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73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73화
72화. 방관자
길고 긴 추격전이 이어졌다.
회룡협에서 곧장 서쪽으로 달린 소청은 감숙의 깊은 곳까지 그를 뒤쫓았다.
일보월하를 펼쳤지만 뒤를 잡으려는 순간 방향을 틀어 버리는 그를 쉽게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감숙성 서북에 위치한 기련산에 다다랐을 때에야 그가 걸음을 멈췄다.
“자, 이쯤 되면 꽤 멀리 온 것 같구먼.”
고개를 돌려 싱긋이 웃는 그의 여유로운 모습에 소청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놀랍군. 그 상황에서 나를 발견하다니 말이야. 확실히 감각이 뛰어나.”
“그대가 마종인가?”
“마종? 나를 그분에 비교하다니. 아쉽게도 아니라네.”
“…….”
“앉지. 마음 같아서는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은데 기련산에는 쓸 만한 곳이 없어서 말이야.”
“…….”
“꽤나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군. 하나 걱정 말게. 아직은 자네를 죽일 생각이 없으니.”
소청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정사마의 무인들은 각자의 기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혁련휘가 떠올랐다.
‘독특한 기운이 있다더니…….’
하지만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막 태어난 아이 같은 느낌이랄까?
더욱이 그 먼 거리를 달려왔음에도 호흡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강하다.
“진소청이라 불러야 하나? 아니면 막야? 여하간 아쉽게 되었어. 자네만 아니었으면 환마가 성공할 뻔했는데…….”
장난치듯 웃는 그의 얼굴에 소청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마종이 아니라면 넌 누구냐?”
“나? 이름을 묻는 것이면 나는 구자겸이라고 하네.”
“구, 구자겸……이라고?”
순간 소청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역천대공 구자겸.
마천의 무인들 중 최초로 역천의 힘을 깨달았던 그는 공포 그 자체였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역천에 물들게 해 수많은 이들이 그의 발아래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잔마, 환마, 독마, 충마.
사세의 힘을 이끌고 중원 북쪽을 정벌한 그가 지나간 곳에 정사 무인들의 씨가 말랐었다.
소청은 결국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천 정벌 당시 가장 잔인하고 포악했던 그를 직접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내분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다면 제갈휘문과 혁련휘는 결코 마천 정벌에서 중원을 구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젠장, 어쩐지 강해 보인다 했더니…….’
막연한 대상이었다면 몰라도 이미 어떤 자인지 알게 되어 버렸다.
긴장감이 극으로 치닫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인해 손끝마저 떨려 왔다.
‘역천대공이라 불렸던 그가 마종이라는 자의 수하가 된 것인가? 설마? 백효와 종리하마저? 도대체 마종이라는 자식은 얼마나 강한 거지?’
대환단의 효능으로 소청은 전보다 확실히 강해졌다.
한데.
이길 수 있을까?
괜히 따라온 건 아닐까?
처음으로 든 의문이었다.
진소청이 된 이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의문이었다.
어느 누구와 싸워도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힘겨운 싸움 속에서 수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결국 이겨 왔다.
그런데 눈앞의 구자겸과의 싸움에서는 자신이라는 것이 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의문이라도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무황 위도혁을 만났을 때는 애초에 싸움의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웬만큼 비슷해야 싸워 볼 생각이라도 하는데 무황이 주었던 위압감은 그런 생각마저 들 수 없게 했다.
그에 반해 구자겸은 묘한 느낌이었다.
투기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기억으로 인한 두려움일 것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빨리 떨쳐 버려야 했다.
이렇게 싸우고 저렇게 싸우고 계획을 세운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또한 두려움을 가지면 손이 느려진다.
“어째서지?”
“응?”
“방유현을 어째서 그렇게 만들었지? 그대의 수하가 아니었나?”
자신이 알고 있는 그의 무위라면 신승과 자신이 있었다고 해도 방유현을 구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생각이냐.”
“생각? 핫핫핫! 이 친구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뭐?”
