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34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34화
33화. 살 수 있겠어?
“뭣이?”
남궁진린은 검을 양손으로 고쳐 잡으며 막야, 아니 막야로 변한 소청을 노려보았다.
온몸을 검은 피풍의로 가리고 방립까지 쓰고 있으니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막야? 사도련의 인물인가?”
“사도련? 뭐 그렇다고 해 두지.”
대충 둘러대듯이 말하자 목척승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도 인근을 지나던 사도련의 고수가 자신들의 위급함을 보고 도와주러 온 것 같았다.
“사도련이라면 놈들과 한통속이군.”
눈빛이 매서워졌지만 남궁진린은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다.
방금 자신이 사용한 검법은 남궁세가의 기식 중 하나인 삼보발검세였다.
중(重)과 섬(閃)의 묘리를 담은 검격이었기에 쉽게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검기마저 싣고 있었는데 상대는 너무도 쉽게 막아 내었고 되돌아온 반탄력에 손바닥이 얼얼했다.
“이봐, 내가 지금 싸우기가 싫은데 좀 돌아가 주면 안 되겠나? 이놈들에게 볼일이 좀 있는데.”
“닥쳐라! 어찌 정협을 걷는 무인이 악인을 보고 지나친단 말인가?”
“정협? 악인? 지랄하고 있네. 내가 보기엔 위선과 가식으로 쓰레기가 아닌 척하는 놈이나 대놓고 쓰레기인 놈이나 별 차이가 없거든?”
소청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비웃었다.
“뭐라? 차이가 없다? 네놈이 남궁가를 모욕하는 것인가?”
“모욕은 개뿔. 말 같잖은 소리 하고 있네. 가식 떨지 마. 이 말 저 말 다 가져다 붙여도 결국은 이권 다툼이잖아. 이것 봐 어린 친구.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저기 있는 사람들이 좋아서 너희들을 반기는 줄 알아? 저들에겐 너희들이나 이놈들이나 다 똑같아. 그냥 조금 덜 더러운 똥일 뿐이지. 가장 좋은 건 아무도 관여하지 않는 거야.”
“감히! 우리 남궁을 어찌 보고!”
“너네 남궁인 건 모르겠고 저 쓰레기 놈이 하는 말이 틀리진 않았잖아.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네놈들이 황산에서 사백 리나 떨어진 안경(安慶)까지 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 전부 세력을 넓히기 위함이 맞잖아?”
“이놈이! 뭣들 하느냐! 저놈의 입을 당장 막지 않고!”
남궁진린의 고성에 창천검수들이 일제히 검진을 이루며 소청을 둘러쌌다.
“거참, 싸우기 싫다니까.”
목척승의 팔이 달려 있는 거도를 주워 어깨에 걸친 소청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아갔다.
“뭐, 좋아. 무인이 별게 있나? 말이 안 통하면 통하게 하는 수밖에. 그런데 뭐가 좋을까? 아주 사파처럼 보이는 도법이…….”
면사 아래로 진득한 미소가 지어졌고 창궁검수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왔다.
“아, 그거면 되겠네.”
수십 개의 검이 코앞까지 날아오는 순간 소청은 도병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힘을 주었다.
웅!
소청 단전의 기운을 모조리 거도에 쏟아붓자 도신이 맹렬하게 떨렸다.
‘홀로 전방의 적을 쓸어버리는 데 이만한 것은 없지. 만경창파(萬頃蒼波)!’
만 이랑의 파도는 멀리서 바라보는 이들에게 있어 바다의 아름다움이라 하지만 정작 그 파도를 직면하는 이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하물며 일 장을 넘는 파도라면…….
횡으로 그어진 거도가 무수히 많은 호선을 연속해서 그려 내었다.
이름 그대로 도기가 파도처럼 너울 치며 사방으로 뿜어져 검격을 모조리 부숴 버렸고 창궁검수 수십을 집어삼키며 그대로 밀어 버렸다.
창궁검수들은 쓸려 나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모조리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
검을 뽑아 들고 지켜보던 남궁진린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단 일격.
시원스러울 정도로 강한 일격으로 수십이나 되는 창궁검수들은 단번에 쓸어버린 괴물이 눈앞에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놀란 것은 목척승과 흑사방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지나는 길에 도와주러 온 사파의 고수겠거니 했는데 이건 고수 정도가 아니라 정천 오존에 필적하는 사도삼위(邪道三位)급이었다.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일격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거도를 어깨에 걸치고 서 있었다.
흥분이 마구 들끓었다.
제 편이 이리 강한데 남궁이 뭔 소용일까.
오존에 오른 남궁천세가 오지 않고는 막을 자가 없어 보였다.
