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31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31화
30화. 흑매화(黑梅花)의 진실 (1)
“제기랄!”
거대한 매화가 허공에서 산화했다.
흩날린 꽃잎이 포개지듯 소청의 전신을 눌러 놓았다.
월하일보로 재빨리 몸을 빼내지 않았다면 지면에 남겨진 수백 개의 칼자국이 자신의 몸을 덮쳤으리라.
그리고.
망할 놈의 영감이 지치지도 않고 몸을 날려 왔다.
차자작!
창대가 길게 뻗어 장창이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미쳐 버린 것인지 시커멓게 변해 버린 눈동자에는 마기가 넘실거렸고 뿜어지는 투기가 온몸을 짓눌러 왔다.
강호로 나온 이후 처음 만나 보는 괴물.
전설상의 영물 짐조의 공격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정천맹의 최강 전력이라는 호법부의 무인 오십 따위는 어린애 장난과도 같았다.
상하를 노리며 그어지는 차가운 검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제대로 된 공격조차 못 해 보고 그저 그의 검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데만 단전, 인당, 백회까지 삼혈의 기운을 모조리 소모했다.
그저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
$-매화검존 현우자 대협, 저는 진소청이라고…….
그게 뭐가 그리 기분 나쁜 말이란 말인가?
나름 어울리지도 않는 예의를 한껏 갖추었거늘, 단번에 검을 뽑아 올린 노인네는 다짜고짜 화산 매화검의 최강 절예인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을 뻗어 내었다.
“이런 씨앙!”
네 번째 기운을 끌어당겨 창극에 모은 소청은 간월식을 펼쳤다.
산악과도 같은 기운이 일어나 마주 오는 매화검선의 검격과 부딪쳤다.
콰앙!
면벽동뿐 아니라 산 전체가 무너질 듯이 뒤흔들렸다.
“망할 영감탱이!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 오존이든 뭐든 간에!”
* * *
하루 전.
“청사아안~!”
아침 녘, 화산의 산문 초입에 다다른 소청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오악 중 하나로 불리는 화산의 화강암 절경은 언제 보아도 기이로웠다.
바위 하나가 통째로 산을 이루고 능선에서 피어오른 안개를 따라 빛 내림이 쏟아지자 신선경이 따로 없었다.
과연 빛날 화(華)에 산 산(山)을 쓴 이름이라 할 만했다.
산세를 벗 삼아 오르는 산객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쳐 났고 그걸 바라보는 소청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동서로 조양과 연화, 남북으로 낙안과 운대라 이름 지어진 봉우리마다 명승과 도관이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었고 바위 벽을 뚫어 만든 수행동은 인간의 능력을 감탄하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이나 한 병 사 올 것을…….”
참으로 아쉬웠다.
매화검존 현우자가 검을 꺾고 면벽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 들었던 가득한 의문이, 절경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잊고 유람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버렸다.
산로(山路)를 따라 오르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산객들의 걸음 속도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일부러 눈을 피해 급룡협을 날듯이 거슬러 서봉이라 불리는 연화봉 입구에 도착하자 화산의 도사들이 보였다.
“여기는 화산의 도관입니다. 산객이라면 저쪽으로 가시지요.”
어딘가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도사가 다가서는 소청을 향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다.
흑의에 방립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으니 의심스러울 만했다.
“맹에서 나왔습니다.”
소청은 품에서 작은 동패 하나를 꺼내 보였다.
누런빛이 나는 동패에는 오엽의 난초가 각인되어 있었다.
제갈휘문이 준 그것은 청초각을 상징하는 군사패였고, 정천맹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방파에 손님으로 찾아갈 수가 있었다.
몰래 숨어들 수도 있었지만 소청이 노린 것은 작은 움직임이었다.
“청초각에서 나오신 분이군요. 차림이 그러하여 잠시 오해했습니다.”
“별말씀을…….”
“혹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장문인을 뵈러 왔습니다.”
“음, 지금쯤 연화봉 상궁에 계실 겁니다. 제가 안내하지요.”
