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6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6화
25화. 또 다른 잠룡 (1)
쏴아아!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동정호의 운치를 즐기던 행인들이 늦은 시간임에도 피할 곳을 찾아 용소 객점으로 들어왔다.
“아이! 정말, 비싸게 주고 산 옷인데 다 버렸네.”
입을 삐죽하게 내민 상큼한 미모의 여인, 은소혜가 비에 젖어 달라붙은 옷 때문에 몸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바라보았다.
“험, 험. 소, 소저. 이걸로 일단 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피풍의를 급히 벗어 내민 소강이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붉혔다.
“어맛! 친절도 하셔라.”
피풍의를 받아 든 그녀는 소강을 보며 배시시 웃었고 일부러 그가 잘 보도록 몸을 돌리고 소곤거렸다.
“어때요? 볼만하죠?”
“예?”
“잘 빠졌죠? 이 잘록한 허리 하며 한 줌만 한 발목! 거기다가 개미가 미끄러질 정도로 윤기 나는 피부.”
“소, 소저.”
귀밑까지 붉게 물든 소강이 난감해하자 그녀의 뒤에 있던 적색 가사의 여인, 승혜가 핀잔을 주었다.
“소혜야.”
“왜? 질투 나? 그럼 언니도 이렇게 입어. 맨날 칙칙한 가사만 걸치지 말고. 그 좋은 몸매를 왜 가리고 다니는 거야?”
은소혜가 피풍의를 두르며 소강의 옆으로 다가가 팔을 안았다.
“고마워요. 진 공자.”
“…….”
팔꿈치에 물컹거리는 느낌이 전해지자 목까지 시뻘게진 소강이 팔을 빼려 했지만, 소혜가 꽉 잡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상을 지은 채 승혜를 바라보았다.
“소혜야. 그만해라. 공자께서 불편해하시지 않느냐.”
“치!”
승혜의 핀잔에 혀를 쏙 내민 은소혜가 팔을 놓아주었다.
“으휴, 사내가 되어 가지고 쑥스러워하긴.”
“크험험. 이, 이보게.”
소강은 그녀를 뒤로하고 객점 점소이 대삼을 향해 내빼듯이 달려갔다.
“소혜야. 어찌 그리…….”
“아, 됐고! 하여간 아빠 닮아서 사사건건 잔소리는. 히힛! 귀여워.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단 말이야.”
은소혜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웃으며 소강을 뒤따랐고 승혜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은승혜와 은소혜.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절강쌍미라 불리며 무림에 꽤나 알려진 자매간이었다.
절강성 항주(杭州) 성에 위치한 상인 가문 은가 태생으로, 불법(佛法)에 심취해 있던 은가의 가주 은장소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보타암과 아미파에 딸들을 속가제자로 보냈다.
승혜는 타고난 무재로 속가로는 처음으로 아미 장문인 멸절사태의 적전제자가 되어 아미창봉이라는 별호와 함께 오봉으로 이름을 날렸고, 소혜는 오존의 일인이자 검후라 불리는 보타암 옥선하의 제자로 들어갔다.
소강과 함께 회합에 참여할 목적이었던 승혜는 마침 인근에 나와 있었던 동생과 만나게 되었고, 사흘 동안 함께 지내며 동정호에 도착했다.
대문파의 제자이긴 해도 소혜는 승혜와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상인 가문에 자유분방한 성격이다 보니 가문이나 신분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함께 지내며 소강의 잘생긴 외모와 정갈한 몸가짐에 반한 소혜는 대놓고 그에게 연심을 표현했다.
“휴우, 정말 저 아이의 성격은 어쩔 수가 없구나.”
한숨을 내쉰 승혜가 뒤따르는 사이 소강은 방 두 개를 잡았다.
“객실은 후원 건물에 있다는군요. 방이 두 개 남았다니 다행입니다. 두 분 소저께서는 모란실을 쓰십시오. 간단한 요깃거리와 목욕물을 준비하라 했으니…… 씻고 쉬십시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예?”
“언니는 방을 혼자 쓰는 걸 좋아해요.”
“예? 하, 하지만 방이 두 개밖에…….”
