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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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48화
47화. 사파 같지 않은 혁련휘
혁련휘의 개입에 우정안은 얼어붙었고 우량은 충격에 정신을 잃어버렸다.
검기가 둘러진 검을 맨손으로 부러뜨리는 광경은 결단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협, 감사…….”
우정안은 자신을 도운 것이리라 생각했다.
자신은 서 있고 우량은 꼴사납게 처박혀서 정신을 잃었으니까.
그런데.
“이것들이!”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낸 그가 아이 둘을 끌어안은 어미를 바라보았다.
당과를 나누어 먹고 있던 형제들이었다.
어른들과 달리 싸움의 간격에서 미처 도망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 쌓여 있던 쌀섬에 예리한 상처가 생겨 낱알들이 줄줄 새고 있었다.
혁련휘가 제때 나서지 않았다면 뱃전의 상처들처럼 아이들의 몸이 온전치 못했으리라.
“감히.”
가볍기만 하던 혁련휘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저 기운만인데도 우정안은 숨 막힐 듯한 공포에 짓눌렸다.
“어이, 종남. 적당히 하고 꺼져라.”
“이, 이……. 감히……. 종남을 어찌 보고…….”
“…….”
혁련휘가 아이들과 여인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우정안에게 돌렸다.
“종남을 어찌 보냐고?”
그의 손길에 피풍의가 젖혀지자 허리께에 걸린 완만한 만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순간 우정안은 가슴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장강은 사파의 영역이야. 너흰 이곳 장강에서 수로채와 부딪쳤어. 모조리 죽여 줄까?”
하얗게 송곳니를 드러낸 그의 얼굴은 흉신악살보다 잔혹해 보였다.
길이 두 자, 악귀가 새겨진 붉은 빛의 가죽 도갑…… 참작(慘斫).
‘잔혹한 날’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것은 시대의 주인이라 불린 사도련주 위도혁의 독문무기이자 그의 후계자에게 내려진 신물이었다.
“혁련……휘…….”
우정안은 더 이상 서 있지 못했다.
명문의 이름으로 비빌 상대가 아니었다.
종남파의 무인들은 혁련휘가 길을 열어 주었을 때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이, 이 일은 후에 반드시 갚겠소.”
‘두고 보자, 이놈!’을 유려하게 표현한 그들이 우정안을 부축해 혁련휘를 노려보다 물러났다.
그리고 배에 올랐던 수적들이 모조리 무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수룡채가 소련주님을 뵙습니다!”
크게 울려 퍼지는 함성에 놀란 뱃전의 사람들마저 고개를 조아렸다.
수적들을 깔아 보는 그에게서 절대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위엄이 가득히 흘러나왔다.
가벼운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본신의 힘을 보이니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본 혁련휘는 두 아이의 어미에게 다가갔다.
“미안합니다. 여인과 아이들은 건들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무인들이 호기가 넘쳐서 잠시 잊은 모양입니다.”
“…….”
여인은 혁련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은공.”
“당치도 않습니다. 은공이라니요.저 역시 사파의 인물입니다. 그저 운이 좋았다 여기십시오.”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그는 품에서 전낭을 꺼내 내밀었다.
“으, 은공?”
“괜찮아. 동생과 당과 사 먹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한 혁련휘가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모습에 소청이 피식 웃었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공존하는 느낌이 강했지만 지금의 그는 누구보다 정의로웠다.
나쁘지 않은 정파와 나쁜 수적보다는…….
작은 소란이 지나가고 수룡채의 수적들이 눈썹이 휘날리도록 돌아갔지만 뱃전의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모두가 혁련휘의 눈치만 바라보느라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응? 어디 가려고?”
소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혁련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민폐야.”
“응?”
“지금 다들 네 눈치 보느라 말도 한마디 못 하고 있잖아.”
“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혁련휘가 탄성을 지으며 웃었다.
“역시 내가 잘 보았어. 자네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야.”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짓는 그를 향해 소청이 피식 웃었다.
“가까이 오지 말게. 나도 여자가 더 좋거든.”
“뭐? 크핫핫핫.”
“가지.”
“어딜? 아직 연안에 도착하려면 한참 가야 하는데?”
“그런 걸 따질 정도로 수준이 낮아 보이지는 않는데? 마침 술도 떨어졌고.”
빈 술병을 흔드는 소청의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이거, 내가 말로 밀리는 상대가 있을 줄이야. 좋아, 내 단강구에 좋은 술집을 아니까 그쪽으로 안내하지.”
혁련휘가 피식 웃으며 뱃전을 박찼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수면을 밟고 내달렸고 소청이 그 뒤를 따랐다.
‘호오? 제법.’
혁련휘는 자신의 옆을 달리는 소청을 보며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속도도 속도였지만 자신과 달리 발끝에 물조차 묻지 않았다.
‘이거 정말 피가 끓어오르게 하는 친구구먼.’
혁련휘는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공을 더욱 올렸다.
무공이 아닌 경공의 승부.
그마저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뒤처지기는커녕 다가온 소청이 혁련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비웃어?’
퍼엉!
살짝 앞서는가 싶었는데 물보라가 ‘파학’ 하고 튀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십 장이나 되는 거리를 뛰어넘었다.
“어?”
마치 갑자기 공간을 이동해 버린 것처럼.
졸지에 물을 뒤집어쓴 혁련휘가 멍해진 표정으로 멈춰 버렸다.
꼬로록.
혁련휘의 몸이 물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 이거 봐라.’
짜증이 왈칵 몰려온 그는 아예 천근추로 순식간에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꾸우우우.