청초각에서 나온 귀빈이니 산문의 수장인 그가 직접 안내를 자청했다.
소청은 패를 보여 맹의 신분을 이용하기로 한 만큼 별다른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오르자 연화봉의 정상 절벽에 위태롭게 세워진 상궁이 보였다.
화산의 천주궁.
‘이곳도 오랜만이군. 예전엔 몰래 숨어들기 일쑤였는데, 이렇듯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가다니…….’
격세지감을 느낀 소청은 도사를 따라 천주궁의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연통이 닿은 것인지 화산의 장문인인 운상자(雲祥子)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온화한 얼굴을 한 운상자가 도포를 접어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진소청입니다. 군사의 부탁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진혼창?”
“그리 부르더군요.”
“허, 내 근자에 무림을 울리는 분을 이리 뵈니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그래, 화산에는 어쩐 일이오?”
우려낸 차를 따르며 운상자가 넌지시 물어 왔다.
“검존을 뵈러 왔습니다.”
“…….”
순간 천주궁 안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고 운상자의 찻물이 멈췄다.
소청은 그의 눈에 떠오른 근심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뭔가 있어. 정협의 대명사라고 알려진 그가 괜히 검을 꺾고 면벽에 들 리 없지. 더구나 면벽에 든 시기가 십 년 전, 마천이 사라진 시기와 일치한다.’
“군사가 사숙을 찾는단 말이오?”
“예.”
“음…….”
고민하는 운상자를 대신해 함께 자리한 비어령주 운허자가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숙께서는 외부인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본인께서도 거부하시고…….”
뒷말을 흐리는 그의 모습에 소청의 마음속에는 더욱 확신이 생겼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소. 사제의 말처럼 현재 사숙께서 미령하신지라 아무리 청초각에서 나온 손님이라 하여도 만나 뵐 수가 없겠소이다.”
평온한 신색으로 돌아온 운상자의 말에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몸이 좋지 않으시다니?”
“그것은 본 파의 문제이니 알려 드리기가 어렵겠습니다. 사숙께서 면벽에 드신 태극동(太極洞)조차 스스로 폐쇄하라 명하신지라.”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화산 내부의 문제니 맹이라 해도 함부로 관여할 수가 없겠군요.”
쉽사리 수긍하자 운상자를 비롯한 화산 도사들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멀리 오신 걸음이니 한 며칠 쉬시며 산세나 즐기시지요. 도관이기는 하나 손님께 박하지 않으니 오래 묵은 명주 맛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오! 명주라면 화산 옥루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시는구려.”
“그럼요. 천하의 명주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오직 화산의 양생술로만 숙성시킬 수 있는 것을요.”
술 하나에도 화산을 치켜 주니 소청에 대한 호감도가 오른 운상자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거기 종명이 있느냐?”
종명은 장문인의 도동(道童)이자 사대제자였다.
“예. 장문인.”
“손님을 서현당으로 안내하고 옥루주를 대접하거라.”
“알겠습니다.”
운상자와 인사를 나눈 소청은 종명을 따라 서현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화산은 다른 문파와는 달리 암반에 세워진 도관이다 보니 건물이 몇 채 되지 않았다.
연화봉 정상의 상궁인 천주궁과 그 아래 몇 개의 도관을 제외하면 모두가 바위를 뚫어 만든 동혈을 도관으로 쓰고 있었다.
비어령도 마찬가지였고 태극동도 마찬가지였다.
종명이 안내한 서현당은 화산이 귀한 손님을 모실 때 사용하는 숙소로, 연화봉 입구의 아래쪽인 금룡협이 한눈에 보이는 절벽에 위치했다.
손님이 도관의 적막함에 지루하지 않도록 나름 배려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쉬십시오.”
종명이 돌아간 뒤 소청은 금룡협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청초각의 손님께서는 어찌하고 계시더냐?”
해가 질 무렵 서현당을 찾아온 운허자가 서현동주를 불러 조심스럽게 물었다.
“낮 동안 술을 드시는가 싶더니 취기에 일찍 잠을 청하셨는지 기척이 없으십니다.”
