔을 주거나 싫은 내색을 하지 못했다.

그는 진가를 구한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신성한 연무장에서 뭐 하는 짓이냐?”

“술 마시는 거지. 관주께서 주셨는데 이게 아주 끝내준다고. 자네도 한잔하게.”

혁련휘의 말에 옆에 있던 우진혜가 술병을 내밀었다.

“뭐? 숙부께서 직접 내어 주셨다고?”

“당연하지. 새벽에 소강이와 한판 했거든. 한참 보시더니 땀을 식히라고 주시던데?”

혁련휘는 말하면서도 술을 마시는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하아…… 정말.”

“자, 앉아. 한 잔 받게.”

“…….”

소청이 혁련휘를 째려보면서도 술잔을 받았다.

“참 재미있는 곳이야.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데 참 대단하기도 하고.”

“아침부터 웬 술주정이야.”

“딱 십 년 되었다더군.”

“…….”

“진가가 이렇게 대단해진 게 말이야. 한데 탄탄해. 이러기가 쉽지 않거든. 모두가 짜 맞춘 듯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물론 그게 자네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혁련휘의 말에 소청이 과거를 돌이켜 보며 피식 웃었다.

“진 가주, 무관주…… 자네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야.”

“…….”

“약해. 자네를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해. 뛰어난 무인의 배경에는 뛰어난 조력자가 있어야 해. 나만 해도 스승님이 계시지. 그런데 자네는 그런 게 없어.”

소청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혁련휘는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었다.

“소강만 해도 뛰어나지. 이제 스물이 넘었는데 백대 고수의 경지는 진즉에 넘었어. 하지만 그의 발전 뒤에는 자네라는 괴물이 있어.”

소청이 키운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팔괘창술을 가르치고 독맥에 기운을 쌓는 내공을 가르쳤다.

혁련휘가 먹어야 했던 만년설삼까지 먹여 놓았으니…….

“한데 자네는 그런 게 없어. 마치 세상에 뚝 떨어져 내린 존재 같단 말이지.”

“묻게 싶은 게 뭐야?”

“…….”

혁련휘가 소청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우진혜와 초사가 아닌 척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진소청.

비밀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제갈휘문도 하오문에서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비밀의 핵심을 향해 혁련휘가 다가서고자 했다.

“친구와 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

“아, 혹시나 은신 같은 걸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뒈지고 싶지 않으면…….”

나지막했지만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편이었고 현실화할 만큼 강했다.

소청의 강제성이 가득한 부탁에 우진혜와 비마대는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을 하고 멀찍하게 물러났다.

“소청, 도대체 너의 정체가 뭐지? 어째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마천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나?”

“…….”

소청이 혁련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진실을 말해 주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늘 그랬듯이 그저 모른 척 둘러대야 하는 것인가?

“휴우…….”

소청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혹, 자신의 비밀에 대해 흘러 흘러 진가신과 섭약란, 소강, 그리고 수많은 진가의 사람이 알게 된다면 어찌 될까?

처음으로 가진 가족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지켜야 한다 생각한 자들이 등을 돌리는 것이 두려웠다.

어느새 그들의 존재가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비밀에 대해 한 사람쯤은 알아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혁련휘라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휘.”

“말하게.”

“자네는 어떠한 상황이 와도 나와 친구인가?”

“자네가 마천의 인물만 아니라면…….”

“…….”

 

담벼락에 달라붙은 우진혜가 얼굴의 반이나 될 정도로 커진 눈을 좌우로 굴렸다.

초사와 비마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혁련휘의 기감을 피해 최대한 가깝게 몸을 숨긴 채 모든 공력을 귀에 집중했다.

누군가의 마른침이 천둥처럼 크게 들릴 정도로 정신을 집중하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어쩌면 그들이 알아야 하는 정보들 중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정보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듣지 못한 것은 우진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초사는 얼굴을 찡그리며 벽에서 떨어진 우진혜의 입 모양을 분명히 보았다.

 

씨팔 놈들, 하나도 안 들리네.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독순술(讀脣術)을 괜히 익힌 것은 아니었다.

앵둣빛의 도톰하고 아름다운 입술로 쌍욕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개새끼들, 그냥 처말하지 뭔 기막까지 치고 지랄이야.

