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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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72화
71화. 패월(覇月)의 시작
‘이건…….’
남아 있는 흔적을 살펴보던 소청은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조력자가 있다.’
소청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자 청명이 표정을 굳히면서 물었다.
“어찌 그러는가?”
“…….”
대답하지 않은 소청이 그곳에 남은 흔적을 세밀하게 살폈다.
“이, 이런…….”
소청의 고개가 북쪽을 향했다.
지면의 흔적을 보았을 때 둘 중 누군가는 강한 힘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그 방향은…….
“화산!”
“뭐?”
“놈이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오대 무가를 돕기 위해 간 모양이군. 하면 그사이 힘을 회복했단 말인가?”
소청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보다 조력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어떤 인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그 마종이라는 자인가?”
“모르겠습니다. 마종인지 아니면 마천의 또 다른 인물인지. 일단은 서둘러야겠습니다.”
“…….”
“무언가 불안합니다.”
소청은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일단은 먼저 가겠습니다.”
왠지 급한 마음이 든 소청이 짧게 인사를 하고 북쪽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뭐…….”
뒤따르려던 청명이 순식간에 점처럼 변해 버린 소청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허, 이거 원, 저러면 따라갈 수가…….”
“…….”
태존의 중얼거림에 은수와 비마대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들도 따라오게. 먼저 가지.”
“…….”
사라지는 태존의 뒷모습에 은수와 비마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공과 은신술을 죽도록 익혀 온 그들이었지만 이분이나 저분이나 따라가기는 똑같이 어려운 수준이었다.
* * *
상남(商南).
섬서와 호북성의 경계.
오대 무가를 막아선 화산파의 무인들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오대 무가의 수장들은 그것이 제갈휘문의 계략임을 알지 못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화산과 제갈휘문은 그들을 회룡협으로 유인했다.
섬서와 호북을 잇는 천장단애의 협곡, 한번 들어서면 출구 방향으로밖에 빠져나갈 수가 없는 그곳에서 제갈휘문의 계략이 빛을 발했다.
“화룡협입니다. 함부로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하지만 위험에 대한 걱정보다는 조금만 더 가면 잡을 수 있다는 탐욕이 더 컸다.
때마침 종남이 회룡협의 뒤편을 막았다는 전서구가 날아왔다.
협곡의 절반에 못 미치는 위치에 도착했을 때,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협곡 상단에 나타났다.
우르르르.
돌무더기가 쏟아지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죽여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제 아들을 마천으로 몰아간 자들에 대해 독이 잔뜩 오른 제갈무성의 목소리가 협곡을 울렸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린 상황에 화산의 무인들까지 몸을 돌려 공격해 왔다.
결국 그들은 눈앞에 화산과 제갈휘문을 두고 피해만 입은 채 퇴각해야 했다.
삐이이익!
긴 호각성이 울리고 무인들이 퇴각했다.
하지만 퇴각은 더뎠고 피해는 계속해서 늘어 갔다.
쫓고 있던 그들이 도리어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하기 전까지는 계략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그들은 동료의 시체를 밟고 회룡협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다.
제갈휘문의 계략에 당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직 그들이 가진 무인들이 몇 배는 되었다.
종남이 뒤를 지키고 있다 했으니 협곡을 막고 좌우를 치고 올라가 제갈세가를 무너뜨리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 협곡만 빠져나간다면…….’
하지만.
힘겹게 함정을 뚫고 되돌아 그들은 눈앞에 닥친 상황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황색 가사를 입은 승려들의 물결이 나타났다.
뒤를 쫓아온 제갈휘문의 한마디는 그들의 심정을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종남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
“종남이 화룡협의 뒤를 막았다는 전서는 제가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우-웅!
소림승들이 갈라지며 익숙한 얼굴의 노승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찌 정파의 무인들이 마도를 걸으려 하는가!”
소림 사자후가 오대 무가를 뒤덮었다.
“시, 신승…….”
소림 신승 일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등장으로 무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동요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무, 무당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오대 무가의 무인들이 모조리 고개를 돌렸다.
백의장삼에 도관을 쓴 검수들이 서쪽에서 나타났다.
‘제길…….’
무가의 수장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제 그만 투항하시오. 곤륜은 이미 청성과 아미에게 가로막혔소!”
제갈휘문의 말은 그들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이 부숴 버렸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진 것이다.