“어떤 생각을 묻는 것인가? 자네를 유인해 죽이려는 생각? 아니면 무능한 놈들처럼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 아닐까 하는 것?”
“…….”
“그냥 관심이 좀 생겼다고나 할까?”
“관심?”
“그래. 네가 막을 수 있나 없나를 보고 싶었지.”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런 이유라니? 중요한 이유야. 우리가 이만한 힘을 가지고 무림 정벌을 시작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나?”
“무황 위도혁?”
“그래. 무황 위도혁.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 괴물이 끼어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지. 더욱이 제갈휘문이라는 존재도 걸리적거리고.”
그는 마치 알아도 상관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제는 너라는 녀석도 신경을 써야겠군.”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리긴, 본인이 더 잘 알잖아. 폭마를 죽이고 잔마에 이어 환마까지. 솔직히 좀 놀랐지.”
구자겸이 빙긋이 웃었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나는 아직 방관자야. 마종께선 일절 관여하지 말라 하셨거든.”
“마종. 그는 누구지? 당신 같은 자를 수하로 둘 수 있다니…….”
“글쎄. 그건 앞으로 자네에게 숙제로 남겨 두지. 그런데 듣다 보니 자네의 말은 이상하군. 마치 나를 예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대충 자네 수준을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하지.”
“싸우지 않을 셈인가?”
“싸워? 말했잖아. 나는 아직 방관자라고. 마종께서 명을 내리지 않으셨거든.”
“명을 내리지 않았다고?”
“그래. 명을 내린 것은 세주들에게만 한정되었다. 명이 내려지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
“대단한 복종심이군.”
소청이 비웃었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충성심이라고 하지.”
빙긋이 웃는 그를 향해 소청이 피풍의를 끌러 내었다.
결심을 한 것이다.
여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왠지 그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살려 두면 후환이 될 놈이었다.
아직 마천 십이세 중 열이 남아 있다.
놈을 살려 보내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다.
“아쉽겠네. 나는 지금 너를 죽일 생각인데…….”
“뭐?”
차라락.
피풍의가 휘말렸다.
소청의 몸에서 진득한 투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핏!
사라진 소청이 구자겸의 측면에서 나타났다.
휘리링.
바람이 휘몰리는 소리와 함께 창대가 옆구리를 향해 후려쳤다.
“거참. 말귀를 못 알아먹네.”
구자겸이 난감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쩌엉!
마기를 휘감은 구자겸의 주먹이 창대를 후려쳐 내고 소청을 향해 날아왔다.
재빨리 창대를 들어 흘린 다음 공격을 이어 가려 했다.
‘크윽!’
하지만 공격은 이어지지 못했다.
팔이 으스러질 듯한 충격이 짜릿하게 전해져 왔다.
슈욱!
갑자기 구자겸의 몸이 ‘쭉’ 하고 늘어나는 것처럼 소청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뒤늦게 창대가 휘둘러졌다.
콰앙!
일 합을 시작으로 둘은 서로의 잔상을 쫓으며 수도 없이 많은 공방을 이어 갔다.
순식간에 십여 합을 나눈 둘은 이 장여의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소청은 터져 버린 옷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 생긴 시퍼런 멍 자국을 보았고, 구자겸은 잘려 나간 옷자락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제법이군. 제법이야.”
그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소청이 자신의 공격을 이렇게 수월하게 막고 공격까지 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고작해야 세 명의 ‘세주’를 이긴 놈이 자신의 공격을 막고 피한 것도 모자라 옷자락을 잘라 내었다.
“괜히 세주를 셋이나 죽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나지막하게 뇌까리는 그의 등 뒤에서 흉포한 마기가 스멀거리며 흘러나왔다.
시커먼 그림자는 마치 입을 벌리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물처럼 보였다.
찌릿찌릿하게 느껴져 오는 그의 힘에 온몸의 털들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종께서 내리신 명이 있었지만, 계속해 볼 생각이라면 한 번쯤 밟아 줄 용의는 있다.”
