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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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39화
38화. 마천 십이세(魔天十二勢)
울컥, 부글부글.
지면에서 솟아 오른 시뻘건 용암이 불길을 토해 내며 거품을 만들었고 누런 연기 속에서 유황 냄새가 피어올랐다.
작은 연못처럼 자리 잡은 용암의 주위로 열 명의 노인과 어린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눈알이 없는 자도 있었고 고목처럼 변해 버린 모습을 한 자도 있었다.
각양각색의 옷차림과 갖가지 무구를 든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숨 막힐 정도로 짙은 마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환마는 오지 않았는가?”
“정천에 들었으니 몸을 빼지 못할 것이네.”
고목같이 메말라 버린 노인의 말에 수십 가지 병기를 짊어진 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폭마가 죽었다는군.”
“…….”
죽음을 알리는 전언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표정에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폭멸마동 열(十)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아쉽군. 미숙하지만 쓸모 있는 녀석이었는데…….”
“큭큭, 쓸모라……. 그런 놈이 죽었다고 슬퍼해 줘야 하나? 애초에 그따위 놈이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누군가 폭마의 죽음을 비웃자 처음으로 고목 노인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검마(劍魔) 초월.
십이존자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 온 자였다.
“검마, 본 천과 마종을 위해 희생한 자다. 비웃음은 삼가라.”
고목 노인의 몸에서 짙은 살기와 함께 마기가 뻗어지자 검마라 불린 노인이 코웃음을 치며 악귀가 새겨진 검병에 손을 가져갔다.
“파군. 감히 나를 질책하는 것인가?”
“…….”
고목 노인의 퀭한 눈에 불길이 치솟았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마천 십이세.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어져 온 마천의 주축이었다.
마천이 가진 힘은 십만에 달하는 마도인이 아니라 모든 힘을 나누어가진 열두 명의 절대자들인 마천 십이존자(十二尊者),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십이세를 이끄는 절대자들은 모두가 각기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고 우열을 논할 수 없었다.
그저 마천의 절대자인 마종이 그 구분을 지어 놓았을 뿐이었다.
폭마는 그런 십이세의 주인들과 달리 폭멸마동을 개발한 공로로 존자의 칭호를 받았고 십삼세로 겨우 인정받은 세력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원래의 마존들은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항상 마천 십이세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하라, 초월. 마종께서 중임을 맡기신 파군이시다.”
“쳇!”
옆에 있던 덩치 큰 괴인의 말에 초월이 신경질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덩치 큰 사내의 이름은 권마(拳魔) 우도였다.
“폭마를 죽인 이는 누굽니까?”
굵직한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지만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밝혀지지 않았다. 잔마(殘魔)의 수족들이 그곳을 찾았을 때는 폐허뿐이었다. 단, 폭마가 죽기 전 막야라는 인물이 남궁가와 마찰을 빚었다고 하더군. 나는 그가 범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막야라…….”
그들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인물이었다.
“미완성이기는 해도 폭멸마동이 폭발했다. 잔마의 말에 따르면 한 기는 완성에 가까운 폭발력을 보였고, 또 한 기는 반도 못 미치는 위력의 상흔을 남겼다더군.”
“폭멸마동이라고?”
파군의 말에 여태껏 표정의 변화가 없던 열한 명의 절대자들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폭멸마동.
고독(蠱毒)이라는 것이 있다.
한 항아리에 수만 가지 독충과 독물을 넣어 서로가 잡아먹게 만든 후 최후에 남게 되는 독물에게서 추출한 독을 말함이다.
인간 역시 이와 비슷했다.
생의 의지가 독기가 되어 몸에 스미면 그것은 어떠한 독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하는데, 가장 좋은 것이 이성과 본능의 경계에 서 있는 열 살 전후의 어린아이였다.
무릇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는 이성보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그 본성을 이용해 다시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고 생의 의지를 독기로 바꾸어 놓으면 아이의 본성에 ‘악’만이 남는다.
그렇게 남은 아이를 고독으로 씻고 씻어 독동(毒童)으로 만들고 체내에 용암의 정수가 담긴 화기를 스미게 만들면 그 어떤 폭뢰보다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것이 마천의 비전인 폭멸마동이었다.
한 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 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고 일천의 아이를 죽여야 하는 잔인함이 동반되어야 했다.
미완성이라고 해도 폭멸마동 한 기의 폭발력이라면 십이존자마저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했고 폭발과 함께 뿜어지는 독기는 화강석을 녹일 만큼 지독했다.
그런데 그중 둘이 폭발했고 모든 흔적이 지워져 있다면?
“폭마를 죽인 자가 살아 있다는 말인가?”
검마 초월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폭발을 겪고도 폭마를 죽였다면 그렇다고 봐야겠지. 또한 막야라는 자가 남궁가와의 마찰에서 위도혁의 파천도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폭제 역할을 하는 그가 죽었다면 폭멸마동이 폭발할 리는 없었다.
