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57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57화
56화. 살수의 전쟁
짜아앙!
파앙!
사람은 없고 소리만 들려왔다.
마치 유령들의 싸움처럼 부서진 기의 조각들이 낭인 시장의 잔해를 헤쳐 놓는 모습만 보였다.
“저, 저걸…….”
갑작스러운 폭발에 시선을 집중하던 섬뢰와 비마대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폭발과 함께 원형으로 뻗어진 충격파가 낭인 시장의 담벼락을 모조리 무너뜨렸다.
부서진 건물 잔해가 보였고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있었다.
응축된 기운의 형체가 사방을 날아다니며 부숴 놓고, 중앙에서 만나 폭발하듯 터져 나가고 있는데 정작 싸우는 당사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가 보여야 감탄을 하든지, 놀라든지 할 텐데…….
“은신술이라는 게 이렇게 대단한 거였나?”
“…….”
섬뢰가 감탄을 쏟아 내며 비마대를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차아악!
바로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가 길게 파여 나갔다.
본능적으로 몸을 틀지 않았다면 몸이 절반으로 잘려 나갔으리라.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잠형술을 펼치는 잔마는 이어지는 섬찟함에 조금도 쉴 수가 없었다.
위치를 잡을 수가 없었다.
공격을 피했다 싶으면 어느새 뒷등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빠르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찾을 수도 없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더욱 뛰어난 살수.
상대는 자신을 정확히 보고 있었지만, 그는 상대의 흔적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은신술이라니…….’
그저 무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그가 자신을 뛰어넘는 은신술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아온 무인들은 은신술을 익히지 않았고 은신술을 익힌 이들은 대부분 무공이 약했다.
그런데.
파악!
날 세워진 창극이 잔마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크윽!’
비명을 억누른 잔마가 재빨리 몸을 이동했다.
그의 뒤로 살수들만이 느낄 수 있는 섬찟함이 뒤따랐다.
그것은 단번에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지만 몰이하듯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다가와 자신의 몸에 조금씩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두려움?
뒷목에 소름이 돋아 오르는 느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최상의 경공술을 익혀 왔다.
최고의 은신술을 익혀 왔고, 그에 뒤지지 않는 무공을 익혔다.
비록 무공만큼은 낮았지만 나머지 열한 명의 세주들에 비해 배는 뛰어난 경공술과 은신술이라면 그들과 동등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담아 두었던 자신감이 모조리 무너졌다.
유령 같은 진소청 놈에게…….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살아 나가야 한다 생각했다.
놈이 알고 있는 것을 마천에 알려야 했다.
자신과 편살원이 사도련의 인물을 죽이지 못했으니 환영곡의 대체자 또한 그 임무를 다할 수 없었다.
사도련에 대한 공작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천이 드러났음을 경고하고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천맹에 구축한 자신들의 세력조차 위태로울지 모른다 생각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잔마의 두 손이 묘한 형상을 만들며 빠르게 움직였다.
구자호신법(九字護身法) 역천.
아홉 번의 변화가 펼쳐졌던 순의 역으로 맺히자 그의 몸에 기이한 힘이 감돌기 시작했다.
취리릭!
까앙!
한 번의 부딪힘과 함께 물러난 소청은 갑자기 변화된 잔마의 기운에 눈을 찡그렸다.
양손에 태도와 소태도를 나누어 쥐고 선 잔마의 몸에서 귀기가 흘러나왔다.
회색으로 변해 버린 그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것은 너무도 익숙한 기운이었다.
‘마기…….’
본신의 힘으로 소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잔마는 마천에 귀의하면서 얻게 된 새로운 힘을 쓰기 시작했다.
동영살법에 역천의 진언을 읊었다.
휘오오오.
잔마의 몸에서 진득한 마기가 시커멓게 뿜어져 안개처럼 변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안개에 스미어 흩어졌다.
-흐흐흐흐.
동굴 안에 퍼진 울림처럼 스산한 웃음소리가 안개 속을 채웠다.
-인정하지. 네놈이 더 뛰어나다는 걸. 하나 흑무살법(黑霧殺法)을 벗어날 수는 없을 터.
-크크크.
여섯 방위에서 동일하게 들려온다는 전설상의 육합전성처럼 소리의 진원지를 찾을 수 없는 울림이었다.
소리도 소리였지만 잔마의 존재감이 넓게 펴진 안개만큼이나 거대해졌다.
취리릿!
옷자락이 찢어졌다.
안개가 칼날처럼 변해 소청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옷 사이로 진한 피가 스며 나왔다.
“…….”
소청은 안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풍의에 들어간 기운을 풀어 버렸다.
펄럭.
힘없이 늘어진 피풍의를 등어림에 걸친 소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차피 상대의 모습은 안개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은신의 원리는 똑같았다.
안개는 환영과 같은 눈속임일 뿐이었다.
상대의 시각을 차단하고 소리를 퍼트려 두려움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촤악!
앞섶이 길게 베여 나가고 가슴께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짙은 혈향이 피어올랐지만 소청은 마치 싸움 자체를 포기해 버린 것처럼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은신으로 모습을 감춘 이상 기운을 일으키진 못할 것이다. 피해는 크지 않을 거야.’
소청은 눈으로 보는 대신 모든 감각을 청각에 집중했다.
상대의 수법이 눈속임이라면 어차피 시각은 혼란만 줄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한다.
소청은 머릿속의 모든 생각을 지웠다.
웅장하게 쏟아지는 폭포를 보고 있으면 소에 닿아 부서지는 폭포 소리만 들리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멍하니 하늘을 보면 폭포 소리가 잦아들고 산새의 지저귐이 들리고 심장이 뛰는 소리마저 들을 때가 있었다.