“이 개새끼들! 다 죽었…….”
호가호위라도 해 보려 나서는 순간 거도가 목척승의 모가지를 향했다.
“너보고 나서라고 한 적 없는데?”
“…….”
“내가 말했지? 아닌 척하는 쓰레기나 그냥 쓰레기나 다 똑같다고 말이야.”
담담한 음성이었지만 그의 몸에서 지독하게 뻗어 나오는 위압감에 목척승은 오줌을 지릴 뻔했다.
“어이, 거기 남궁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또 덤비면 이번엔 그 모가지 전부 놓고 가야 될 거야.”
“…….”
마른침이 삼켜졌다.
남궁가의 자존심을 굽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야. 개죽음을 당하기 싫은 것뿐이야. 저자가 사용한 초식은 분명 그의……. 일단은 돌아가서 세가에 알려야 한다. 그가 아니더라도 그와 관계된 자가 안휘에 나타났다면 협정 위반이다.’
남궁진린은 두려운 와중에도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을 했다.
“고수를 몰라뵈었소. 하나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남궁가의 이름으로 그대나 그대의 스승에게 반드시 묻겠소. 가자!”
“그래. 잘 선택했어.”
창궁검수들과 몸을 돌리는 남궁진린을 보며 소청이 히죽 웃었다.
‘근데 그대나 그대의 스승? 무공을 알아보았나? 이게 누구 거였더라?’
그가 알고 있는 무공은 너무 많았다.
그저 언뜻 떠오른 초식이었기에 무공명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 젠장. 머리 아프네. 됐어. 어차피 지금은 막야니까 뭔 문제가 되겠어?’
소청은 그때까지만 해도 ‘파천도’와 ‘막야’라는 이름이 가져올 파장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수롭지 않게 거도를 던져 버리자 잔뜩 쫄아 있던 목척승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 대협.”
“뭐?”
“괜찮으시면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헤헤. 어떠신지.”
지극히 조심스러운 그의 표정에 소청이 피식 웃자 목척승의 얼굴이 환해졌다.
“모시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청의 앞으로 나선 목척승이 잔뜩 부풀어 오른 가슴을 내밀고 앞장섰다.
“자, 다들 비켜! 이런 쌍놈 새끼들, 남궁가 새끼들 믿고 아까 나보던 눈빛 다 기억했다.”
그의 외침에 구경꾼처럼 둘러쌌던 사람들이 시커멓게 변한 얼굴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휘적거리는 목척승의 앞을 비켜났다.
* * *
안경 흑사방 지부.
그다지 크지 않은 장원이었다.
평소라면 고리대를 뜯긴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끌려와 몰매를 맞는 신음 소리가 가득해야 할 그곳에 모처럼 흥겨운 술자리가 펼쳐졌다.
안경에서 유명하다는 기생은 전부 불려 들어왔고 유명하다는 숙수들은 죄다 한편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비워진 술동이는 담벼락에 가득히 쌓였다.
“대협! 한 잔 더 받으십시오! 사도에 몸담은 한 사람으로서 오늘 보여 주신 신위가 어찌나 통쾌하던지!”
목척승이 소청의 잔을 채웠다.
원래 안휘라는 곳이 남궁가의 세가 원체 강하다 보니 사파가 자리 잡기가 힘든 곳이었다.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경에 터를 잡고 갖은 핍박과 멸시, 남궁가의 압박을 버티며 일구었다.
가진바 무력이 대단하지 않았지만 안휘에 그만한 터를 잡았다는 공로가 인정되어 흑사방의 안경 지부장이라는 직책을 받은 그였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괜히 남궁세가와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흑사방에서는 큰 지원을 해 주지 않았고 급기야 남궁천세가 차기 정천맹주로 내정되면서 그 존폐의 위기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던가?
버티고 버텨 온 그 앞에 하늘에서 내려 준 신인이 당도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목척승은 어떻게든 ‘막야’라는 고강한 무인을 잡고 싶었다.
잡히지 않는다면 연이라도 만들고 싶었다.
그는 제 자랑이라도 하듯이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고리 장부와 도박장에 관련된 장부, 노예 시장 운영 현황들을 한껏 과장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소청은 속으로 ‘본 중에서 가장 악질인 놈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이 목 아우가 무엇이든 대답해 드리지요!”
“그래. 아주 좋은 자세야.”
소청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목척승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근자에 남궁가에 관한 소문 좀 들은 거 없어? 최대한 나쁜 걸로다가.”
“남궁가에 대한 소문이라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갑자기 목척승이 억울한 듯이 제 가슴을 치며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울분을 들어 주는 ‘고수’가 있으니 신세 한탄처럼 말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부분 이야기의 요(要)인즉, 나쁜 짓 하다가 당했다는 말뿐이었다.
