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323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323화
323화. 선화빙옥궁 (1)
넓은 장원. 안락한 후원에 궁장차림의 여인 한 명이 맑은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그녀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런 모습이 놀랍도록 남예와 똑같았다. 남예를 아는 사람들이 그녀를 봤으면 남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아…….”
또다시 긴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때였다. 후원에 있는 월동문으로 여인 한 명이 들어왔다.
“소궁주님.”
“문화로구나.”
“네. 날씨가 추운데 왜 나와 계세요. 어서 들어가세요.”
“아니야. 괜찮아. 소희한테서 소식은 있니?”
“네. 이쪽으로 오고 있대요.”
“아, 갔던 일이 잘되었나?”
“그건 잘 모르겠어요. 와봐야 알 것 같아요.”
“그래.”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문화야.”
“네.”
“그가 우리를 도와줄까?”
“물론이죠. 소궁주님께서 부탁한다면 분명히 들어줄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소궁주님만큼 아름다운 분을 뵌 적이 없는걸요.”
“훗! 그래? 말이라도 고마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문화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건만 여인은 자신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고만 여겼다.
“소희가 잘해낼 거예요. 그러니 마음 푹 놓고 계세요.”
“그럴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인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자신의 손에 선화빙옥궁의 흥망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 * *
적운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수연 일행이 숲을 벗어난 건 분명했다.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다. 호천마궁은 아니었다. 조황인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은 봉문을 선언하고 돌아갔다.
무림맹도 아니었다. 그들은 적운상보다 먼저 형산파로 갔다. 그들이 형산파로 가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조금은 걱정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적운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그러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비무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무당삼현과 화산이로의 명성에 흠이 간다. 비무에서 그들이 이겨도 떳떳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무당삼현과 화산이로가 그걸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북진마문을 잠시 의심했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금극영은 똑똑한 자다. 팔이 잘렸음에도 깨끗하게 마음을 접을 정도로.
무인이 아닌 머리를 쓰는 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금극영이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가능성이 있는 건 마도연맹뿐이었다. 백수연 일행이 스스로 이 숲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잡혀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적운상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그들 말고 또 다른 세력이 백수연을 끌고 갔을 가능성이었다.
적운상은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다가 다시 한 번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반나절 정도를 찾아 헤매던 적운상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천 조각을 발견했다.
누군가가 이곳을 지나치다가 옷이 걸려서 찢어진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운상은 아주 작은 실마리 하나라도 놓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그 인근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자 멀리 떨어진 곳에 같은 천 조각이 걸려 있는 걸 찾아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옷을 찢어서 걸어놓은 것이다.
적운상은 그 누군가가 백수연이라고 여겨졌다. 서너 번 더 천 조각을 찾아내자 방향이 대충 잡혔다. 형산파가 있는 남쪽이 아니었다. 방향은 서쪽이었다.
숲을 벗어나자 이제는 천 조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발자국을 찾아냈다. 발자국만으로 추측건대 이삼십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발자국이 깊지 않고 작은 것이, 모두 여인들의 발자국이었다.
거기까지 알아내자 적운상은 선착장에서 만났던 소희가 생각났다. 선화빙옥궁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삼십 명 정도 되는 여인들과 함께 있었다. 여인들만 이렇게 몰려다니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분명했다.
발자국이 난 방향으로 따라가자 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적운상은 말 발자국이 나 있는 방향을 따라 비마보를 펼쳐서 달려갔다.
한 시진 정도를 가자 날이 어두워졌다. 더 이상은 발자국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적운상은 계속 그쪽 방향으로 갔다. 길은 없었지만 말을 타고 이동한 이상 갑자기 방향을 틀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둠을 뚫고 한참을 이동하자 마을이 하나 나왔다. 작은 마을이었다. 적운상은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까운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탕탕!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면서 노인 한 명이 나왔다.
“누구요?”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잠시 물어볼 것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노인은 적운상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물어볼 것이 뭐요?”
“오늘 낮에 이곳을 지나간 여인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모두 말을 타고 있었을 겁니다.”
“음…… 본 적이 없구려.”