“흠. 혹, 밖으로 나오지는 않으셨느냐?”
“예. 제자가 듣기로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합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계속 살피거라.”
서현동주의 말을 들은 운허자는 안심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청이 머물고 있는 서현당은 금룡협을 바라보며 지어졌다.
입구의 반대편은 천 길 낭떠러지였으니 아무리 뛰어난 자라 해도 오가려면 문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매화검존을 찾아왔다 하여 혹시나 해서 와 본 걸음인데 괜한 기우라 생각했다.
‘사숙…….’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 * *
늦은 밤.
소청은 창을 열고 금룡협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천이라면 제갈휘문이 자신들을 뒤쫓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리라. 청초각을 거론했으니 화산에 그들과 관련이 있는 자가 있다면 분명히 움직임을 보이겠지.’
풀을 때리면 뱀이 놀라기 마련이었다.
소청이 몰래 숨어들지 않고 청초각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태극동은 금룡협의 반대편이다. 고작 삼십 장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건너가기엔 충분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태극동이 있는 절벽이었다.
낮 동안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응시했다.
‘수십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태극동은 면벽에 쓰일 장소가 아니다. 더욱이 입구를 사슬로 묶어 폐쇄하고 매화검수들이 돌아가며 지키고 있어. 검존은 현 화산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위인이다. 분명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어.’
밤이 되길 기다린 소청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차피 비밀만 알면 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검존이 어떤 상태인지.’
도사들이 태극동 경계의 교대를 위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자 소청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통해 어둠 속의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바람이 옷자락을 휘날리는 느낌을 음미하듯 한참을 떨어진 소청은 절벽 면으로 창을 뻗었다.
가가가각!
창날이 바위를 긁으며 불꽃을 만들었고 소청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턱.
창날이 바위에 난 틈에 걸리는 순간 소청의 발이 절벽을 밟았고 두 다리가 굽혀졌다.
“지금!”
파앙!
암벽을 지지대로 삼아 밟은 소청은 온 힘을 다해 반대편으로 쏘아졌다.
“수고했다.”
“예.”
태극동의 앞을 지키던 도사의 인사를 받은 교대조가 쇠사슬을 풀어내고 빗장을 걷어 내었다.
거대한 문 안쪽으로 나중에 만들어진 듯한 철문 두어 개를 지난 그들은 세밀한 눈으로 안쪽을 확인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고 별다른 이상이 없음만 인지하고 밖으로 나갔다.
스르륵.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벽면에서 소청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휴우. 도대체 문을 몇 개나 처막아 놓은 거야?”
잠형술에 귀식까지 쓰고 침투했던 소청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뛰어난 침입자라 해도 공간이 없으면 들어올 수가 없게끔 되어 있었다.
즉, 밖에서 열지 않으면 숨어들 수 없었고 한 뼘이나 되는 두께의 철문 세 개라면 설사 오존이라 해도 쉽게 뚫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면벽이 아니라 감금인데?”
소청은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어둠을 따라 들어가자 군데군데 홰를 밝힌 거대한 공동이 드러났고 그 가운데 좌정을 하고 있는 백색 도포의 노도사가 있었다.
매화검존 현우자.
화산의 최고수이자 수백 년 역사이래로 처음 매화의 정수를 깨쳤다는 그였다.
‘태극?’
노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법사들이 쳐 놓은 듯한 금줄과 바닥에 그려진 태극 문양의 진이었다.
‘뭐지? 어째서?’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간 소청은 검존을 향해 말했다.
“매화검존 현우자 대협, 저는 진소청이라고…….”
그의 발걸음이 금줄을 넘어 바닥의 태극 문양 중 일부를 밟았을 때.
차앙!
멀리 떨어졌던 현우자의 검이 스스로 뽑혀 올라 그의 손에 잡혔다.
“크크크크.”
시커먼 안광을 토해 내며 눈을 뜬 현우자가 소청을 향해 갑자기 일검을 뻗어 왔다.
“매화만리향? 이런 젠장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