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5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5화
4화. 광대의 자리
이른 아침, 진가를 떠난 세 부자는 오후가 한참 지났을 때가 되어서야 당가의 영역에 도착했다.
“와! 이게 전부 당가란 말입니까?”
소강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 당가타다. 당가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지.”
“그럼 이곳 사람들이 전부 당가 성을 쓴단 말입니까?”
“그렇진 않다. 당씨 성을 쓰는 것은 내성의 가문들뿐, 외성은 모두 방계란다.”
“대단하네요. 당가가 사천의 주인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겠네요.”
“그래. 방계의 가문만 해도 우리 진가보다 몇 배는 크니까.”
씁쓸한 표정을 지은 진가신이 소청을 슬쩍 쳐다보았다.
“너는 놀라지 않는구나.”
“예? 아, 놀라고 있습니다. 충분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이미 전생에 수도 없이 드나들어 본 당가타였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저 ‘어? 저쪽엔 구환각이 있었는데? 원래는 저런 모양이었군.’ 정도의 감흥일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상주. 먼 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헛헛헛, 다음 대 사천의 주인을 임명하는 자리인데 내가 빠질 수는 없지.”
당가의 정문은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
무인, 상인, 관부의 인물까지 사천에서 이름난 이는 모조리 모인 것만 같았다.
“여전히 더럽게 복잡하네.”
소청이 작은 소리로 툴툴거리는 사이 진가의 차례가 되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진가에서 왔네.”
“진……가?”
일반적인 가주 소집 때는 총관이 직접 나와 맞이했지만 사람이 너무 몰린 관계로 세워 둔 접객인이 진가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저쪽으로 가쇼.”
“아니, 우리는 간양 진가일세. 여기 초대…….”
“그러니까 저리 가란 말이오. 거 사람도 많은데. 귀찮게시리.”
접객인이 짜증을 내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니! 진 가주님이 아니시오.”
그때 무척이나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뚱뚱한 중년인이 알은체를 했다.
“아! 금 가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찌 이쪽에 서 계십니까?”
금가란 곳이 제법 이름이 있었는지 그가 알은체를 하자 접객인이 비굴한 표정으로 물었다.
“금 가주님께서 아는 분이십니까?”
“응? 이 사람, 큰일이구먼. 진가 표국을 모르는 겐가?”
“진가 표국요?”
“그래. 우리 상가의 물건을 배달해 주는 진가 표국의 가주님이자 간양 창왕이 바로 이분이야.”
“아, 그랬습니까? 몰랐네요.”
“쯧쯧, 자네. 미리 알아 뒀어야지. 진 가주, 이리 오시지요. 저희와 함께 들어갑시다.”
금 가주는 접객인을 질책하며 진가신을 위하는 듯 말했다.
하지만 소청은 그 저변에 깔린 비웃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진가를 제 가문보다 낮추고 진가신을 간양이라는 마을 단위의 무인으로 한정한 것이다.
진가신이 금 가주와 동행하자 자연히 금가의 꽁무니에 붙게 된 소청은 툴툴거리는 접객인의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쳇, 진가 표국 따위를 내가 알 턱이 있나.”
소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이지 진가의 위세가 말이 아니구먼.’
그사이 금가의 자제들로 보이는 또래들이 슬쩍 쳐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옷 입은 거 봐. 어디서 주워 입었나? 꼬락서니하고는.”
“못 봐 주겠다, 정말. 후기지수들은 따로 모인다던데. 저런 것들과 같이 있어야 돼?”
옆에 있던 소강이 들은 것인지 제 옷을 쳐다보다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소청은 그런 소강의 어깨를 잡고 속삭였다.
“너도 광대가 되고 싶으냐?”
“예?”
“고작 입은 옷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들의 말에 휘둘릴 만큼 멍청하냔 말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당당히 어깨를 펴라. 부끄러워하는 건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
소청의 말에 소강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폈다.
* * *
임명식이 있기 전 가주인 진가신이 별도로 마련된 내원으로 들어간 뒤, 소청과 소강은 후기지수들이 모인 후원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엔 당태위의 자리로 보이는 탁자를 중심으로 네다섯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탁자가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진가 후기지수의 자리는 제일 중앙이었다.
‘이것들 봐라.’
자신들의 자리를 바라보는 소청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형님, 그래도 당가 예하 다섯 가문 중 하나라 가운데 자리를 준 모양입니다.”
소강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만족스럽게 소곤거렸다.
“좋으냐?”
“당연하지요. 그래도 당가에서는 진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멍청한 소리. 주위를 봐. 좌측 끝은 승복을 입었으니 아미의 여제자들일 것이고, 우측 끝의 도사 복장을 한 검객들은 청성파일 거야. 그들은 당가와 비슷한 위세를 지녔는데 어찌 끝에 있겠어?”
