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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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82화
81화. 혈독의 괴인
“하? 이건 또 뭐야?”
소청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태극의 기운에도 버텨 내는 놈이라니?
“크르르르.”
괴인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소청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면을 쿵쿵 찧으며 달렸다.
“물러나!”
‘흡’ 하고 느껴져 오는 진한 독기에 소청이 재빨리 창대를 고쳐 잡으며 외쳤다.
괴인의 주먹을 피한 소청이 창대를 휘둘렀다.
쩌엉!
창대가 복부에 틀어박히고 괴인의 허리가 숙여지는 순간 소청의 창대가 팔괘의 흐름을 따라 궤적을 그려 내었다.
빠가가각!
그것이 시작이었다.
소청의 창이 마구잡이로 괴인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감고 있던 붕대가 모조리 터져 나갔다.
하지만 괴인은 가공할 기세를 품은 소청의 공격에 밀려났을 뿐 물러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치잇!”
자신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질러지는 주먹에 소청이 코끝을 찡그리며 물러났다.
쩡!
내지른 발이 괴인을 밀어내었다.
“크르르르…….”
충격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괴인의 무공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괴인의 몸을 두르고 있는 독기를 제외하면 움직임은 너무도 단순했다.
달린다.
부딪친다.
그것이 다였다.
움직임은 느렸고 무공이라고 할 수 없는 주먹질과 발길질이었다.
한데 그만한 공격을 얻어맞았으면 고통을 느끼고 무너져야 할 것인데 괴인은 오히려 더욱 전의를 피워 내며 소청을 향해 달려왔다.
“큭큭큭, 혈독의 괴인이 그 정도로 무너질 것 같더냐? 네놈들은 모두 여기서 죽을 것이다.”
멀찍이 떨어진 녹의인이 소청을 비웃었다.
“뭐?”
순간 소청이 녹의인을 향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삐리릿!
피리 소리가 바뀌자 괴인이 소청을 향해 녹빛의 독 기운을 내뿜었다.
쿠아아아.
독장이 소청의 온몸을 감싸듯이 뿌려졌다.
“녹아 버려……라?”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희열로 물들었던 녹의인의 눈빛은 이내 절망으로 변했다.
휘류류류.
창대가 무수한 궤적을 만들어 내며 바람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한 줄기 빛이 뻗어 나왔다.
퍼엉!
달려들던 괴인의 복부가 거칠게 뜯겨 나갔다.
이어 휘둘러진 창대가 괴인을 튕겨 내 버렸다.
“혈독이라고?”
소청의 부릅뜬 눈이 녹의인을 향했다.
분명히 들었다.
녹의인의 중얼거림 속에서 나온.
혈독(血毒).
그곳은 마천이 뿌리째 뽑혀 나간 뒤에 십만대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었다.
독기를 품은 붉은 우물과 수많은 시신들이 있었다.
붉은 우물이 사람의 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전 무림이 마천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사람의 몸에 피를 완전히 쥐어짜 낸다 해도 세 되(5리터)의 피가 나오지 않는다.
우물 하나를 만들자면 최소 오백 명의 피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가릴 것 없이 들어갔다면 천 명의 피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돼지의 피를 빼내듯 목을 따고 거꾸로 매달려 우물을 채웠을 것이다.
그것을 어째서 만든 것인지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런데…….
혈독을 만든 목적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작 저따위 괴물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그런 자들이 있었다.
만나 보진 못했으나 소문으로 들어 본 적은 있었다.
마천 정벌의 선봉장에 있었던 살 떨리도록 잔인했던 독인들.
무공 따위는 필요 없었다.
도검불침의 몸을 가진 그들은 독 기운을 머금은 괴수나 다름없었다.
주위는 모조리 독 기운에 녹아내렸고 잡힌 모든 것은 갈가리 찢어 버렸다.
몸 안을 흐르는 피가 차갑게 식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과거 혈독을 보았을 때는 그저 죽은 이들이 불쌍하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훔치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관계’라는 것이 생겼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겼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많은 이들의 죽음을 토대로 만들어진 저주받은 산물은 또다시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 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안에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놈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사람들을 그리도 많이 죽였던 것이냐?”
차가운 분노.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북풍한설 같은 한기를 담고 있었다.
소청이 녹의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네, 네놈이 어찌 혈독을?”
“보았지. 그때는 그저 네놈들의 잔인함에 놀라기만 했었지.”
“거, 거짓말!”
녹의인은 소청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혈독은 마천에서도 비밀 중의 비밀에 해당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어찌 보았단 말인가?
저자가 마천에 잠입이라도 했었단 말인가?
우지직.
소청의 발걸음을 따라 땅이 갈라졌다.
발길에 담긴 기운이 지면을 거미줄처럼 터트렸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한기가 세상을 짓누르고, 기세가 지나간 자리를 모조리 터트려 내었다.
지면 깊숙이 뿌리박은 나무는 수수깡처럼 부서져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풀들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조각나 흩어졌다.
“으으으…….”
녹의인의 수좌는 짜부라질 듯한 압박감에 도망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소청의 걸음이 점점 더 그에게 향하자 녹의인은 쥐어짜 내듯이 입을 오므렸다.
삐-이-.
피리 소리.
“크아아아!”
괴인이 미친 듯이 소청을 향해 달려들었다.
쾅! 쾅!
부딪히는 모든 것을 박살 내 버리고, 독 기운을 칭칭 감은 채 소청을 향해 달렸다.
