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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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52화
51화. 거인을 만나다
“그래, 이번에도 나갔다 오셨나 봅니다.”
말투는 공대였지만 어조는 빈정거림이었다.
“예. 한 두어 달 나가 있다 왔습니다.”
혁련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혁련휘와 함께 뇌령도문의 본각으로 안내된 소청은 아무 말 없이 섬뢰를 살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태사의에 앉은 뇌령도문의 문주.
섬뢰.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이었고, 젊은 무인들에게 견주어도 모자람 없는 단단함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주의 신분이 좋긴 한가 봅니다. 련주님을 대신해 처리할 일이 많을 것인데 한가로이 외유를 나가실 정도면. 그래, 이번에는 어디를 그리 다녀오셨소?”
“…….”
질책이 다분하게 섞여 있는 말에 혁련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째 말이 없소?”
“제가 일일이 보고해야 합니까?”
“보고? 그럴 필요야 있겠소? 어차피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니셨을 터인데.”
“…….”
“막야라는 자가 안휘에서 파천도를 사용했다는 소문은 들은 게요?”
비꼬아 대는 그의 말투에 혁련휘의 어조가 살짝 높아졌다.
“그걸 제가 어찌 압니까?”
“모른다? 허,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소.”
“말씀이 심하십니다.”
“심하다? 허, 소련주께서는 사태 파악이 안 되시는가 봅니다. 본문에 남궁가의 사람들과 정천맹의 협상단이 구금되어 있소.”
“압니다.”
“하면 어찌 그리되었는지도 아는 게요?”
“그야 문주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직접 구금하셨으니까.”
“나는 내가 그리한 이유를 아느냐 묻는 게요.”
“모른다 말씀드렸고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거, 무책임도 하시오. 다른 무공도 아니고 파천도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된 자는 련주님을 제외하고는 소련주가 유일하오.”
“그래서요?”
“그 막야라는 자가 나타난 시기와 소련주의 외유 시기가 일치하는 건 어찌 생각하시오?”
섬뢰의 어조가 차가워졌고 혁련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지금 심문하시는 겁니까?”
“훈계하는 거요.”
“…….”
“남궁천세가 정천맹주가 되었소. 지금 시기에 남궁가와 문제가 생기면 저들에게 빌미를 준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요?”
“문주, 나는 분명 막얀지 간장인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구금해 상황을 악화시킨 건 문주입니다.”
혁련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리며 일어났다.
“악화시켰다? 정말 웃기는 소리를 다 들어 보겠구려. 뒷수습이오.”
“뒷수습이라고요?”
“당연한 말 아니오! 그들의 항의를 받아들이면 소련주가 범인임을 꼼짝없이 인정하는 것임을 모르시오?”
“또 저를 위해 그러셨다 말씀하시는군요. 그럼 협상단은 왜 구금하셨습니까? 그것도 뒷수습입니까?”
“사건의 완전한 조사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둘의 말싸움을 보며 소청은 피식 웃었다.
소청이 본 섬뢰는 무척이나 꼬장꼬장하고 외골수적이었다.
유연하지는 못해도 올곧은 인물.
그런 무인일수록 제 생각에 빠지는 경우는 있어도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자신이 완전히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듣는다’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혁련휘와 섬뢰는 비슷한 성격이었고 그렇기에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섬뢰, 이자는 세작일 가능성이 적다. 그가 남궁가의 사람들을 구금했던 이유는 오직 혁련휘와 사도련을 위한 행동으로 보여.’
소청의 시선이 본 전각에 모인 뇌령도문의 수뇌들을 훑었다.
‘하면, 누구인가? 나라면 절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아. 이용한 자가 있을 것이다. 섬뢰 본인이 아니라면 그의 휘하의 누군가는 마천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누구냐. 네놈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냐.’
소청은 뇌령도문으로 오기 전 초사와 비마대에게 외부 감시를 지시했다.
밖에서 접근하는 자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초사와 비마대의 은신 능력이 모자랐다.
사도삼위인 섬뢰와 뇌령도문에 있는 고수들의 이목을 모조리 피할 수는 없을 테니…….