“…….”
“그리고 금가라는 곳의 자제들은 청성의 옆에 있구나.”
“…….”
“이 자리 배치는 당태위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배려한 거다. 가운데일수록 가장 말석이라고 봐야 하는 거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광대의 자리.”
소청의 조소에 소강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앉자. 모처럼 준비한 자리니까.”
소청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탁자 위의 음식을 집었다.
“맛있네.”
“…….”
소청이 소강을 향해 웃었다.
“근데 품에 안고 있는 그건 뭐냐?”
“예물요!”
소강의 말이 퉁명스러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예물?”
“예. 어머님이 몇 날 며칠을 노력해서 겨우 구한 귀한 물건입니다.”
“아! 그거.”
어머니가 은 백 냥을 주고 샀다던 설삼인 모양이었다.
그사이 후기지수들 간에 인사가 오가고 있었다.
“형님, 우리도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뭐 하러?”
“예? 이런 기회에 서로 알아 두면…….”
“너나 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지 말고. 나는 음식이나 먹고 있을게.”
“…….”
소강은 어쩔 수 없이 소청을 두고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진가의 소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아, 예.”
소강의 인사를 심드렁하게 받은 이들은 위아래로 쓱 훑어보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들의 대화만 이어 갔다.
인사를 하고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소강의 모습은 무척이나 한심해 보였다.
‘그러게 뭐 하러 사서 무시를 당해.’
원래 팔이란 게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떠나면 그만이라 생각하곤 있었지만 어쨌든 자신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인 소강을 함부로 대하자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그래도 참자.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떠날 테고 다시 안 볼지도 모르는데…….
“저어…….”
탐탁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소녀가 다가왔다.
머리를 자르지 않았지만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아미파의 속가제자인 모양이었다.
“진가의 진소청 대공자이신가요?”
“그런데요.”
“아, 반갑습니다. 저는 아미의 승혜라고 합니다.”
그다지 친해질 생각이 없었지만 먼저 인사를 해 오자 소청은 예의를 갖춰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일전에 진 가주님께 신세를 진 바가 있었는데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예. 아버님께 전해 드릴게요.”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전에 대련해 주셔서 감사했다고 꼭 좀.”
승혜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거듭 고개를 숙였다.
“어이!”
어이? 이 새낀 또 뭐지?
소청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너 어디의 누구냐?”
슬쩍 돌아보니 제법 단단하게 생긴 사내가 눈을 찡그리며 서 있었다.
한눈에 딱 봐도 그냥 애새끼였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진가, 소청.”
“진가? 하아, 진가의 아들 새끼가 감히 승혜 소저가 누군 줄 알고 인사를 그따위로 받아?”
소청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참으려 했던 기분이 자꾸만 나빠지게 만드는 놈이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그럼 어떻게 받는데?”
“뭐? 받는데에? 하! 이 새끼가 어이가 없네. 당연히 절이라도 해야지.”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목 공자.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승혜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예의를 가르치는 중입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단 말입니까?”
승혜가 따지듯이 물었다.
“예? 그야 당연히…….”
갑자기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목가의 공자가 잔뜩 기가 죽은 표정으로 목을 움츠렸다.
“어째서 저 녀석의 편을 드십니까?”
“편이라니요! 그게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소저께서는 오봉의 일인이십니다. 노는 물이 다른데 저런 찌꺼기와 말을 섞으면 품위가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게 지금!”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아미파의 여승들이 다가왔다.
“사매. 그만해라.”
“사저! 이자가 지금!”
따지듯이 말했지만 사저라는 여승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승혜는 이를 악물고 목가의 공자를 째려보고는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가 자리를 떠나자 목가의 공자는 금세 힘을 얻어 소청에게 비아냥거렸다.
“어이, 진가의 아들. 내 말 들었지? 노는 물이 다르다 이 말이야. 불쌍해서 그쪽에도 초대장을 보낸 모양인데 눈치가 있으면 이런 자리는 거절해야 하는 거 아냐?”
순식간에 자세를 바꾸는 모습에 소청이 피식 웃었다.
강자 앞에선 약하고 약자 앞에서 강한 부류들.
“그러게. 그러고 싶었는데 이쪽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뭐라고? 하하, 이 자식 웃긴 놈이네? 고작 진가 대공자 따위가 말대꾸를 해?”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게 됐다.”
“미안하게 됐다?”
목씨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놈 내가 누군지 알면서 그따위로 말을 하는 거냐?”
“알아야 하는 거냐?”
“날 몰라? 이봐들 들었나? 이자식이 날 모른다는군.”
“핫핫핫! 그놈 참 교육이 필요한 놈이네. 어떻게 사천에서 목 공자를 모르지?”
“그러게 말이야. 진가 같은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자손이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냐?”
“당연하지. 그래야 말석에서 콩고물이라도 하나 더 얻어먹지.”