집중을 흩어 버림으로써 더욱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슥, 슥, 슥.
지면을 숨죽여 스치는 발소리.
지잉.
칼이 공기와 맞닿으며 떨리는 미세한 소리.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취릿.
등 뒤를 돌아온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그의 척추를 노리고 날아왔다.
쉭!
가볍게 굽힌 등 위로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피했다.
소리는 칼의 움직임을 뿌옇게나마 머릿속에 그려지게 했다.
눈으로는 앞만을 볼 수 있었지만 귀로는 주위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상처가 줄어들었고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칼날을 잡은 손이 느껴졌고 하얗게 빛나는 칼날이 더욱 예기를 발했다.
‘어, 어떻게?’
잔마는 소청의 회피 빈도가 늘어나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의문은 오차를 만들고 오차는 실수를 불러왔다.
‘죽여 주마.’
뜻대로 되지 않으니 역천의 마기가 살심을 불러왔고 냉정을 잃게 했다.
잔마의 칼에 미약하게나마 기운이 어리는 순간.
소청은 그의 모습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잡았다!’
눈이 번쩍 뜨이고.
파앙!
발이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터억!
순간적으로 공간을 이동해 온 소청이 내뻗은 손에 잔마의 모가지가 움켜쥐였다.
콰앙!
소청은 잡음과 동시에 잔마의 몸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커억!”
거세게 뒷머리를 부딪친 잔마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소청의 하얀 송곳니가 드러났다.
콰직!
움켜쥔 주먹이 단전의 기운을 모조리 머금고 내질러졌다.
콰직! 콰직!
사람의 뼈 중 가장 단단하다는 두개골이 부서지는 잔인한 소음과 함께 잔마의 머리가 지면을 파고들었다.
“…….”
들어 올린 소청의 주먹에 진득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단 세 방.
모가지를 움켜쥐고 내리꽂은 세 번의 주먹은 잔마의 얼굴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 놓았다.
툭.
잔마의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 다리도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숨소리는 느껴지지 않았고 맥이 점점 느려졌다.
“…….”
소청은 무심한 눈동자로 생명이 꺼져 가는 잔마를 바라보다 일어났다.
낭인 시장을 가득 채웠던 검은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고 주위의 모습이 드러났다.
폐허로 변해 버린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소청뿐이었다.
‘아깝군. 죽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직은 내가 부족함이야.’
잔마를 살려 두었다면 마천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까?
약간의 아쉬움이 남은 표정으로 소청이 몸을 돌렸다.
소청의 눈에 낭인 시장을 포위하고 있던 뇌령도문과 비마대의 인물들이 보였다.
‘도망친 놈들은 없었나 보군. 하긴, 그렇게 보기 좋게 모아 주었으니…….’
그 순간.
비마대 무인들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고, 손가락을 뻗어 무언가를 외치려는 모습이 보였다.
섬뜩한 느낌이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촤르르륵!
쇄겸(鎖鎌).
사슬이 달린 낫이 소청의 목을 잘라 내었다.
픽!
하지만.
목과 몸이 분리된 소청의 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잔상.
쇄겸은 잔상을 베어 내고 쇠사슬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끄으으으…….”
쇄겸이 돌아간 방향에 잔마가 기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얼굴과 온몸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돋아 올라 있었고 초점 없는 눈동자가 기괴하게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츠츠츠츠.
옅어졌던 검은 안개가 편살원 살수들의 시체를 덮었다.
트드득. 트드드득!
뼈가 뒤틀리는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안개가 시신에 남은 생기와 핏물을 모조리 빨아 먹었다.
안개가 지나간 곳에 남겨진 시신은 고목처럼 말라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그 안개는 다시 잔마에게 흡수되었다.
소청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크으으으…….”
잔마의 입에서 짐승의 그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하들의 시체마저 이용한 거냐? 그래, 너 같은 놈을 살려 둘까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던 거야.”
촤라라락.
피풍의가 휘말려 창이 되었다.
양손으로 창을 움켜쥐고 마보세를 취한 소청의 단전에 태극의 기운이 만들어졌다.
드드드드.
그의 기운에 대지가 떨리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태극의 기운이 손을 타고 흐르자 창대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청은 또 다른 혈의 기운을 비워진 단전에 담았다.
팟!
소청의 발이 지면을 박차고 단번에 잔마의 눈앞에 나타났다.
“크아아악!”
언뜻 비명과 같은 울음과 함께 시커먼 마기를 머금은 잔마의 쇄겸이 소청을 향해 날아왔다.
푸욱!
내지른 창이 잔마의 복부를 꿰뚫는 순간 소청이 단전에 모인 또 하나의 기운을 창대에 맺힌 태극에 부딪쳤다.
쿠아아앙!
이전에 없던 거대한 폭발이 낭인 시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대지가 솟구쳐 오르고 폭발에서 생겨난 공진을 향해 사방에서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휘휘휘휘.
먼지는 순식간에 걷혀 버렸다.
낭인 시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거대한 반구형의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선 소청의 어깨에는 덩그러니 팔만 남긴 잔마의 쇄겸이 박혀 있었다.
잔마의 모습은 형체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큭.”
외마디 신음과 함께 소청이 무릎을 꿇는 모습에.
“다, 단장!”
지켜보고만 있던 초사가 급히 달려와 소청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팔을 어깨에 둘러 부축한 초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소청이 일그러진 표정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이젠 제법 인정할 마음이 생긴 건가?”
“…….”
초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고 소청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비마대의 무인들이 모조리 날아와 소청 주위를 호위하듯이 감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섬뢰는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길…… 하필이면 저런 인물이 정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