날카롭게 주위를 바라보던 소청의 시선이 섬뢰와 마주쳤다.
뇌령도문을 찾아온 이후 혁련휘에게만 집중되었던 섬뢰의 시선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막야’, 아니 소청을 향했다.
“그댄 누군가?”
혁련휘로 인해 감정이 상해 있으니 말투가 고울 리 없었다.
“제 친구입니다.”
소청을 대신해 혁련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누가 소련주에게 물었소? 그리고 친구? 하! 잘도 그런 거짓말을…….”
“왜요? 저는 친구 하나 사귀면 안 됩니까?”
“누가 안 된다 했소? 말이 안 되니 그렇지.”
“뭐가요? 뭐가 말이 안 됩니까!”
“외골수에 자기중심적이고 안하무인에, 더 말해 줄까요?”
“…….”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갈아 댄 혁련휘가 섬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둘 사이의 해묵은 골이 있는 것인지 애초에 찾아온 목적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흐르자 소청이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저는…….”
그때 본전각의 문이 활짝 열렸다.
“소련주!”
혈수 사마현이 뛰어들어 왔고 그 뒤로 곡반정을 비롯한 련의 장로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뜬금없는 그들의 방문에 섬뢰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갑자기 어째서 찾아온단 말인가?
남궁가와 정천맹의 협상단에 대한 문제는 이미 련주의 명으로 자신에게 일임되었다.
설마하니 소련주를 맞이하기 위해 단체로 찾아왔을 리도 없었다.
“자네들이 어찌?”
“문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섬뢰의 물음에 짧게 대답한 사마현이 곧장 혁련휘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련주님, 적당한 시기에 잘 오셨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던지.”
“왜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안 그래도 백건이 찾아왔더군요.”
“예. 제가 보냈습니다. 실은…….”
사마현이 용무를 꺼내 놓으려는데 밖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충!”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위사들의 외침.
그리고 혈랑들에 의해 양쪽으로 활짝 열리는 본전각의 문.
붉은 피풍의를 휘날리며 양쪽으로 늘어선 혈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멀리서 한 중년인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닿은 모든 곳의 인물들이 머리를 처박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저 걷고 있을 뿐인데도 그 걸음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듯했다.
섬뢰는 급히 문 앞으로 달려 나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고 장로들은 시커멓게 변한 얼굴로 엎드렸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모두가 공손하게 맞이하는 그곳에서 가만히 서도록 허락된 것은 혁련휘뿐이었다.
그리고.
“너는 뭐냐?”
위도혁의 뒤를 따르던 만중이 바람처럼 날아와 소청의 목에 만도를 대었다.
소청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느낌에 눈살을 찌푸린 소청이 만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치워.”
“…….”
순간 만중은 시선을 피할 뻔했다.
속눈썹이 아래로 깔리도록 낮게 뜬 눈꺼풀 사이로 차가운 한기가 그의 눈동자를 관통했다.
‘위험인물이다.’
본능이 그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베어야 한다.’
만중은 감히 자신의 주인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든 것도 모자라 살기까지 뿌리는 상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턱.
누군가 만중의 만도 날을 잡았다. 혁련휘였다.
“제 친구입니다.”
“…….”
그 한마디가 주는 반향은 본전각 내에 모인 모두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친구? 친구라고?”
위도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오자 만중이 만도를 거두고 황급히 물러났다.
“허, 네게 친구가 생겼어?”
위도혁이 혁련휘와 소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천 진가의 진소청입니다.”
소청이 제 정체를 밝히며 포권을 했다.
‘친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표정이 놀람이라면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의 표정은 경악이었다.
진소청.
그의 이름이 주는 파급 효과.
당금 무림에 신성처럼 등장한 그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롭게 나타난 고수는 모든 정보 세력들의 표적이었고 사도련에게는 잠재된 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식 웃는 위도혁의 뒤로 혈랑들에게 제압당한 채 하나씩 꿇리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을 보는 순간 소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쥐새끼가 숨어 있더니 네놈의 종자였더냐?”