더욱이 위도혁이라니…….
다른 누구도 아닌 위도혁만은 십이존자들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였다.
“으음…….”
십이존자가 굳은 얼굴로 침음을 내뱉었다.
“마종께서 폐관에 드신 지 십 년. 모든 준비를 끝냈고 때가 무르익었다. 정천의 제갈휘문이 우리의 뒤를 쫓고 있고, 사도련의 위도혁까지 관련되었다면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
“일단 폭마의 세력은 모두 잔마의 예하로 흡수시킨다. 또한 환마를 제외한 모든 외부 활동을 금하고 꼬리를 자른다.”
파군의 명령에 검은 피부를 가진 아이가 일어나 말했다.
“키히힛. 하면 마종께서 직접 행하신 일을 방해한 진가의 꼬맹이는 어찌할 생각인가?”
눈깔마저 흑요석을 닮은 그는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으되 그들 중 가장 오랜 삶을 살아온 독마 북궁려강이었다.
독마는 화산검존 현우자가 심마에서 깨어난 것에 대해 물었다.
작금의 마천에게 있어 마종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비록 스스로 심마에 빠졌다고 하나 마종이 관련되어 있는 일이 틀어졌으니 마땅히 징벌해야 한다는 것이 십이존자 모두의 뜻이었다.
“음…… 글쎄.”
“대안이 없다면 내가 알아서 하지.”
“직접 나설 셈인가?”
“키히힛. 승낙을 받으려 한 말이 아니다.”
독마와 파군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종이 아니라면 누구도 나의 뜻을 막을 순 없다.”
“…….”
반박할 수 없었다.
마종의 뜻 아래 모였을 뿐 십이존자는 모두 개별적인 세력을 가진 존재였다.
마종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서로의 행동을 제어할 순 없었다.
“키히힛. 하나, 마종께서 폐관에 드신 지금 함부로 나서지는 않겠다.”
“하면 어찌하겠단 말인가?”
“키히힛, 굳이 내 손을 쓰지 않아도 진가를 벌할 놈을 찾았다.”
“찾았다고?”
“그래. 제 능력도 알지 못하고 분노에 사로잡혀 독기가 오른 놈이 있지.”
그의 말에 모두가 한 가문을 떠올렸다.
“혹시?”
“키히힛, 그래. 당가. 고작 만독해 따위를 대성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더군. 작은 도움만 준다면 꽤나 시끌벅적하게 해 줄 게야.”
“크흐흐. 좋은 생각이군.”
검마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십이존자에게로 번졌다.
“음, 좋다. 단, 아직은 우리의 행적이 드러나서는 안 될 터.”
“키히힛, 그 점은 걱정 말라. 작은 파문만 던져 주면 알아서 할 놈이니까.”
독마 북궁려강이 소름 끼치는 웃음과 함께 사라졌고 십이존자가 그 뒤를 따랐다.
“으음…… 진소청. 막야.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군. 하나 마종께서 출관하실 날이 멀지 않았다. 그 어떤 때보다 진한 핏빛 하늘이 중원을 뒤덮을 것이다.”
파군의 음산한 눈이 용암 연못을 응시했다.
* * *
“으음…….”
온몸에 고통이 느껴졌다.
분명 폭발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밝아졌을 때, 그는 한 여인의 등에 업혀 있었다.
흑비.
곽추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소청은 땀을 흘리며 무척이나 다급한 표정으로 달리는 그녀의 표정을 보다 눈을 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노쇠한 의원이 피를 닦아 내고 침을 꽂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기를 수차례.
온전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붕대로 감겨 있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 큰 불편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가뿐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청은 운무가 자욱한 산자락 아래를 눈 안에 깊이 담았다.
길게 뻗어진 계곡 좌우로 노인을 연상케 하듯이 허리가 굽은 노송과 참나무가 울창하게 덮여 있었다.
소청이 깨어난 곳은 이름 모를 계곡에 지어진 움막이었다.
“신안강 인근의 묵영단의 안가입니다. 맹에서도 알지 못하는 곳이지요.”
“…….”
신안강(新安江)은 천목산에서 사백 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멍하니 바위에 앉은 소청을 향해 다가온 흑비가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임무 중 회복을 위해 머무르는 곳입니다.”
야행복으로 몸을 감추고 있던 그때와는 달리 간편한 옥빛 무복을 입은 그녀는 양가의 규수처럼 단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매섭게 쏘아보던 눈빛은 보는 이의 가슴을 녹일 정도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제가 거대한 폭발음을 듣고 찾아 갔을 때는 천목산 일대에 퍼진 독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겨우 중화 작업을 끝내고 들어갔을 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군요.”
“으음…….”