쿠웅!
괴인이 소청의 몸을 들이박았다.
만년거석의 무게가 소청을 때렸다.
주르륵.
팔을 들어 괴인의 머리에 손을 올린 소청은 태극의 기운을 담아 발을 대지에 쑤셔 박았다.
터트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기운을 발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 장 가까이 밀려나면서 그의 발이 지면을 길게 파헤쳐 놓았다.
“크아아!”
더 이상 밀려나지 않자 괴인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무리 밀어도 소청의 몸은 더 이상 밀려나지 않았다.
턱.
양손으로 머리를 잡은 소청이 힘껏 뒤틀어 버렸다.
트드득.
괴인의 목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하지만 힘이 줄지 않았다.
반대로 돌아갔던 목이 강제로 바로잡히고 소청을 향해 주먹을 뻗어 왔다.
뻑!
괴인의 주먹이 펼쳐진 소청의 손에 잡혔다.
뿌득, 뿌드득.
힘주어 누르자 손가락이 괴인의 주먹을 파고들며 으스러뜨렸다.
“하긴 사람의 피를 머금었으니 이미 괴물이겠지.”
소청의 손이 괴인의 머리에 얹혔다.
그리고 주먹을 비틀어 뜯어 버린 또 하나의 손이 더해졌다.
“크아악!”
울부짖는 괴인의 전신에서 독기가 일어나 소청을 집어삼켰다.
만독불침이 아니었다면 이미 소청의 몸은 괴인이 머금은 독에 녹아내렸으리라.
“죽여 주마. 원혼을 달래기에는 부족할 것이나 죽어 간 이들의 수만큼 갈가리 찢어 놓으면 한이라도 풀리겠지.”
우둑.
소청의 열 손가락에 강기의 기운이 어렸다.
손가락은 괴인의 피부를 뚫고 두개골에 박혔다.
찌-이-.
괴기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투둑, 투두둑.
찢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소청의 손아귀에 으스러지다 벌어지는 양손을 따라 반으로 갈라졌다.
괴인은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소청을 향해 계속해서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쫘아악!
머리와 함께 몸이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푸학!
녹색의 피가 사방으로 튀고 피에 닿은 곳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차라락!
휘말린 피풍의가 창대로 변해 원을 그렸다.
예리한 기운을 머금은 창대가 소청의 몸을 완전히 감추어 버릴 정도로 휘둘러졌다.
사방을 향해 휘몰아친 창대에 공진이 생기고 뿜어졌던 독기가 소청을 향해 모조리 빨려들었다.
반으로 갈린 괴인의 육신이 창대의 궤적에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로 잘려 나갔다.
“…….”
녹의인은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혈독의 괴인이 저리 쉽게 찢어져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도망쳐야 했다.
괴인을 찢어 버린 무공.
세상을 짓누르는 기세.
내독단이 아니었다.
괴인의 독 기운을 버텨 낼 수 있는 자라면 전설상의 ‘만독불침’이 확실했다.
애초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대였다.
최대한 빨리 도망쳐서 주인에게 알려야 했다.
만독불침이라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뒤돌아 발을 떼는 순간.
어느새 소청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소청은 그의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찍어 버렸다.
쩌억!
“크악!”
허공을 돌아 바닥에 머리부터 처박혔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차갑게 갈무리된 그의 분노가 여실히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뚜둑.
소청의 손이 휘저어 대는 녹의인의 팔을 꺾어 버렸다.
“끄아아악!”
비명과 함께 뼛조각이 살갗을 뚫고 튀어나왔다.
무덤덤한 그의 눈빛에 녹의인의 눈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고된 수련을 통해 훈련된 자들 중 한 명이었다.
“죽, 죽여라.”
“…….”
소청의 시리도록 무심한 시선이 녹의인의 눈을 향했다.
“후우…….”
당장에 그를 죽일 수 있었다.
목을 꺾어 버리든 온몸의 뼈를 바스러뜨리든 최대한 고통을 주어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냉정해져야 했다.
그는 단서였다.
숨어 버린 마천을 찾아낼 수 있는 기회였다.
“쉽게 죽일 순 없지.”
소청이 녹의인의 목을 가볍게 눌렀다.
털썩 쓰러지는 그의 모습에 소청이 길게 숨을 골랐다.
“자네가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군.”
혁련휘가 다가왔다.
호흡을 가라앉힌 소청을 향해 그가 물었다.
“말해 보게. 혈독이 뭔가?”
혁련휘의 물음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혈독은…….”
소청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찌 그가 그런 사실까지 아는지 의문스러웠지만 혈독에 대한 이야기는 머릿속을 텅 비워 버릴 만큼 잔인하고 충격적이었다.
어째서 소청이 그리 화를 내었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
“어찌 그런…….”
우진혜가 잘게 떨리는 눈으로 녹의인을 바라보았다.
초사와 비마대의 눈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천인공노할 짓이군. 그 많은 사람들을…….”
“그렇기에 마천을 막아야 한다. 중원의 주인이 누가 되건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주인이 마천이라면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해.”
“…….”
“마천과의 전쟁에서 지면 모두 죽는다. 멍청하게 그들에게 협조한 자들도 죽고, 아무 죄 없는 무림 이외의 사람들도 죽는다. 마천혈세. 말 그대로 피의 세상이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정도, 사도, 무림, 천하.
단지 자신들의 세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지켜야만 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지켜야만 이어 갈 수 있는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