위도혁의 한마디에 소청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위도혁이 나타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초사와 비마대를 뇌령도문 근처에 접근도 못 하게 했을 것이다.
‘젠장, 무황이 직접 움직일 줄은 몰랐군.’
소청이 위도혁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바라보는 위도혁의 몸에서는 처음으로 느껴 보는 위압감이 있었다.
검존이 주는 느낌, 폭마가 주었던 느낌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소청은 자신의 피풍의를 매만졌다.
여차하면 초사와 비마대의 목숨을 구해야 했다.
적어도 도망칠 시간은 벌어 주어야 했다.
아무리 무황이라 해도 ‘일보월하’의 경공이라면 한순간의 틈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감히 덤벼 볼 생각조차 못 하게 하는 거인의 존재감은 소청을 고민하게 했다.
“스승님! 저들은…….”
마천에 대해 들었고 잡힌 이들이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무인들임을 아는 혁련휘가 변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가볍게 들어 올린 위도혁의 손길에 막혀 버렸다.
아무리 후계라 할지라도 스승의, 사도련의 절대자가 가진 권위에 도전할 수는 없었다.
“너는 물러나거라. 네가 해야 할 대답이 아니다.”
제자를 대하는 위도혁의 말투가 부드럽다는 것에 소청은 안도감이 들었다.
비벼 볼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무황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불필요한 마찰이 생길 듯하여 수하들에게 몸을 숨기라 한 것인데…….”
“그래? 글쎄. 내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다만.”
위도혁의 반개한 눈이 소청을 짓눌렀다.
마치 몸이 관통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휘아의 친구라 하니. 내 한 번은 넘어가 주마. 하나 두 번째에도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눈초리와 함께.
쿠웅!
짓눌렸다.
무지막지한 기운의 압력이 짓눌러와 소청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으윽!’
이 자리에서 위도혁을 만난 것은 분명 기회였다.
그에게 마천에 대해 말하고 도움을 청한다면 사도련도 마천을 대비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의 한마디면 사도련 전체가 들썩일 테니까.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혹여라도 이 자리에 잔마의 수족이 숨어 있다면 그들은 필히 모습을 감추리라.
소청은 단전에 태극의 기운을 만들어 하단으로 보냈다.
뚜두둑.
뼈마디가 부러질 듯한 비명을 질러대었다.
일어났다.
바닥에 닿았던 무릎이 펴지고 소청은 온 힘을 다해 몸을 폈다.
다리가 떨려 왔다.
태극을 이룬 기운이었지만 위도혁의 힘에 겨우 다리를 펴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승부였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했다.
단전의 기운에 계속해서 여덟 혈의 기운을 밀어 넣었다.
삼태극을 이루지 못했으니 세 개의 기운을 운용하지는 못했고 그저 빠져나가는 기운을 채워 버텨야만 했다.
-독대가 필요합니다.
“…….”
소청의 전음에 위도혁의 눈이 씰룩거렸다.
일어나는 소청의 모습에 오성의 기운을 담았다.
그런데 버텨 내는 것도 모자라 전음이라니?
위도혁은 당돌하기 짝이 없는 어린 무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신의 위압감을 이겨 내고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
혁련휘조차 못하는 일이었다.
언뜻 기억이 나는 인물이 있었다.
무황이라 불린 이후 처음으로 인정했던 상대는 스스로를 마(魔)의 주인이라 했다.
‘그놈 이후로 이런 놈은 처음이군. 제법이야.’
위도혁은 소청에게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휘아, 재미있는 친구를 사귀었구나.”
기운을 풀어 버린 위도혁이 혁련휘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예? 예. 스승님. 정말 묘한 친구지요?”
혁련휘가 제 스승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섬뢰.”
“하명하십시오!”
위도혁의 나지막한 부름에 섬뢰가 공경을 다해 대답했다.
“좋은 술을 준비해라.”
“존명!”
섬뢰의 대답에 위도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초사와 비마대는 풀려났고 그 누구도 반문하지 않았다.
사도련의 그 누구도 무황 위도혁의 말에 토를 달수는 없었다.
설사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 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만 했다.
그는 무황 위도혁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