구자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고 검게 변한 눈동자에 광기가 휘몰아쳤다.
그의 기운에 대항하기 위해 소청은 태극의 기운을 일으켰다.
소청의 몸에서 이전과 다른 힘이 느껴지자 구자겸이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크크크. 좋아. 그렇게 나와 줘야지.”
짧은 감탄과 함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보가 내디뎌짐과 동시에 주먹이 뻗어졌다.
이전보다 속도가 느려진 것은 그가 권공에 더욱 많은 힘을 담았기 때문이었다.
수백 개의 권격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가 일제히 소청을 향해 내려앉았다.
권격이 품은 힘이 풍압을 만들어 세상을 할퀴어 놓았다.
그 힘이 아직 다 다가오지 않았음에도 옷이며 얼굴 피부가 찢어져 나갔고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리고.
태극의 기운을 담은 창대가 회전을 시작했다.
서서히 궤적을 만들어 가던 창대에 잔상이 생기고 그 회전력이 갈수록 더해져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휘오오오.
창대의 회전으로 소청이 있던 자리에 공진이 만들어졌다.
내력이 커진 때문인지 패월창법의 태월식은 이전보다 훨씬 강한 힘을 발휘했다.
구자겸이 뻗었던 수백의 주먹이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권격이 사라졌다.
하지만 회오리는 여전히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우읍!’
소청을 아래로 보았던 구자겸이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지면에 두 발을 박아 넣었다.
태월식이 만들어 낸 공진은 주위에 있던 나무와 바위들마저 빨아들였고, 창대의 회전에 부딪힌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취리리리.
소름 끼치도록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창대가 거대한 회오리를 머금고 뻗어져 나왔다.
“흐아압!”
창대에 실린 기운이 예상 밖으로 강했다.
하지만 혼신의 힘이 담긴 일격을 피한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던 구자겸이 마기를 겹겹이 휘감은 주먹으로 창극을 후려쳤다.
짜우-!
두 개의 기운이 부딪치며 세상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산자락을 울리는 공기의 파동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뒤이은 충격파에 땅이 거칠게 갈라졌다.
드드드드.
맞붙은 구자겸의 손등과 소청의 창대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서로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둘은 마치 서로의 내력을 겨루듯이 접점에 모든 힘을 쏟아부으며 노려보았다.
하지만 비등한 힘을 가진 둘의 승패는 무구에서 갈렸다.
지옥혈잠의 내구성이 구자겸의 피부를 짓이기기 시작했다.
피부가 뜯겨 나가고 핏물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피부에 이어 그 속 살점과 뼈마디가 뒤틀릴 것 같은 느낌에 구자겸이 손을 떼고 소청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명치를 노리고 솟구쳐 오르는 일 장에 회수되었던 소청의 창대가 팔괘연환을 따라 초식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피하고 부딪치며 공방을 주고받는 묵직한 소리와 충격파에 기련산이 뒤흔들렸다.
구자겸은 강했다.
대환단으로 인해 내공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음에도 겨우 조금의 승기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태극의 힘을 두 번이나 사용했지만, 그에게 남긴 상처는 손등 가죽을 벗겨낸 것과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자잘한 상처뿐이었다.
더욱이 손등 가죽이 벗겨진 뒤로는 마기가 이전보다 더욱 짙어졌고 무공이 더욱 광포해졌다.
만약 그가 다른 마천의 인물들처럼 역천의 진언을 사용해 힘을 배가시킨다면?
‘죽음…….’
뒷머리가 쭈뼛하게 솟아올랐다.
후웅!
이어진 구자겸의 발이 소청의 측면으로 날아왔다.
쩌억!
다음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일격에 창대로 막았던 소청의 몸이 한참이나 밀려났다.
구자겸은 소청을 쫓지 않고 제 손과 걸레처럼 변해 버린 자신의 옷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하아! 이것 봐라?”
광기로 물든 그의 두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