“온몸에 화상 자국이 있었고 팔뼈가 모조리 부서져 있었습니다. 다행히 독에 당한 흔적은 없었고요. 선의당 소속의 의원이 놀라더군요. 몸 안의 기운이 스스로 치료하는 것 같다고.”
소청은 몰랐던 사실이지만 여덟 독맥에 담긴 짐조의 기운이 자생력을 보인 것이었다.
흑비는 조심스럽게 따른 차를 소청에게 건네었다.
“만독불침이었습니까?”
소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피독주라 생각했습니다만. 굉장하군요. 만독불침이라니…….”
그녀는 이미 짐작하고 있음에도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스스로를 마천 십삼세의 하나인 폭마 척세경이라고 했다.”
“폭마 척세경…….”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에 흑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독진 이외에도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고 하더니. 폭마라는 자가 그리 대단했습니까? 이리 당하고 놓칠 정도로?”
흑미의 말에 소청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죽었다. 그에게 당한 게 아니야.”
“하면?”
“폭멸마동.”
“예?”
“살아 있는 폭탄이야. 마천의 저주스러운 술법으로 만들어진…….”
소청이 나지막이 자신이 아는 폭멸마동에 대해서 설명하자 그녀가 그런 폭발에서 살아남은 소청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마천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어찌 그가 그러한 내용을 아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흑비는 따로 묻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신비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앞뒤 안 가리는 불세출의 기재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행적, 막야의 행적을 살핀 그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천하제일의 기재라는 제갈휘문조차 그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후우……. 남궁가는 어찌 되었지?”
소청의 말투는 어느새 완연히 하대로 변해 있었고 그를 대하는 흑비의 말투는 자연스럽게 존대였다.
“현재 그들은 막야를 뒤쫓고 있습니다. 군사께서 헛 정보를 흘렸기에 동일 인물임을 알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군.”
“듣기로는 남궁가의 공자 하나가 창천검수들과 사도련으로 갔다고 합니다.”
“어째서?”
“사용하신 파천도는 위도혁의 무공이니까요.”
“아!”
소청은 그녀의 말을 듣기 전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궁가에 마천에 포섭된 인물이 있다면 사도련을 의심할 테니 오히려 더 잘된 일이라 했습니다.”
“남의 것을 잘도 써먹는군.”
소청이 살짝 투덜거렸지만 흑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일단 군사께서 묵영단을 남궁가로 파견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남궁천세와 마찰을 일으킬 수도 있기에 은밀하게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옳은 말이었다.
남궁무한은 확실한 마천의 인물이었지만 남궁천세에 대한 것은 추측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토굴 역시 만약 그들이 그저 남궁가의 뇌옥 정도로 둘러댄다면 그 역시 증거로써의 가치가 없었다.
소청과 흑비가 직접 본 일이었지만 그들은 정천맹에 알려지지 않은 그림자였다.
오히려 남궁가를 몰래 침입했다는 이유로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차기 맹주에 오른 인물이니 확실한 물증을 잡아야 했다.
“남궁무한이 관련되어 있었다.”
“창천오검이?”
“남궁무한, 그 스스로 환영곡의 십삼 위라 칭한 것으로 보아 다른 인물로 대체된 것 같더군.”
“하지만 그곳에 그의 시체는 없었습니다.”
“폭마라는 자에 의해 폭사했다.”
“음, 안타깝군요.”
흑비의 대답에 소청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폭마.
그는 분명 마천 십삼세의 주인이라고 했다.
그와 같은 자가 열둘이나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름의 성과였다.
또한 남궁무한은 환영곡의 십삼 위라 했으니 같은 소속의 무인들이 무림에 활동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드러난 꼬리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분명 꼬리를 자르려 할 것이었다.
‘개새끼들 기다려라. 모조리 잡아 죽여 버릴 테니까.’
소청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것…….”
그녀가 보자기에 싼 물건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폭마에게서 뺏은 피풍의가 들어 있었다.
아직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했지만 분명 폭발에서 막아 주는 역할을 했었다.
‘패월과 피풍의를 바꾸었군.’
소청은 오랫동안 정들었던 패월을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군사께 가 보시겠습니까? 이번일로 나눌 말이 꽤 많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소청이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찌?”
“곧 동생의 관례가 있다.”
“예?”
“제갈휘문에게 전해. 세가로 돌아가 있겠다고. 조사에 대한 내용은 관례가 끝나고 직접 찾아가서 나누자고.”
소청은 피풍의를 둘렀다.
그 외에는 챙길 물건이 없었기에 바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음, 하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뭐?”
“그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묵영단의 수장. 모시겠습니다.”
“…….”
남궁가의 일을 통해 그녀는 소청을 향해 마음을 연 것 같았다.
“알아서 해라.”
소청은 그렇게 사천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흑비 곽추가 그의 곁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