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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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40화
39화. 소강의 관례
삘리리.
악공의 연주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조용하게 보낼 것이라 생각하며 따로 초청장을 발부하지 않았음에도 소문을 듣고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간양의 관도에 수레와 마차가 줄을 지었고 대연무장이 넘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무관의 대연무장도 모자라 표국에 소진각까지 연회석이 마련되었고, 곳곳에서 아낙들이 모자란 음식을 채우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전을 부치고 고기를 구웠다.
술은 벌써 바닥나 버려 술도가에서 몇 차례나 수레가 들락날락했다.
하지만 정작 관례의 당사자인 소강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평소 진중하고 정갈한 그의 성격과는 달리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고 입은 잔뜩 튀어나와 있었다.
“약속도 안 지키는 형님 같으니…….”
그의 불만은 다름 아닌 소청이었다.
대회합 첫날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소청이 성년식 전에 돌아오겠다 해 놓고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더욱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연락할 수도 없었고 소식 한 장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여간 저럴 때 보면 꼭 애 같다니까.”
소혜가 소강의 팔짱을 끼고 잡아당겼다.
“공자, 이리 와서 술이나 한잔해요. 청성에서 왔다는 이 술 정말 맛이 끝내준다니까요?”
“예? 예…….”
술기운에 발그레하게 홍조가 오른 소혜의 모습에 소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부터 보타문과 은가에 전서구를 보낸 소혜는 대회합 이후부터 진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니, 주인공이 얼굴 좀 펴요. 이렇게 아리따운 여인을 앞에 두고 그런 표정은 실례라고요.”
소혜가 뾰로통한 얼굴로 소강의 잔에 술을 따랐다.
“맞네. 소혜 소저를 앞에 두고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암.”
“그쵸? 그쵸?”
승혜는 말없이 차만 마시고 있었고 벌써 친해진 목가를 비롯한 네 곳의 후기지수들은 소혜의 편을 들며 소강을 나무랐다.
“청이는 아직인가?”
“예. 형님.”
“쯧, 무심한 놈 같으니…….”
날짜가 되었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소청을 기다리던 진가신이 애꿎은 의자의 팔걸이만 두들겼다.
“이제 시작하세요. 더 기다리면 손님들께 실례예요.”
섭약란의 말에 진가신이 어쩔 수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중앙대에 서자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금세 조용해졌다.
“오늘 이렇게 진가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제 둘째 놈의 관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진가신이 엄숙하게 관례의 시작을 알리는데 갑자기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가주님!”
정문을 지키던 무인이었다.
“웬 소란인가?”
“다름이 아니라 운남의 대족장께오셔…….”
“뭐?”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고강족의 예복을 차려입은 수십의 무인들이 줄지어 들어와 갈라지자 모자겸이 기세등등하게 걸어 들어왔다.
“아니,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진가신 이하 진가의 식솔들이 일제히 당황한 얼굴로 일어났다.
“운남 대족장 모자겸이 섭섭한 마음으로 진 가주님을 뵙습니다.”
“아, 아니. 대족장.”
특히나 당황한 것은 진가신이었다.
번거로울까 하여 연통도 보내지 않은 참이었다.
“아니, 그동안 쌓은 정이 얼만데 저는 부르지도 않으셨단 말입니까!”
행사를 망쳐 놓고 호통을 치는 통에 진가신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고, 중앙대의 명사들이 웃으며 모자겸의 말에 동조했다.
“저런, 대족장께서 많이 섭섭하셨겠습니다.”
“암요. 맞습니다. 큰 실수를 하셨어요.”
모자겸과 인사를 나누는 멸절사태뿐 아니라 목하동까지 동조하고 나서자 진가신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잔뜩 떠올랐다.
“대족장, 그게 아니라…….”
“됐습니다. 내 오늘 섭섭함에 진탕 술을 마실 테니 술도가에 있는 술을 모두 가져오라 하십시오.”
“…….”
넉살 좋은 그의 말에 진가신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때.
“어? 대족장도 오셨네?”
익숙한 목소리에 모든 이의 고개가 입구로 돌아갔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지만 긴 흑발에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으니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여인과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름 아닌 소청이었다.
“혀, 형님!”
진가신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고 소강이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갔다.
따악!
“아극!”
“관례의 주인공이라는 놈이 경박하게.”
소청은 자신에게 안기려 하는 소강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중앙대로 다가가 인사를 했다.
“늦었습니다. 멀리서 오는 길이라…….”
소청을 마지막으로 진가의 가솔들이 모두 모이자 관례 의식이 시작되었다.