밑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허벅지가 터질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질 수 없지!’
파아앙!
온 힘을 모아 용천혈로 기운을 뿌린 혁련휘의 신형이 쏘아져 나갔다.
강물을 반으로 가르며 달리는 혁련휘는 순식간에 소청의 뒤를 따라잡았다.
“으핫핫핫…….”
바로 뒤까지 따라붙어 연안에 닿는 순간 소청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리고.
또 비웃었다.
“어?”
파앙!
마치 약 올리듯이 소청은 혁련휘가 따라오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연안에 발을 디딘 혁련휘는 더 이상 쫓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허, 내 참, 저걸, 허…….”
짙은 패배감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데 갑자기 소청이 다시 돌아왔다.
두두두두.
허연 먼지를 일으키는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커다래졌다.
“근데, 술집이 어디야?”
짜증스러운 얼굴로 묻는 그의 표정.
“뭐? 크하하핫!”
혁련휘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근래에 이렇게 웃은 적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졌다. 졌어. 정말이지. 자네는.”
혁련휘가 소청의 어깨를 두들겼다.
소청을 데려간 곳은 단강구의 연안에 닿아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몇 채 되지 않는 초옥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햇살이 마을 전체를 비추어 찾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내가 자란 마을이야.”
혁련휘는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것처럼 꿈꾸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곳에 살았지. 너무 어려서 기억도 안 나지만 가끔씩 들르거든.”
사도련이라는 거목의 후계자의 어린 시절은 생각과 달랐다.
그저 풍경 이외에는 볼 것 없는 마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했다.
소청은 그가 적어도 유서 깊은 가문의 아들쯤은 되는 줄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전생의 막야처럼 비루하게 살아온 자들은 전혀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야, 정말 옛날 생각나네. 어떤가? 좋지?”
“이런 곳에서 살았는데 사도련의 후계라니 자네도 대단하군. 치열했겠어.”
“응? 무슨 소리야? 누가 치열해?”
“뭐?”
“이 몸을 잘못 알고 있구먼그래. 이래 봬도 사도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라 인정받았다고. 하나를 가르치면 한 백 가지 정도 깨닫는 천재라고나 할까?”
“…….”
역시…….
말하는 것만 빼면 참 좋은 놈 같은데.
“자, 가세. 웅산 할아범이 민물 회를 기가 막히게 뜨거든. 그리고 안덕 할매가 담근 술이 끝내준단 말이야.”
쉬지 않는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을 길을 돌아 도착한 곳에는 오래된 초옥이 있었다.
막 그들이 사립문 안으로 들어설 때 골목 어귀에서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나뭇짐이 가득한 지게를 지고 다가왔다.
“어? 할아범! 거 허리도 안 좋다면서.”
혁련휘가 얼른 다가가 지게를 받아 들려 하자 노인이 버럭 화를 내었다.
“아서라. 이놈아! 내 백 살까지는 끄떡도 없다.”
“거참, 고집부리기는.”
혁련휘가 지게를 빼앗듯이 받아 들었다.
“자, 인사해. 웅산 할아범이야. 이쪽은 내 친구 진소청.”
“아이구, 이런 귀한 분이 오셨구먼. 저눔이 친구를 데려온 것은 처음인데.”
웅산 할아범이 다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자, 자, 들어가세. 할멈! 할멈!”
노인이 사립문을 열고 호통을 치자 부엌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하나가 나왔다.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여?”
“거 시끄럽고! 이눔이 친구를 데려왔다니까.”
“뭐여? 허, 세상천지에 별일이 다 있구먼.”
노파가 짐짓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하는 소청에게 달려왔다.
“어서 온나. 저놈과는 다르게 훤칠하게 잘생겼구만.”
“아니, 다르다니 뭐가 달라? 내가 훨 잘생겼지.”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니눔 얼굴이 얼굴이냐? 자, 얼른 와서 이리 앉거라. 영감! 가서 퍼뜩 고기 한 마리 잡아 오소. 내 모처럼 솜씨 좀 발휘해 볼라니까.”
“어이쿠, 내 정신 보게. 그래 기다려. 내 퍼뜩 다녀올 테니까.”
마당 한편에 평상을 내어 준 웅산할아범은 신이 난 듯이 마을 길을 내려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저녁상이 준비되었다.
알싸한 술이 내어져 왔고 촌락의 정취를 닮은 음식들이 가득했다.
“어여 먹어. 배고플라.”
사발처럼 큰 그릇에 넘치도록 밥을 담아 건넨 노파는 주름이 더 깊이 지어지도록 웃었다.
소청은 모처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밤이 늦은 시간, 두 노인은 낮 동안의 피로에 금세 잠이 들었다.
소청과 혁련휘는 평상에 앉아 남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시간을 보냈다.
술병이 완전히 비워졌을 때 소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어디 가나? 소피 보러?”
“이제 시작해야지. 밥도 맛있게 얻어먹었는데.”
“뭘?”
“뭐라니? 이걸 기대한 거 아냐?”
소청이 웃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
그 모습에 혁련휘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게 지어졌다.
“크핫핫핫! 이 친구! 정말 마음에 들어! 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너무 티 나던데?”
“그래? 그랬구먼. 그랬어. 내 언제 말을 꺼내 볼까 한참을 고민했는데.”
“자, 가지.”
“어딜?”
“여기서 할 순 없잖아? 최선을 다해 보자면 초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데?”
“아!”
혁련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곳에 가세. 밤이 새도록 한번 놀아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