“어쩔 수 없죠. 공자와 제가 같은 방을 쓰면 되겠네요.”
“…….”
선심 쓰듯이 말하는 은소혜로 인해 소강의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이 붉어졌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승혜가 소혜의 팔을 잡아당기며 모란실로 걸어갔다.
“놔! 놓으라고! 난 진 공자랑 같은 방을 쓸 거야!”
소리를 질러 대면서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소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구나.”
하지만 싫지 않았다.
외모는 둘째 치더라도 누구와도 격의 없이 잘 어울리는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진가에서만 지낸 소강은 여인을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정석적으로만 살아온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에 나름 호기심도 있었다.
진가에서는 항상 수련하기 바빴고 형이 떠난 이후로 진가신은 가문을 운영하는 일들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형님은 어디에 계신 건지. 연락도 하지 않으시고…….”
한숨을 내쉰 소강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객실로 향했다.
잠시 후, 누군가 소강의 방문을 두들겨 대었다.
“공자! 공자!”
“예?”
의관을 정리하고 문을 열자 산뜻하게 차려입은 소혜가 생긋이 웃고 있었다.
“하, 정말 공자는 잘 때도 그렇게 옷을 입고 자나요?”
소혜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리된 소강의 모습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한잔하러 가요.”
“예? 저는 아직 술을 마실 나이가…….”
“에이, 말도 안 돼! 이팔청춘이면 벌써 애를 가질 나이라고요. 어서 나와요. 언니도 함께 가자고 했어요.”
“아, 예. 잠시 준비하고 나오겠습니다.”
소강은 방으로 들어가 풀어 묶었던 머리칼을 정리하기 위해 옥관을 머리에 올렸다.
“아이 참!”
갑자기 들어온 은소혜가 옥관을 빼앗듯이 들었다.
“아, 아니 소저.”
“이런 건 안 해도 돼요! 풀어 헤치니까 색다른 매력이 있어서 좋기만 한데. 자, 빨리 가요. 사람들이 많아서 좋은 자리를 빼앗긴다고요.”
“아니, 잠시만, 아무리 그래도…….”
결국 소강은 머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끌려 나왔다.
“자, 봐요. 저기. 좋죠? 저 자리가 딱이에요.”
소혜가 소강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창가의 연회석으로 다가갔다.
“저, 손님.”
“왜?”
“이 자리는 주인이 있으셔서…….”
“어디?”
대삼의 말에 소혜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게, 잠시 어디를 나가셨는지 보이지는 않는데 이미 값을 치르셨습니다.”
“흠…….”
잠시 고민하던 소혜가 싱긋이 웃으며 연회석에 앉아 버렸다.
“소, 소저. 자리 주인이 있다 하지 않습니까?”
“안 돼요! 이 자리가 제일 좋단 말이에요.”
소혜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거리고는 대삼에게 말했다.
“손님이 나간 지 얼마나 됐어?”
“예? 한 한 시진쯤?”
“그럼 간 거잖아.”
“그래도…….”
“아, 됐고. 돌아오면 비켜 주면 되잖아.”
“혹여 그래도 언짢아하실까 봐서…….”
“됐고! 나 안 보여?”
“예?”
“예쁘잖아.”
“…….”
“내가 사과하면 봐줄 거야. 걱정 마.”
소혜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에 승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고, 소강이 한숨을 쉬며 대삼에게 은전 두 개를 꺼내 주었다.
“미안하네. 돌아오시면 꼭 알려 주시게. 내 사과하지.”
“아니, 뭐…….”
운이 좋은 날이었다.
연회석 자리에 재신이라도 강림했는지 먼저 온 손님은 은원보를 주었고 이번엔 은전을 두 개나 주었다.
“뭘 드릴깝쇼?”
은전에 영혼을 팔아 버린 대삼이 금세 표정을 바꾸며 물었고 몇 가지 음식과 술을 시켰다.
“그나저나 풍광은 정말로 좋습니다. 외곽에 이런 곳이 있다니…….”
소강의 말에 소혜가 환해진 얼굴 다가와 팔짱을 끼었다.
“봐요! 앉길 잘했죠? 헤헷!”