좌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비웃으며 동조했다.
듣고 있던 소강은 얼굴이 시뻘게 져서 옆으로 다가왔지만 소청의 얼굴 표정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야. 이 새끼야. 잘 들어. 내가 바로 목천강이야. 목천강! 네놈들 표국에 가장 일을 많이 맡기는 성도 대검장 목가의 대공자. 알겠어?”
“그래. 목가의 대공자 목천강. 기억하지. 됐냐?”
“뭐?”
“이름을 알려 주는 게 목적이었으면 그쯤 해 둬라. 나도 이 자리가 그리 편하진 않으니까.”
“이 자식!”
목천강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는데 후원으로 외침이 들려왔다.
“소가주님이십니다.”
목소리에 맞춰 당태위가 거만하게 들어오자 주먹을 움켜쥐었던 목천강이 소청을 노려보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소청은 목천강 따위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 당태위를 바라보았다.
‘정말 웃기는 새끼네. 자기가 무슨 황제야?’
당태위의 등장은 후원의 분위기를 금세 바꾸어 버렸다.
자기 가문이 어떠네, 제 놈들이 얼마나 잘났네 하며 콧대를 높이던 녀석들이 꼬랑지를 내리고는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담담한 것은 아미와 청성, 그리고 소청뿐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소가주님!”
금가의 소생이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이것은 저희 가문이 소가주를 위해 준비한 물건입니다. 이름난 명장이 만든 금옥소라는 최상의 피리입니다.”
그는 두 손으로 가져간 예물을 당태위의 탁자 위에 공손히 놓았다.
“아직 임명식 전이지만 감사합니다. 과연 금가의 선물은 저를 기쁘게 하는군요.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마치 조공이라도 주고받는 듯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후기지수들은 앞다투어 저들이 가져온 물건을 들고 줄을 섰다.
“형님, 우리도 얼른…….”
언제 끼어들지 눈치를 살피는 소강의 모습에 소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줘.”
“예?”
“들었잖아. 네가 주고 와.”
“아니 그래도 선물이란 게. 형님이 주셔야.”
“그런 게 어디 있냐? 고작 선물이야. 누가 줘도 상관없어.”
소청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선물일 뿐인데…… 뭘 저렇게 굽실대는지.’
소청은 여타의 사람처럼 아첨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이나 정이 들어 온 동생에게는 미안했지만 자신은 곧 떠날 생각이었다.
엮이고 싶지 않았다.
딱히 그들과 관계라는 것을 맺고 싶지 않았다.
소청에게 있어 ‘관계’라는 건 그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인연일 뿐이었다.
소청이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소강이 쭈뼛거리며 일어나 선물을 들고 다가갔다.
이윽고 제 차례가 되었다.
“진가의 소강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진가? 아! 진가 표국의 공자시로군.”
당태위가 살짝 고민하다가 기억난 듯이 답했다.
“한데 소청이 아닌가? 분명 그쪽 첫째는 소청이라는 이름으로…….”
당태위의 시선이 진가가 앉은 자리를 향했고 말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소청을 보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타악!
순간 목천강이 소강에게서 선물함을 빼앗아 들었다.
“아니 이!”
소강이 막을 새도 없이 목천강이 살짝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하자 당태위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이 피식 웃었다.
“어이!”
소청에게로 걸어온 목천강이 탁자에 발을 올렸다.
“맛있냐?”
“그래. 맛나네.”
“하긴, 거지 같은 가문에서 자주 처먹어 보지 못한 귀한 음식이니 맛있겠지.”
“…….”
소청이 고개를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하고 싶은 말? 아니 그냥, 너무 맛있게 처먹길래. 배가 고픈가 하고.”
“멍청하기는. 맛으로 처먹냐? 아까워서 먹는 거다.”
“뭐?”
“여기 차려진 음식이 그냥 단순한 음식인 줄 알아? 이 잔에 담긴 술은 우리 진가가 흘린 피와 땀으로 빚은 거고, 고기와 전은 오랫동안 우리가 바친 세금으로 샀을 텐데 잘 먹어야 하지 않겠냐? 아까워서라도?”
“뭐?”
소청의 말에 눈치만 보던 소강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당태위를 비롯해 모여 있던 이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자식! 감히!”
목천강이 들고 있던 설삼 함을 바닥에 거세게 패대기쳤다.
부서진 함과 함께 비단 천에 쌓여 있던 설삼이 바닥을 뒹굴었다.
소청은 무심하게 흙투성이가 되어 버린 설삼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인 섭약란이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준비한 설삼이다.
참아야 하는데……. 오늘만 지나면 자유로운 삶이…….
그 순간 참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졌다.
“하아, 거참 참으려고 해도.”
“뭐?”
“주워.”
소청의 싸늘한 눈동자가 목천강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