종남이 등을 돌렸고 곤륜이 걸음을 멈췄다.
소림, 무당, 화산.
정천을 이끌어 온 거두들이 제갈휘문의 손을 들어 주었고 신승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여전히 그들의 수가 많았지만 명분을 잃었다.
방유현, 남궁천세.
구심점이 되어야 할 그들이 없으니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무가의 수많은 무인들이 칼을 내리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십 년, 길게는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자도 있었다.
남궁천세가 오존의 힘을 얻고 정천의 맹주가 되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천이든 정천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야흐로 오대 무가의 세상이 올 것이라 믿었다.
모두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는 그 순간.
소름이 돋아 오르게 하는 살기가 뒤편에서 느껴져 왔다.
크아아아…….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원로원주 방유현이었다.
“워, 원주!”
반색한 취선개가 잽싸게 뛰어갔다.
살아날 구멍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감추어야 할 마기가 온몸을 통해 칙칙하게 뿜어지고 있었다.
“워, 원…….”
뿌드득.
취선개의 목이 꺾였다.
눈을 뜬 채로 목이 꺾여 그대로 절명했다.
“워, 원주?”
오대 무가의 수장들은 눈앞에서 죽은 취선개와 방유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크으으으…….”
코끝을 찡그리며 먹잇감을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방유현의 시선이 멀리 제갈휘문을 향했다.
“제갈휘문을…… 죽인다.”
낮고 스산하게 깔린 중얼거림과 함께 방유현의 신형이 섬전처럼 쏘아졌다.
“피, 피해라!”
가로막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찢어 버리는 방유현의 모습에 무인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크아아악!”
먹이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 방유현이 제갈휘문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막아라! 군사를 노린다!”
운상자가 제갈휘문을 뒤로 빼내자 화산의 무인들이 신속하게 검진을 이뤄 방유현을 막았다.
쩌엉!
후려친 주먹과 수십 개의 검극이 진한 충격을 만들었다.
방유현의 걸음을 멈췄으나 주먹과 부딪힌 매화검이 모조리 휘어졌다.
“크아앗!”
따다다당!
우그러졌던 매화검이 모조리 튕겨 나갔다.
“놈! 멈춰라!”
그 사이로 뛰어든 신승의 금빛 일장이 방유현의 가슴을 때렸다.
쿵!
가슴에 선명한 장인(掌印)이 새겨진 방유현은 한참을 미끄러져 나갔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독한 마기가 일어나 신승의 장인마저 지워 버렸다.
“이, 이럴 수가! 어찌?”
당황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방유현은 정상이 아니었다.
취선개를 죽인 것을 보면 이미 피아를 구분할 정신도 없어 보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대 무가든 구파의 무인이든 휩쓸리는 순간 죽임을 당할 것이다.
아무리 변절했다 해도 불자인 그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모두 물러나라!”
신승이 불호를 외치자 금빛 서기가 뿜어져 나와 가까이 있던 이들을 밀어내었다.
졸지에 구경꾼이 되어 버린 이들은 방유현과 신승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쾅! 콰앙!
신승의 공격이 사방에 뿜어지고 방유현을 몰아붙였다.
마기와 불기가 엎치락뒤치락하며 물고 늘어졌다.
신승의 공격에 수없이 격중당하면서도 방유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제갈휘문 하나만 보이는 것인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노옴!”
신승이 방유현의 앞을 막아서며 마보세를 취하고 합장했다.
우우우웅!
금빛 서기가 그의 전신을 감싸고 휘돌아 오르며 두 발이 지면을 움푹 파고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쌍장이 내질러졌다.
금빛 서기가 거대한 장인의 모양으로 뻗어졌다.
쿠웅!
방유현이 뿜은 마기와 신승의 대력금강장이 부딪치며 협곡을 뒤흔들었다.
“크윽.”
“신승!”
신승이 마기에 주춤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은 방유현의 신형이 제갈휘문을 향해 날아갔다.
“크아아아!”
짐승처럼 달려드는 방유현이 가로막고 있는 화산의 무인들을 모조리 튕겨 버렸다.
그리고 내뻗은 손에 짙게 스민 마기가 제갈휘문을 향해 쏘아졌다.
“하압!”
운상자의 검에 맺혀 든 붉은 강기가 마기를 때렸다.
콰아앙!