“아, 소, 소저.”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며 웃는 모습이 깨물어 줄 정도로 귀여웠지만, 소강이 승혜의 눈치를 살피며 얼굴을 붉혔다.
“소혜야. 적당히 하거라.”
“아 또 괜히 그래. 언니는 그게 문제야. 좋으면 좋은 거지 뭐가 문제야? 남의 눈 신경 쓰고, 체면 생각하고. 진 공자도 은근 좋아하고 있다고. 그쵸? 그쵸?”
“소혜야.”
“아, 됐고! 언닌 곡차나 먹어. 자요. 공자,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게요.”
“아니 저는 차를…….”
“하아, 정말이지.”
고개를 내저은 소혜는 차를 따라 주고, 자신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소강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대삼이 가져온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셋은 모처럼 한가로운 밤을 보내며 술과 음식, 차를 마셨고 용소 객점의 밤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여기가 최고라니까!”
조용하던 객점이 한 무리의 인물들로 인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외곽까지 끌고 와서는 여기가 뭐가 좋다고.”
신경질적인 여인의 목소리가 이 층을 올라왔다.
“거 참 안 믿네. 이 동정호가 누구의 영역인가? 바로 이 황보 세가의 영역이라 이 말이야. 근래에 내가 발견한 곳 중에서는 정말 최고라니까. 술맛도 그렇고 이 층 창가 연회석에서 동정호를 바라보는 풍광이…… 얼레?”
여인 하나와 사내 셋을 이끌고 나타난 황의의 덩치 큰 사내가 연회석에 앉은 소강 일행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야! 객점주!”
“아이고 공자님. 오셨습니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온 객점주가 헐레벌떡 뛰어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비벼 대었다.
“뭐야? 저 자리 항상 비워 놓으라고 했잖아.”
“아, 그게…….”
“아, 진짜 짜증 나네. 장사하기 싫어?”
사내가 하는 꼴이 파락호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객점주는 도리어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덩치 큰 황의의 사내는 황보인. 동정호가 위치한 호북성 남쪽에서 호남성 북단까지 영역권을 가진 황보 세가의 대공자였다.
지랄맞고 화가 많은 성격을 가진 그는 말이 황보 세가였지 건달패의 인물과 별반 차이도 없었다.
하지만 팔십 관의 청동화로를 들어 올리는 타고난 신력과 그 무공만큼은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났다.
무림 후기지수의 대표 격이라 불리는 칠룡 오봉의 수좌를 다툴 정도로 실력이 있는 그는 조만간 백대 고수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할 만큼의 강자였다.
괜히 그의 성질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던 객점주는 그에게 사죄를 청하고 서둘러 소강 일행에게 다가왔다.
“저, 손님.”
“왜 그러십니까?”
“자리를 좀…….”
“아, 원래의 주인이 오셨나요?”
“그게 아니라, 저분들이…….”
주인이 힐끗거리는 방향을 쳐다보다 황보인이 승혜와 소혜를 발견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절강성 예쁜이들 아냐?”
함지박만 하게 입을 벌린 그가 객점주를 밀치며 다가오자 소혜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보 공자.”
무표정하게 일어난 승혜가 인사를 하자 황보인이 크게 웃었다.
“핫핫, 이거 아미산에서 숨어 사는 암호랑이께서도 오실 줄이야. 대회합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오.”
그는 허락도 받지 않고 연회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자, 다들 안면은 있지?”
황보인이 함께 온 이들을 소개하자 서로 교류가 있었던지 알은체를 했다.
황보인과 함께 온 여인은 서문 세가의 여식인 서문란이었고, 싸늘한 표정의 사내는 팽천기, 날카로운 기도를 가진 사내는 악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자, 다들 앉자고. 한 자리가 부족하긴 하지만 말이야. 근데 이 친군 누구야? 누구이기에 절강의 예쁜이들을 양팔에 끼고 앉은 거야?”
그의 언사가 무척이나 무례했지만 소강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포권을 했다.
“사천, 간양 진가의 둘째 진소강입니다.”
“간양? 그런 동네도 있어?”
황보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하는데 악표가 날카롭게 변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가와 홀로 대적했다는 진혼창의 가문입니다.”
“아! 그 뭐시냐, 월창 뭐라 하는 그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