“이건 그냥 도박장에서 들은 것인데요.”
한참을 쏟아 낸 목척승이 쉬어 버린 목소리로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남궁가에 비밀스러운 곳이 있답니다. 어린아이들을 납치해다가 가두어 놓았다는데…….”
“어린아이를?”
순간 소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 듣기로는 그믐이 뜨는 달에 은밀히 마차 한 대가 빠져나간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답니다.”
“흐흠, 그래서?”
“예?”
“자세히 말해 보라고.”
“…….”
채근하는 소청을 보는 목척승이 눈만 말똥거렸다.
“그게 단데요.”
“뭐?”
“그게…….”
목척승이 우물쭈물하자 소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그렇죠? 하여간 나쁜 놈들 아닙니까? 카하하하.”
“…….”
소청이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갑자기 밖에서 지부 무인 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지부장! 지부장!”
“시끄러워! 대협 계신데 경박스럽기는!”
호통을 치자 지부 무인이 소청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큰일 났습니다.”
“뭔 큰일? 어떤 놈이 돈 떼먹고 튀었냐? 누구? 어떤 개잡놈이야?”
“그게 아니라, 밖에 남궁가의 무인들이…….”
“뭐? 남궁? 하아!”
목척승이 코웃음을 쳤다.
든든한 뒷배인 소청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 창천오검이라도 왔대? 시답잖은 잡놈들이면 나가서 꺼지라고 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대협께서 떡하니 계신데.”
“그 창천오검이 직접 왔는데요?”
“뭐?”
순간 장원 내부에 시끄럽던 소리가 사라지고 싸늘하게 변해 버렸다.
청천오검.
일검 천위, 이검 천휴, 삼검 무도, 사검 천린, 오검 무한의 다섯을 일컫는 남궁가가 자랑하는 창천검의 최고수들.
가주 남궁천세와 함께 남궁가의 이름을 드높여 온 그들이었고 그중 일검과 이검은 이미 백대 고수에 이름을 올린 지 오래였다.
“다, 다 왔어?”
“아니요. 사검과 오검이…….”
개중 다행이었다.
남궁천린과 무한 형제라면 백대 고수급에 달하는 무위를 가진 자들이었지만 ‘막야’라는 고수가 있으니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저, 대협. 그렇다는데요.”
“그래? 그럼 가야지.”
“정말이십니까!”
위축되었던 목척승의 기세가 확 하고 올랐다.
자신감 있는 모습!
당당한 말투!
수십에 달하는 창천검수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그의 무위라면 대(大)흑사방 안경 지부를 지켜 줄 것이라는 일말의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장부!”
“예?”
소청이 목척승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고리 빚을 진 이들에 대한 수많은 차용증이 모인 장부, 그리고 도박 빚과 각종 이권에 관련된 장부를 말한다는 것을 깨달은 목척승은 의아해하면서 내밀었다.
“어이구 많기도 많다.”
“그, 그렇죠?”
“그래.”
히죽 웃은 소청을 따라 목척승이 뒷머리를 긁적이는데.
휙!
“…….”
장부가 아름다운 호선을 날아 화롯불에 그 몸을 던졌다.
그리고 장렬하게 산화하기 시작했다.
그 외곽으로부터 시뻘겋게 타오르며 아름다운 불길을 피워 내었다.
“아, 아니 저건 왜…….”
순간 당황스러움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목척승은 멍한 표정으로 소청을 바라보았다.
“사검과 오검을 제외하고 몇 명이나 왔냐?”
“물경 오십은 되는 것 같습니다.”
“쯧, 노인네들 많이도 끌고 왔네. 뭘 대단한 곳을 친다고……. 뭐 그래도 그 정도면 한 놈도 못 도망가겠네.”
소청은 방립을 쓰고 턱 끈을 조여 맸다.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라 여긴 목척승이 서둘러 자신의 거도를 내밀었다.
“이건 뭐야?”
“예? 무기가 있어야…….”
“그러니까 왜?”
“예?”
“도망가는데 그게 왜 필요하냐고.”
“…….”
“잘들 있어. 혹시나 살아나면 나쁜 짓 하지 말고. 하긴 남궁가가 독이 잔뜩 올랐는데 살 수 있겠어?”
“그게 무슨?”
“무슨은…….”
소청이 씨익 하고 사악하게 웃었다.
그리고.
픽.
촛불이 입김에 꺼지듯 소청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목척승은 얼떨떨한 얼굴로 거의 다 타 버린 화로 속의 장부와 수하들의 얼굴을 바라보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이런! 씨발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