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65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65화
64화. 유인
무한 북쪽의 산기슭.
묵영단 안가.
천망팔진은 호북성의 중앙인 형산(衡山)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소청은 천망팔진의 맥을 모조리 박살 내고 통이각을 부숴 눈과 귀를 가리고 흔적을 남겨 적을 남쪽으로 끌어 내렸다.
수가 모인다 싶으면 도망치고, 개별로 모여 있는 이들을 발견하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박살 내었다.
“흔적을 남긴 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막 천망팔진의 꼬리가 무한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소청이 실소를 흘렸다.
통제력을 잃어버린 그들의 상황대처 능력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결국은 남궁천세가 오대 무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겠지. 똑같은 변절자들이니 제대로 말을 들을 리가 없지.”
마천이라면 몰라도 그들은 변절자에 불과했다.
마천에 협조한 것은 모두가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또한 그들이 협조하는 대상은 ‘환마’이지 남궁천세가 아니었다.
어쩌면 저들 사이에서도 반목이 있을지도 몰랐다.
남궁가를 밀어내고 자신의 가문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궁리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결국엔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겠지. 자, 그럼 한 닷새 정도 지났으니 제갈휘문이 화산에 무사히 도착했을 것이고…….”
소청은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냈다.
톡.
알싸한 향기가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한참을 기다리자 어디선가 ‘찍찍’거리는 소리와 함께 적서가 나타났다.
그리고.
“패월을 뵙습니다.”
비마대의 은수.
소청을 따라 사도련으로 갔던 자들 중 가장 먼저 구타를 당했던 인물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나?”
“에. 군사님께서 근교에 대기하라 했습니다. 패월께서 오실 것이라고.”
“이제 제법 머리가 맑아졌나 보네. 대충 나의 움직임도 예상하고 있는 걸 보면.”
소청이 피식 웃었다.
“그보다 은신이 많이 늘었군.”
“패월 덕분입니다.”
은수는 다른 비마대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그저 ‘길들이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타를 가장한 교육임을 알게 되었다.
은신자는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소청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반복적으로 훈련하면서 그들의 감각은 극도로 단련되었고 은신 능력은 더욱 은밀해졌다.
그리고 구타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그들의 은신 능력에 가장 필수적인 혈도를 개방시키는 노력이었다.
물론 죽을 만큼 아픈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하지만 아직 부족해. 앞으로 좀 더 교육 강도를 올려야겠어.”
“…….”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중얼거림에 은수가 살짝 몸을 떨었다.
“자, 그럼 일단 보고부터 받지.”
“예. 군사님은 화산에 무사히 도착해 장문인과 검존을 만났습니다.”
화산에 도착한 제갈휘문은 검존에게 방유현이 환마이며 남궁천세를 비롯한 오대 무가 등이 변절했음을 알렸지만 그들 역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믿기 쉽지 않겠지.”
“예. 일단은 뇌옥을 탈출한 도망자의 신분이기도 하고 군사님에 대한 의혹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겠지. 서로 간의 신뢰만으로는 문파를 움직일 수도 없겠지. 설사 화산이 움직인다 해도 소림과 무당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전력이 턱없이 부족할 것이고.”
“예. 그 부분을 고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곧 대책이 나올 것이니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결국은 증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겠지?”
“예. 그렇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증거라…….”
소청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을 하다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되겠네.”
“예?”
“모두에게 보여 주기만 하면 될 거 아냐.”
은수는 소청의 비릿한 미소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그리고 진가로 갔던 감찰단의 소식입니다.”
“…….”
담담했던 소청의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혁련휘 소련주가 서남 지부는 물론 감찰단 일백을 전멸시켰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운남의 대족장이 무인 일천을 이끌고 진가를 지키고 있습니다. 혁련휘 소련주가 혈랑대를 남기고 출발했다고 하니 열흘 후면 도착할 것입니다.”
“많이도 데리고 왔네.”
투덜거렸지만 실로 다행이었다.
모자겸이 지켜 준다면 더 이상 진가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혁련휘는 늦지 않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 주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진가에 닥쳐왔을 어려움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혁련휘…….’
살면서 처음으로 가져 본 가족들을 구해 준 그에 대한 고마움을 당장이라도 찾아가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강은?”
“그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흑선이 변절자들에게 넘어가 버려서 흔적을 쫓기가 어렵습니다.”
“음…….”
“하지만 중원에 깔린 묵영단을 움직이고 있으니 곧 파악될 것 같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소청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둬라. 그 녀석은 알아서 잘할 거야.”
“…….”
“지금으로선 내 동생 때문에 묵영단을 움직일 수는 없다. 묵영단의 전력을 모조리 저들의 동향 파악에 쓴다고 해도 부족해.”
맞는 말이었다.
현재 정천맹 예하 지역에 퍼져 있는 묵영단은 흑비 예하의 둔영이 각 성별로 서른, 초사 예하 비마 스물, 우철 예하 무흔 열 명 내외였다.
모두 합한다 해도 천을 넘지 않았다.
“정말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군.”
“…….”
그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결국에는 소림과 무당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리군.”
“예. 군사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소림과 무당은 중원 무학의 조종이자 자존심 같은 곳이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이 곧 명분이 될 정도로……. 그렇기에 함부로 움직이지도,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도 않지. 우리에겐 매우 불리한 일이지만.”
소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띠를 졸라매었다.
“자, 이제 움직여야지.”
“예? 어디로?”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 않았나?”
“…….”
“만들어 주겠다. 대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소림의 신승과 무당의 태존을 움직이라고 해. 그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고.”
“…….”