진가신의 옆으로 오른 소청을 비롯해 축하 사절로 온 운남의 대족장, 청성과 아미의 장문인, 목가를 비롯한 네 곳의 가주까지 중앙대에 오른 이들 중 허투루 대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는 엄숙했고 좌중은 고요했다.
어느 맑은 날 진가의 초대 가주가 사천에 터를 잡았던 날을 택일해 시기(時期)를 잡았고 아미파의 멸절사태와 사천 무림의 명사들을 계빈(戒賓)으로 모셨다.
후원의 사당에 모신 조상들의 위패에 절을 올린 소강은 진가신, 소청과 함께의 월문복(月紋服)으로 갈아입었다.
“앞으로 너는 우리 진가의 정식 일원이 되었다. 더없이 정진하여 진가의 이름을 드높이도록 하라.”
“예. 아버님.”
축사가 끝나자 청성에서 선물한 초루주(初淚酒)가 내려졌다.
“이제 술을 마시고 앞으로 나서서 모두에게 현우존장(見于尊長)하라.”
현우존장은 어른이 된 자가 웃어른에게 성년이 된 포부를 고하는 것을 말했다.
중앙대를 향해 포권을 한 소강이 제 형과 눈을 마주치고는 뒤로 돌아 큰 소리로 외쳤다.
“진가의 소강, 사천의 어른들을 모시고 고합니다. 위로 부모를 효로써 섬기고 우애로 형을 섬기며 약자를 살피고 믿음으로 대하며 위해한 자에게 물러섬 없이 진가의 무인으로 의와 협에 따라 살 것을 맹세합니다.”
“와아아아!”
소강의 말에 좌중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소강의 말이 끝나자 진가신이 손을 들어 좌중을 안정시키고 한마디를 더 이었다.
“실은 한 가지 더 발표할 것이 있습니다.”
“…….”
“본가의 자제들이 모두 성년에 오른바 금일 모든 분들을 모시고 소가주를 임명하고자 합니다.”
그러자 모두가 소청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가신의 발표는 너무도 엉뚱했다.
“오늘부로 성년이 된 소강을 진가의 소가주로 임명합니다.”
“와아……. 어?”
“뭐?”
함성이 일어나다가 갑자기 뚝 하고 끊어졌고 소강마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축하한다. 소강.”
“…….”
어깨를 툭 치며 웃는 소청의 모습에 소강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가주 임명을 이렇게 간단하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형이 아니라 자신이라니?
소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비와 어미, 숙부인 진가신을 보니 이미 서로 이야기가 끝난 듯한 표정이었다.
“와아아아아!”
“진소강 소가주 만세! 진가 만세!”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모두가 기뻐하며 축하를 이어 주었고 소강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울상이 되었다.
관례와 더불어 소가주 임명식까지 끝나고 연회가 이어졌다.
모두가 흥겹게 어우러졌지만 따로 후기지수들이 모인 자리에 소강만 표정이 밝지 않았다.
“에이, 그만 화 풀어.”
소청의 말에도 소강은 볼을 통통하게 불린 채로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니까?”
“아니 그게 지금 말이 됩니까! 두 분이서 결정하고……. 이게 통보지. 통보!”
“이 자식, 네 의견을 물었으면 듣지 않았을 거잖아.”
“당연한 것을요!”
“거봐. 그러니까 이렇게 발표했지.”
“…….”
소강과 소청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그들을 보며 웃던 소혜가 왠지 어둠이 서린 듯한 표정의 승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는 또 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웬 천상의 선녀 같은 면사 여인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소청과 함께 온 여인.
흑비 곽추.
절강쌍미라 불리며 중원에서 내로라하던 소혜와 승혜의 미모는 그녀에게 비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 같았다.
더욱이 꾸미지도 않고 승복을 입은 승혜는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소혜는 승혜가 어찌하여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아, 이러니 문제라니까. 애초에 연심을 표현했어야지! 나처럼!’
소혜가 한달음에 달려가 소청의 팔을 잡고 물었다.
“대공자, 그런데 이 여인은 누구세요?”
“어?”
소강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있던 소청이 슬쩍 돌아보았다.
“곽추.”
“예.”
그녀가 다가오자 마치 해가 떠오른 듯 분위기가 밝아졌고 사내들이 몽롱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본 승혜의 얼굴에는 더욱 서늘한 어둠이 깔렸다.
“이분은…….”
어떻게 소개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소청이 우물쭈물하자 흑비가 대신 대답했다.
“청초각 소속입니다. 진 공자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서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소생은 목가의…….”
“저는 금가의…….”
생긋이 웃는 모습에 모두가 앞다투어 자기소개를 했고 연회의 중심이 그녀에게로 옮겨 갔다.