“그렇습니까? 밤중에 실례했습니다.”
“아니오.”
노인이 안으로 들어가 적운상은 다른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나이가 좀 있는 여인이 나왔다. 그 여인에게도 같은 것을 물었지만 보지 못했다고 했다.
두어 집을 더 돌며 물어봤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적운상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 많은 여인들이 말을 타고 지나갔으면 누구 한 명이라도 봤어야 정상이었다. 혹여 보지 못했다고 해도 말발굽 소리라도 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아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했다. 그것을 수상하게 여긴 적운상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의 나무 밑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주위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와서 불을 피우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에는 몸이 따뜻해졌다.
그러자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잘 행동한 건지, 그게 옳은 결정이었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자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음…….”
몸이 묵직했다. 차가운 땅바닥에서 노숙을 했기 때문이었다. 용케 중간에 깨지 않고 잤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안 떠지는 눈을 가까스로 뜨자 동근 눈동자가 보였다. 맑은 두 개의 눈동자가 적운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적운상은 손을 쓰려다가 멈칫했다.
아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선착장에서 봤던 소희였다. 아무리 몸이 피곤하고 그로 인해 깊이 잠이 들었었다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가까이 와 있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적운상은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 사이에 긴장이 풀린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적운상은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못 알아챈 것이 아니었다. 물론 긴장이 약간 풀린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소희의 무공이 적운상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소희가 적운상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어이없이 죽었을 것이다.
“잘 잤나요?”
“별로. 얼굴을 좀 치워주겠소?”
“어머, 죄송해요. 호호. 너무 빤히 바라봤나요?”
그제야 소희가 웃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괜찮소.”
“적 공자는 참 잘생겼어요. 무공도 대단하고. 성격도 좋고. 소궁주님이랑 아주 잘 어울려요.”
“난 이미 혼인할 사람이 있는 몸이오.”
“영웅은 호색한다고 하죠. 대장부가 여자 여럿 거느리는 것은 흉이 아니에요.”
“관심 없소.”
적운상이 딱 잘라 말하면서 이리저리 몸을 풀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백운검을 뽑아서 소희의 목에 댔다.
“이게 무슨 뜻이죠?”
“백 누이는 어디 있소?”
“잘 있어요. 우리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사랑하는 여자를 그런 아수라장에 팽개쳐두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소희에게 이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어디 있소?”
“일단 검부터 치워주세요.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희는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적운상은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검을 거뒀다. 그러자 소희가 생긋 웃었다.
“연약한 여자에게 함부로 검을 겨누는 것이 아니에요.”
소희는 또 아랫사람을 꾸중하는 말투였다. 이에 적운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와아, 그렇게 웃으니까 너무 멋져요.”
소희가 호들갑을 떨면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적운상은 머리를 긁적였다. 왠지 대하기가 편하면서도 어려운 여자였다.
“사실 여기까지 따라오실 줄 알았어요.”
“알고서도 놔둔 거요?”
백수연이 옷을 찢어서 놔둔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네. 굳이 찾아가는 수고를 덜어줬잖아요.”
“그렇군.”
“그들은 안전하게 잘 있어요. 해칠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요?”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적운상이 시큰둥하니 소희를 봤다. 그러자 소희가 또다시 생긋 웃었다. 적운상은 그녀가 참 잘 웃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보시오.”
“우선은 궁으로 와주세요. 와서 소궁주님을 만나주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그분이 할 거예요. 다만.”
잠시 말을 끊은 소희가 조금 우울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거절은 하지 말아주세요.”
“무슨 부탁인지 듣지도 않았는데 거절하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말하는 거예요.”
“그건 듣고 나서 결정할 문제요.”
“알아요. 그저 그랬으면 하는 마음에 말하는 것뿐이에요.”
“안내나 하시오.”
“훗! 알았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소희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적운상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마을로 내려온 소희는 커다란 집으로 서슴없이 들어갔다. 집안에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런 소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소희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적운상도 같은 취급이었다.
소희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탁자를 밀어내고 바닥에 있는 문을 열었다.
“조금 어두우니까 조심하세요.”
“알았소.”