 

확실하다.

그녀의 입술이 그렇게 말했다.

“뭔가 좀 들을 순 있을까 했는데 하나도 안 들리네요.”

그녀가 예의 생긋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때가 늦으니 배가 고프네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우리끼리 아침이라도 먹을까요?”

“…….”

속마음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방금 전까지 그런 개쌍욕을 중얼거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

문득 독마의 수하를 심문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상대의 고통과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이 차분한…….

‘뭐 이런 년이…….’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안 가실 건가요?”

생긋이 웃는 그녀의 웃음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가, 갑니다. 다, 다들 가세. 아침은 먹어야지. 어허허.”

초사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걷는 그녀의 뒤를 허겁지겁 뒤따랐다.

 

“…….”

“그, 그럼 자네 나이가…….”

“한 환갑쯤 되었을까? 그쯤 되었겠군.”

“스승님과 두 살 차이…….”

“무황께서 그쯤 되셨겠군.”

“…….”

소청은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래전 과거 비루하게 살아온 한 소년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마천 비고와 생을 되돌아왔던 기억까지 이어졌다.

혁련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소청을 바라보았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단 말인가?”

“아니, 어찌 된 일인지 내가 알고 있던 과거와 많은 부분이 바뀌어 버렸더군. 마천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한참 뒤였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 그렇군. 허, 어째서 파천도를 익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두 분 형님. 무슨 이야기를 그리 정답게 나누십니까?”

진무월창의 무인들의 아침 수련을 끝낸 소강이 다가왔다.

“뭐긴, 앞으로 널 어떻게 더 강해지게 할까 하는 의논을 하고 있었다.”

소청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강해져요?”

“그래. 이제부터 너에게 태극을 가르칠 생각이다.”

“태극요?”

“그래. 단전의 내공과 독맥 혈의 기운을 합일시켜 사용하는 천뢰충파의 무공을…….”

“아니 그런 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가능해!”

갑자기 혁련휘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

“닥치고 하란 대로 해! 네 형은 다 가능해!”

“…….”

소청은 쓴웃음을 지으며 창을 들고 연무장으로 걸어갔고 소강은 멀뚱한 표정으로 혁련휘를 바라보다 그 뒤를 따랐다.

홀로 남은 혁련휘가 술병째로 입에 들이부었다.

“노인과 친구를 맺었군. 허 참, 환갑이 넘은 친구라니…….”

 

* * *

 

소청이 소강의 수련을 돕는 사이 혁련휘는 여전히 그늘에서 술을 마셨다.

마치 해묵은 기억을 잊으려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우진혜와 초사는 그들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진혜는 비밀리에 간양의 작은 주루 하나를 통째로 사들였다.

하오문의 비밀 분타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한편으로는 독마의 수하에게 얻은 정보를 통해 제갈휘문과 공조하며 환영곡의 세작들의 신변을 확보해 나갔다.

 

“대공자.”

가주전의 호위 무인이 소청을 찾아왔다.

“왜?”

“가주께서 찾으십니다.”

“알았다.”

소청은 잠시 연무장에 좌정한 소강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이 걸리리라.

자신은 죽음 앞에서 태극을 얻었다.

하지만 소강에게 그런 상황을 만들어…….

‘줄 수도 있는 위인이 있었군.’

혁련휘를 바라본 소청이 피식 웃었다.

“휘.”

“어? 왜 그러나 나이 많은 친구?”

얼마나 많이 마신 건지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하아, 부탁을 하려 했는데 잘못하다가는 동생이 죽겠군. 대족장을 찾아가 봐야겠어.”

“뭐? 부탁해. 뭐든 들어줄게.”

“안 돼. 그렇게 술이 취해선.”

혁련휘는 순식간에 내력을 운용해 주정을 뽑아내 버렸다.

갑작스러운 때문인지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취기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다 깼어.”

“소강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여 줘. 죽지만 않으면 돼.”

“죽지만 않으면 된다고?”

“그래.”

“알겠네. 나이 많은 친구. 나이 어린 나를 믿게.”

“…….”

왠지 비밀이 지켜지지 않을지도…….

괜히 말했나 하는 생각에 소청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진가신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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