“참, 처음 본 사람인데…….”
떠밀려 버린 소청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승혜에게 말했다.
“소저는 인사를 안 하세요?”
“제가 왜요? 굳이 뭐 하러…….”
“…….”
승혜의 목소리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자 소청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동정호에서도 티를 내었건만, 어째서 그녀가 그리 쌀쌀맞은지 고지식한 소강도 알고 활달한 소혜도 아는데 소청만 알지 못했다.
* * *
콰앙!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석축이 무너져 내렸다.
“키히힛. 어떠냐?”
“좋군.”
빙글거리며 웃는 어린 소년의 말에 당태위는 자신의 몸에 자리한 기운을 만끽했다.
만독해(滿毒害).
독공의 정점에 있는 만독해는 몸 안에 흐르는 피마저 독으로 바꾸어 놓는 당가의 비전 술법이었다.
‘극성에 이르면 오존의 경지에 이른다더니…….’
녹빛의 눈동자를 번들거리는 당태위의 몸에서 독기가 넘실거리며 피어올랐다.
소청에게 진 이후 만독해를 수련하기 시작한 당태위는 우연치 않게 구한 두 개의 독우로 인해 대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문턱은 너무도 높았다.
소청에 의해 아비인 당구독이 쓰러져 병석에 눕고 당가의 이름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폐관동에서 버텼다.
완전히 짓밟아 버릴 수 있도록 힘을 모으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그에게 찾아온 것은 절망뿐이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대성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때 어린아이의 모습에 흑요석 같은 눈을 한 마귀가 찾아왔다.
기이한 기운을 가진 그의 목소리는 당태위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복수심을 끌어내었고 갈망을 거대한 독기로 바꾸어 놓았다.
그가 읊조린 역천의 진언은 온몸의 기운을 들끓게 했고 지독한 고통과 함께 만독해의 정수를 깨닫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 대가로 마기에 인성을 잠식당했음을…….
폐관동을 나온 당태위는 자신의 아비를 찾아갔다.
“쿨럭. 쿨럭.”
“…….”
시비의 도움으로 똥오줌을 갈아 내는 모습은 눈으로 보기 처참한 광경이었다.
집안 주인의 치부이기에 폐관을 축하하는 당가의 수뇌들을 밖에 두고 당태위 홀로 아비와 독대를 했다.
배설물을 갈아 내는 시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아들을 바라보는 눈은 퀭했고 온몸은 고목처럼 말라 있었다.
“아버님.”
당태위는 당구독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는 더 이상 무인이라 볼 수 없었다.
호통을 치며 자신을 다그치던 강건함은 없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당태위는 무심하게 아비의 얼굴을 가슴에 안았다.
너무도 가벼웠다.
팔에 힘이 들어가자 당구독이 발버둥치기 시작했고 앙상하게 말라 버린 손으로 자신을 감싼 아들의 팔뚝을 미친 듯이 긁어 살갗을 찢어 놓았다.
그리고 축 늘어져 잠잠해졌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폐인이 되어 버린 아비는 그저 쓸모없는 쭉정이에 불과했다.
“저의 당가에 폐인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숨이 멎어 버린 아비를 내려놓은 당태위는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 보았다.
그리고 겁에 질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시비의 목을 꺾어 버렸다.
문밖으로 나오자 무너진 삼양전 앞으로 당가의 수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
“저들은 내 아버지의 기일이 된 오늘, 잔치를 즐긴다고 하는군. 빌어먹을 놈들이 내 아비의 죽음을 축하라도 하듯이 말이야.”
담담한 그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놀람과 분노가 뒤섞여 떠올랐다.
“준비하라. 진가에 혈채를 받으러 가야겠다.”
당가의 수뇌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투 준비를 알리는 북소리가 당가타를 뒤흔들었고 전령들이 방계 곳곳으로 내달렸다.
홀로 오롯하게 선 당태위는 문득 삼양전 앞에 세워진 비석을 바라보았다.
당구독이 직접 쓴 글씨.
@[각골통한(刻骨痛恨)]
진가에게 당한 원한을 뼈에 새겨 잊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키히힛.”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역천의 진언.
요상하기 짝이 없는 그의 웃음소리에 당태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가 어째서 자신을 돕는지는 알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까.
하지만 역천의 진언을 듣고 만독해를 대성한 뒤부터 가슴속에서 자꾸만 끓어오르는 살심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죽여라. 모조리 죽여…….
마음속의 목소리는 쉬지 않고 그를 충동질했다.
당태위의 두 눈은 어느새 흑요석을 닮은 칙칙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조리 죽일 것이다. 모조리 죽여서 내 아비 북망산 가시는 길 외롭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