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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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0화
19화. 떠날 준비를 하다
소청의 계략에 따라 흑린을 처리하고 당가를 향한 모자겸과 다섯 가문의 수백 무인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열린 내성 문으로 보이는 풍경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가의 무인들이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고 삼양관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중심에 피 칠갑을 한 채 창을 든 소청이 보였다.
“진 가주, 이게 대체…….”
목하동은 입만 떡하니 벌리고 감히 내성으로 다가서지도 못했다.
성도의 군사도 아니고 단 일인이 당가를 무너뜨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흠, 과연 은공이시군. 홀로 당가를 무너뜨리시다니. 내가 도왔어야 하는 건데…….”
모자겸은 아쉬움에 무릎을 때렸다.
소청은 여전히 당가의 무인들과 원로원의 고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조금도 위축돼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
말에서 내리는 진가신을 소강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진가신이 눈에 쓰러진 당가의 무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진무월창의 무인들만이 보였다.
처참했다.
이제껏 보아 온, 당가에 잡혀 온 그 어떤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모습이었다.
모진 고신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불태워진 시체들…….
‘많이 아팠겠구나.’
그들을 보자 소청이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가신은 소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피인지, 당가의 피인지도 모른 채 혈인이 되어 버린 아들은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꿈틀거리는 당구독을 두들기고 있었다.
당가를 이겼다는 대견함보다는 아들이 느껴야 할 심적 고통이 진가신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아, 아버님 위험합니다!”
말없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진가신을 향해 소강이 만류하며 소리쳤다.
“네 형이 저기 있구나.”
진가신의 발길은 멈추지 않았다.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소강이 창을 뽑아 들고 나섰고 매섭게 눈을 뜬 모자겸이 당가의 무인들을 경계하며 그 뒤를 따랐다.
턱.
진가신이 이성을 잃은 아들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아팠다.
누구보다 장한 모습을 보여 주던 아들의 아픔이 전해져 왔다.
진가신은 처음으로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아들을 힘주어 안았다.
“괜찮다. 괜찮아. 너는 최선을 다했어.”
그는 아들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어 대던 소청은 마음을 추스르고 비틀거리며 진무월창의 무인, 청연에게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불안한 걸음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부축할 수가 없었다.
고문으로 피폐해진 청연을 부축해 비틀거리며 내성을 떠나는 소청의 뒤로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의 들것이 뒤를 따랐다.
진가를 포함한 네 곳의 무인들의 행로에는 더 이상 장애물이 없었다.
가주인 당구독이 쓰러졌다.
또한 당가 최강이라 불리는 칠영과 녹의단 일백이 단 한 명의 무인에 의해 박살 났다는 충격은 그들의 의지를 꺾어 놓기 충분했다.
원로원의 무인을 비롯해 방계의 무인들이 여전히 건재했지만 당가는 더 이상 칼을 들지 않았다.
양쪽으로 비껴 선 당가의 무인들은 모두가 원로원에 의해 옮겨지는 당구독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처참한 패배의 눈물을 흘렸다.
당가는 그렇게 침몰했다.
* *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청은 쓰러져 가는 초옥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청연은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소청의 품에서 죽었다.
치료도 받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그 먼 길을 걸어온 소청은 청연의 부모 앞에서 흐느껴 울었다.
“대공자…….”
너 때문에 이리되었다고, 내 귀한 자식을 죽였으니 너도 죽으라 매질을 해야 마땅함인데, 청연의 아비는 눈물을 삼키며 소청을 끌어안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같은 말을 연발하는 소청을 따라 진가신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고 소강마저 그 옆에서 죄를 고했다.
진무월창의 무인들은 그 모습에 머리를 처박고 함께 통곡했다.
“대공자…… 저놈이 창을 들었을 때 그리 좋아합디다. 그 대단한 당가의 대공자를 이긴 분께 창을 배우기로 했다고……. 내 그놈이 그리 좋아하는 모습은 키우며 처음이었어요.”
청연의 아비는 울먹이며 소청의 등을 토닥였다.
“기뻤을 겁니다. 대공자를 원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녀석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을 겁니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만 일어나세요. 그리고 당당히 가세요. 아들놈을 생각해서라도 사천에서, 아니 중원에서 제일가는 무인이 되십시오.”
“…….”
더욱 아프고 더욱 슬펐다.
“어허엉!”
소청은 큰 소리로 울었다.
그의 울음은 모두의 마음 한구석을 깊이 짓눌렀다.
그렇게 소청은 당가에서 죽어 간 이들의 부모를 찾아 진심으로 사죄하고 또 사죄했다.
매질을 당하기도 했고 문전 박대를 당하기도 했지만, 소청은 그 모진 박대를 아픈 몸으로 견뎌 내며 엎드려 빌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소청은 정신을 잃었다.
* * *
당가의 사건이 있은 이후 열흘이 지났다.
한차례 홍역을 앓은 당가는 더 이상 다섯 가문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았고, 당가타를 제외한 어느 지역으로도 무인을 내보내지 않은 채 침묵했다.
돌아온 날 진가의 가솔들은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엄숙하게 장례를 치렀다.
상처를 입은 소청은 깨어나지 못했지만 네 곳 가문을 비롯해 사천의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 애도했다.
당가에 외면당할 때만 해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이들이 당가와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문이 나돌자 온갖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가증스럽게도 강자와 연을 맺을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진가는 이제 사천의 그저 그런 문파가 아니라 당가와 힘을 겨룰 수 있는 강력한 세가임을 입증했기 때문이었다.
문전 박대하며 쫓아내야 함에도 진가신은 웃으며 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닷새간의 장례가 끝났고 사천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모든 이들이 돌아간 진가는 다시 표국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무인들을 모집했다.