소희가 안으로 들어가자 적운상도 뒤따라 들어갔다. 안은 어둡고 긴 통로였다. 소희는 어두운데도 익숙한 듯 거침없이 걸어갔다. 적운상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소희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뒤따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가자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이면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곳은 폭포 안쪽에 나 있는 동굴이었다. 벽을 타고 옆으로 이동한 소희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깎아지른 것 같은 절벽에 한 사람이 간신히 갈 수 있는 길이 나 있었다. 그나마도 중간에는 끊어져 있고, 나무가 듬성듬성 벽에 박혀 있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소희가 그렇게 말하고 먼저 몸을 날려 나무를 연속으로 밟으면서 건너갔다. 적운상도 비마보를 펼쳐서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 벽에 십여 개의 동굴이 있는 것이 보였다.
소희는 위로 올라가서 그중 한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짧았다. 일각도 되지 않아 환한 곳이 나왔는데 그곳에 커다란 궁이 있었다. 이곳이 땅속에 있기는 했지만 천장이 훤하니 뚫려 있어서 빛이 안으로 그대로 들어왔다.
벽에 박혀 있는 선화빙옥궁은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굉장히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멋지군.”
적운상은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을 했다. 그러자 소희가 흡족한 듯이 생긋 웃었다.
“누구나 이곳에 와서 궁을 처음 보면 그런 말을 해요.”
“그런데 왜 이런 깊은 곳에 지은 거요?”
“저도 그건 몰라요. 뭔가 지켜야 할 것이 있었나 보죠.”
“지켜야 할 것이라…….”
“가요. 소궁주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소희의 안내로 궁 안으로 들어간 적운상은 또 한 번 감탄을 했다. 밖에서 봤을 때도 대단했지만 안의 구조도 대단했다. 높은 천장과 그걸 지지하고 있는 기둥과 벽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곳곳에 기화요초들이 장식되어 있어 눈을 즐겁게 해줬다.
그렇게 계속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한 번 탁 트인 곳이 나왔다. 그곳은 넓은 정원이었다. 작은 연못에 팔각정자가 지어져 있었고, 그 안에 세 명의 여인이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왔군요.”
팔각정자 앞에 서 있던 여인이 소희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시선은 적운상에게 향해 있었다.
“듣던 대로 잘생겼군요.”
“그렇죠? 하마터면 저도 반할 뻔했다니까요.”
“들어가세요.”
그녀가 비켜서자 소희가 웃으면서 적운상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 형부!”
백수연과 함께 앉아 있던 백묘묘가 적운상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백수연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적운상을 향해 웃어줬다.
* * *
“누이. 다친 데 없어?”
백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편하게 잘 지내고 있어. 소궁주가 참 잘해줘.”
그제야 적운상은 앞쪽에 앉아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남예?”
“네?”
적운상은 그녀가 남예인 줄 알았다. 너무나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이 달랐다.
“아니군. 당신은…… 여자로군.”
“맞아요. 남예는 제 오라버니예요.”
“훗! 거봐요. 내 말이 맞죠. 형부는 금방 알아챌 거라고 했잖아요.”
백묘묘가 웃으면서 말했다. 백수연과 백묘묘도 그녀를 처음 봤을 때는 남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예가 아니었다. 그녀는 선화빙옥궁의 소궁주인 선화였다.
백수연과 백묘묘는 선화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녀가 남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서 백묘묘는 만약 적운상이라면 그녀가 남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이다.
“인사드릴게요. 저는 이곳 선화빙옥궁의 소궁주인 선화라고 해요. 처음 뵈어요.”
선화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적운상이오. 백 누이를 보살펴줘서 고맙소.”
적운상이 포권을 취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선화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인사를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에요. 그게 사실은…….”
“알고 있소. 내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들었소.”
“하아…… 맞아요. 그래서 도움을 줬을 뿐이에요.”
한숨을 쉬면서 말하는 선화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적운상도 남예의 얼굴이 겹쳐 보여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두 사람은 자리를 좀 비켜주겠어요?”
선화의 말에 백수연과 백묘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 나누고 와.”
“응. 금방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