하지만 그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마기는 부딪쳐 온 강기를 조각내며 계속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쏘아진 새하얀 빛 무리가 마기의 앞으로 끼어들었다.
파라라락!
쩌어엉!
충돌의 여파가 협곡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갈휘문의 앞을 가로막은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진소청.
방유현의 뒤를 쫓아온 소청이 절체절명의 순간 마기를 튕겨 내었다.
“장문인. 군사와 함께 몸을 피하십시오. 이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소청이 방유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
그의 등.
운상자는 소청의 등이 왠지 너무나 거대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존재감이 들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방유현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대 화산의 장문인이라는 신분으로 적에게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는 것이 부끄러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집부린다고 자신이 도움 될 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부탁함세.”
운상자가 검을 거두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갈휘문의 허리를 안은 그는 빠르게 협곡 뒤쪽으로 물러났다.
“크으으…….”
하지만 방유현은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제갈휘문을 뒤쫓으려 협곡으로 달렸다.
쩌억!
하지만 소청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휘돌린 창대가 그의 안면을 후려쳤다.
바닥에 처박혔던 방유현이 자신을 막아선 소청을 향해 짙은 마기를 뿌려 내었다.
내전은 끝났다.
방유현이 마기를 드러낸 이상 오대 무가는 완전히 명분을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방유현 하나였다.
방유현을 죽이고 정천에 뿌리 깊이 박힌 마천의 흔적을 뽑아내면 될 일이었다.
‘역천의 진언으로 인성을 잃은 마귀.’
눈가에 귀기(鬼氣)마저 서린 방유현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피에 굶주린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를 먼저 넘어야 할 거다. 환마.”
양손으로 창대를 말아 잡은 소청의 몸에서 거대한 투기가 피어올랐다.
“…….”
초점이 사라진 방유현의 검은 눈이 소청을 향했다.
협곡을 가득 채운 소청의 존재감에 반응한 듯 방유현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피어올랐다.
취이익!
뿜어진 마기가 세상을 검게 물들였고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소청을 향해 쏘아졌다.
소청을 향해 뻗어진 공격은 이전보다 약했고 단조로웠다.
이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사용하는 방유현이었지만 그뿐이었다.
강하기만 할 뿐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하얀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진 소청의 창대가 방유현의 온몸을 두들겼다.
하지만 무쇠라도 두른 것처럼 방유현은 지치지 않고 일어났다.
다리가 꺾여도 일어났고 팔이 부러져도 휘둘렀다.
‘마기에 취해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소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러뜨려도 움직이니 아예 갈가리 찢어버려야 했다.
우우웅!
두 혈의 기운을 단전에 몰아넣었다.
태극은 이전보다 더욱 거대했고 응축되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더욱이 그 거대한 기운을 품고 있음에도 단전이 너무도 평온했다.
창대로 후려쳐 방유현을 땅바닥에 처박아 버린 소청이 솟구쳐 올라 창대를 세웠다.
창대에 하얀 빛 무리가 어렸다가 곧장 바닥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태극의 힘을 품은 만월의 기운이 방유현을 짓눌러 놓았다.
또 다른 태극이 단전에 모임과 동시에 차디찬 바람이 쏟아져 방유현의 전신을 난자했다.
콰콰콰콰.
대지가 거칠게 파헤쳐지고 마기가 뜯겨 나갔다.
소청이 내뿜던 힘의 양상이 이전과 달라졌다.
사방으로 충격파를 내뿜던 힘이 방유현을 중심으로 한 삼 장 이내의 공간에 모조리 집중되었다.
집중된 만큼 유실되는 힘이 적어졌다.
“끄어어어…….”
팔다리가 잘렸다.
그럼에도 검게 물든 눈만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소청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천맹의 맹주.
마천의 환마.
그 두 가지 이름을 가졌던 방유현은 기어 다닐 수도 없는 몸이 되어 몰락했다.
그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새로운 오존, 아니 오존의 경지마저 초월해 버린 소청은 그 전설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청의 시선이 회룡협으로 향했다.
그리고 협곡의 상단에 우뚝 선 나무 위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도발적으로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 왠지 모를 이끌림이 느껴졌다.
“소청!”
제갈휘문이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고 다가왔지만 소청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인사는 나중에 하지.”
그리고.
파앙!
소청의 신형이 쏘아지듯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