모자겸이 직접 운남을 향해 수십 대의 수레를 이끌고 출발했으니 교역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
“청이는 어디 있느냐?”
소청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소진각을 찾은 진가신이 창술 연마를 하는 소강에게 물었다.
“후원에 있습니다.”
“음…….”
진가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가에서 돌아온 소청은 열흘 가까이 깨어나지 못했었다.
자잘한 상처 이외에도 옆구리와 복부에 관통상을 입어 피를 너무나 많이 흘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소청은 소진각의 후원에 패를 모신 진무월창의 무인들을 찾아갔다.
후원에 들어선 진가신은 여덟 개의 위패를 세워 두고 지전을 태우는 소청의 모습을 보았다.
절을 올리다 엎드려 흐느끼는 그의 모습이 왠지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소청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너무나 많은 일을 해 왔다.
자신이 오랫동안 염원했던 가문의 부흥을 이루어 냈고 홀로 당가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거대해 보였던 소청의 어깨가 오늘따라 힘없이 늘어져 보였다.
진가신은 왕칠을 불러 술을 가져오게 했다.
“크흠!”
헛기침 소리를 내자 소청이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그래. 몸은 어떻더냐?”
“괜찮습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불편했지만 소청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했다.
“그저 우연히 지나는 길에 술이나 한잔 올릴까 하고 들렀다.”
우연히 술을 올리는 사람은 없다.
아마 자신이 걱정되어 온 것이 확실했다.
소청은 아비의 마음을 느끼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진가신은 조금 부끄러웠던지 소청을 지나 위패마다 놓인 잔에 술을 부었다.
“죽은 아이들의 집은 세가에서 보살피기로 하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다 우리 세가의 가족들이 아니냐. 한잔할 테냐?”
“술을요?”
진가신이 술을 권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긴 가문의 일을 논할 때를 제외하고 대화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왜? 싫으냐?”
“그건 아닙니다만. 아직 몸이…….”
“당가에서는 그리 펄펄 날더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그새 약해진 게냐?”
“어머님께 혼나실 터인데요?”
“이를 참이냐?”
장난스럽게 정색하는 아비의 표정에 소청은 히죽 웃었다.
“왕칠 아저씨.”
“예. 도련님.”
“안산 아주머니께 말해서 안줏거리 좀 준비해 주세요. 오늘은 아버님께서 아들에게 주도(酒道)를 가르치실 모양입니다.”
“서둘러 준비하겠습니다.”
모처럼 소청의 미소를 본 왕칠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랫사람들에게 존대를 한다는 것이 사실이었구나.”
“불편하십니까?”
“아니다. 잘하였다.”
소청은 빙긋이 웃었다.
진가신은 근엄하고 말수가 없기는 해도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믿어 주지 않았다면 이만큼 진가를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으리라.
“술을 따를까요?”
“오냐. 한잔 따라 보거라.”
쪼르륵.
향긋한 술 내음이 찰랑거리며 채워지는 잔에서 피어 나왔다.
“자 너도 받거라.”
“네.”
잔이 채워졌다.
“자, 들자꾸나.”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는 진가신의 허락에 소청은 단번에 털어 넣었다.
“허, 네 녀석. 처음이 아니로구나.”
“소자 올해 열아홉입니다.”
“아, 그런가? 허, 하긴 그리되었지.”
진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아.”
“예.”
“그러고 보니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구나.”
“예?”
“고맙다.”
“…….”
“너로 인해 수대에 걸쳐 이어져 온 억압의 고리가 끊어졌다. 나는 감히 시도해 보지도 못했다. 네 할아버님께선 당가에 복종하는 방법만 가르치셨지.”
진가신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은 저들을 뛰어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녀석.”
진가신은 소청의 말이 싫지 않은지 피식 웃으며 위패를 바라보았다.
“저들이 진가를 위해 큰일을 하였구나.”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잊지 말고 보은해야 할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건 그렇고 너는 앞으로는 어찌할 참이냐?”
“글쎄요. 강호로 나가 볼까 합니다.”
“강호로?”
“예.”
“흠, 그것도 괜찮지. 하면 소가주 임명식을 서둘러야겠구나. 너도 곧 성년이 될 테니.”
“…….”
소청은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말을 할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말이 나왔을 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는 결심한 듯 진가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말해 보아라.”
“소자는 강호를 자유롭게 떠돌고 싶습니다.”
“…….”
진가신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소청이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인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듣지 못한 걸로 하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당가의 일로 느낀 것이 많습니다.”
“당가의 일로?”
“예. 저는 소강처럼 차분하지 않습니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입니다.”
“음…….”
“만약, 이번에 제가 늑장을 부리지 않았다면…….”
“아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압니다. 하지만 결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
“무리했고, 독선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그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청아.”
“필요하다면 소강의 옆에서 돕겠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세가의 인맥을 돈독하게 하고 안정을 시켜야 할 때입니다. 그건 저보다 소강이 더 잘하는 일이고요.”
진가신은 대답을 주저했다.
이미 아들은 오래전부터 생각했고 근래의 일로 결심이 확고해진 것 같았다.
“안 된다 말하면 들을 테냐?”
“아마도…… 아니겠지요.”
“그럴 줄 알았다.”
진가신이 허탈한 표정으로 웃으며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고작 아비라는 이유로 너를 진가에 가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아버님…….”
“되었다. 매정한 놈의 자식.”
진가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강이 열심히 하더구나.”
“예.”
“잘 보살펴 주거라. 너 대신 짐을 짊어져야 할 놈이니.”
“아버님…….”
“되었다, 이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는……. 사과는 소강이에게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