은수는 소청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만약 이번 일만 성공하면 제대로 역습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리되면 방유현, 아니 환마라는 놈이 십 년간 노력해서 만들어 놓은 걸 단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어.”
그런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초사와 비마대에게 지금 즉시 남궁세가로 날아오라고 해.”
“남궁…….”
“그리고 제갈휘문에게도 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신승과 태존, 검존까지 남궁세가로 불러와야 한다고.”
“설마 남궁가를 칠 생각입니까? 하지만 그리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아니 역효과는 없을 거야. 아마 제갈휘문이라면 내 말뜻을 알 거야. 내가 보여 주려는 증거가 무엇인지도.”
“…….”
“가라. 남궁가에서 보지.”
소청이 피풍의를 펄럭이며 안가를 빠져나갔고 은수는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서둘러 화산으로 향했다.
* * *
쾅!
“이게 지금 말이 되는가!”
방유현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진소청이 사방에서 나타나 천라지망을 때려 부수고 통이각까지 무너뜨리고 도망쳤다.
안 그래도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데 그 후로 날아온 보고서들이 가관이었다.
남쪽 형산에서 진소청의 종적이 사라졌다.
천라지망이 모조리 이동했는데 그의 꼬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더욱이 사천으로 갔던 감찰단이 모조리 전멸했다는 연락이었다.
진가를 마천으로 몰아 회유되지 않은 구파를 옭아매려던 계책이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남궁천세를 비롯한 종남과 오대 무가의 수장들이 모조리 원로원에 모여 머리를 처박았다.
“죄송? 죄송?”
방유현의 몸에서 마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 자리에 모인 자들은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 굳이 신분을 감출 필요도 없었다.
방유현의 발이 남궁천세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끄으윽.”
짓눌리는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던 남궁천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진가에 대한 공작도 실패하고, 제갈휘문도 놓치고, 천라지망은 깨어지고. 그리 자신만만하던 놈이 죄송? 네놈이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남궁천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맞습니다. 진소청이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제갈휘문을 데려간 이도 남궁천위가 아닙니까? 그가 아니었다면…….”
뻐억!
취선개가 남궁천세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말을 더했다가 내지른 발길질에 튕겨 나갔다.
“닥쳐라! 머저리 같은 놈들! 남궁천위라고? 그놈이 그만한 능력이 있어 보였더냐!”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취선개를 걱정하기보다 어깨를 움츠리며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눈앞에서 만나고도 모르겠는가! 제갈휘문을 구해 간 것은 남궁천위가 아니라 진소청이다!”
“…….”
“남궁천위, 그 머저리 같은 놈은 이미 죽었겠지. 덤으로 은소혜 그년도 놓쳤을 것이고!”
“…….”
남궁천세의 눈이 부릅뜨였다.
“이제 어찌할 것이냐? 만약 제갈휘문이 살아 돌아가 구파를 규합하면?”
“…….”
모두가 그의 말뜻을 대번에 눈치채었다.
소림과 무당, 보타문이 움직인다.
그 말은 곧 정천 신승, 검후, 검존, 태존이 움직일 것이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움직이면 여론이 돌아선다.
그리되면 변절자들의 예하 세력에도 동요가 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정천의 눈을 속이고 은밀히 활동해 온 것도 그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갈휘문은 의심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그리 쉽게 움직일 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던 종남의 장문인은 매서운 눈초리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허, 어찌 이리 멍청하단 말인가? 네놈들의 머리로 제갈휘문을 판단할 생각이더냐? 그 대단한 오존들 사이에서 오대 무가도 아니고 구파도 아닌 일개 방계인 나를 정천맹주로 올린 놈이다. 구파가 제대로 협조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 대단한 무황의 공격을 번번이 막아 온 그다.”
“…….”
“그놈이 능력이 없어서 지금까지 우리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생각하는 것이냐?”
“…….”
“놈의 눈과 귀를 수없이 가렸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놈의 정보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 모두가 놈이 나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지.”
방유현이 분노로 끓어오른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모두 알았을 것이다. 제 놈이 마천으로 몰리면서 우리에 대해서 모조리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진소청이라는 ‘칼’까지 생겼다. 그럼 어떨 것 같으냐?”
“…….”
“천망팔진을 해제한다. 지금 즉시 우리의 세력을 정천맹으로 집결시켜라. 해남과 곤륜도 부르라. 구파가 규합되기 전에 저들을 친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마천에 의탁한 것은 제 가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다.
마천의 힘을 빌려 구파를 넘어 보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리되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가 생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그들을 보며 방유현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이 와중에도 계산을 하는 것이냐? 멍청한 것들, 지금 저들을 치지 않으면 어찌 될 것 같으냐? 본 천에 합류한 네놈들을 저들이 그대로 둘까? 어차피 모두 숙청당하고 가문은 뿌리째 뽑혀 나갈 것이다.”
“…….”
잘못된 선택이었다.
결과가 이리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했다면 애초에 방유현의 편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방유현의 말대로 그들의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집결.
그리고 전쟁.
맹주전으로 돌아온 남궁천세는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고작 일 년도 되지 않았다.
맹주에 오르고 비상하는 남궁세가를 꿈꾸어 왔다.
오존에 오르기 위해 방유현이 마천이라는 곳의 주구인 줄 알면서도 충성을 맹세하며 변절했다.
정천을 마천에 바치겠노라 호언장담했다.
“내 선택이 잘못되었단 말이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남궁천세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한 장의 서찰이 눈에 들어왔다.
@[남궁가에서 기다리겠다.
@서둘러 오지 않으면 네놈이 보는 것은 네 가솔들의 목뿐일 것이다.
@진소청.]
“이, 이 개자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