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312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312화
312화. 미인도 (3)
그는 박씨였다. 어렸을 때 어깨너머로 배우던 의술을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본격적인 직업으로 삼고 여기저기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다니면서 배웠다.
지금은 어느새 중년이 되어 있었고, 의술은 신의는 아니어도 명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되었다. 돈도 제법 벌었다. 하나뿐인 자식이 좀 말썽이었지만 가정을 나름 안정되게 잘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뜻하지 않은 환자가 찾아왔다. 박 의원은 무림인들을 치료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권위적이고 고압적이었다. 그에게 환자를 골라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무림인들은 절대로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찾아온 무림인들을 치료하지 않았다가는 목이 날아간다. 그래서 박 의원은 환자가 오면 일단 종복을 내보냈다. 종복이 와서 무림인이라고 하면 없다고 하며 돌려보내라고 했고, 무림인이 아니면 가서 치료를 했다.
오늘도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종복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 와서는 픽 쓰러졌다. 그걸 보고 박 의원은 기겁을 하며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이미 그들은 박 의원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네가 이 인근에서 가장 의술이 뛰어나다고 들었다.”
언제 봤다고 하대란 말인가?
게다가 나이도 한참이나 어려 보이거늘.
하지만 힘이 없으니 굽힐 수밖에 없었다.
“하하. 아닙니다. 그냥 먹고 살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분을 치료해라. 최대한 성심성의껏 해라.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안 그럼 목이 날아갈 것이다.”
박 의원은 뒷목이 아려왔다. 뭔 놈의 눈이 저리 무섭단 말인가?
눈빛만으로도 사람 서너 명은 죽일 것만 같았다.
“왜 대답이 없나?”
“아,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답을 한 박 의원은 그가 말한 사람의 상처를 살폈다. 왼팔이 깔끔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깔끔했다. 도대체 어떻게 자르면 이렇게 잘라 낼 수가 있는 걸까?
정말이지 감탄이 나오는 솜씨였다. 사람들을 치료하다 보면 상처를 칼로 째야 할 때가 있다. 그때 이런 솜씨로 짼다면 아마 신의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박 의원은 그의 상처를 말끔히 치료했다. 워낙에 깔끔하게 잘려나가서 지혈을 하고 고통을 줄여주는 일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후우…… 다 됐습니다요.”
“수고했다. 그럼 이제 저들도 봐줘라.”
무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면서 협박을 했던 사내가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박 의원이 그곳을 보니 이십 명은 됨 직한 사람들이 엉망인 몰골로 누워 있었다.
박 의원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막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사람을 치료하고 있는데 분노에 찬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제기랄!”
콰앙!
박 의원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슬쩍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팔이 잘린 사내가 화를 내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장에 본 문에 연락해! 북진단과 음영단(陰影團)을 보내달라고 해. 천응방을 쓸어버리겠다. 아니 이참에 형산파도 쓸어버리겠다. 가서 적운상에 대한 정보도 알아 와. 작은 것 하나 놓치지 말고 몽땅 알아 와.”
“알겠습니다.”
사내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박 의원은 멍하니 그들을 보다가 팔이 잘린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왠지 살아나기 힘들 것 같았다.
* * *
적운상은 지금 백수연과 한 침상에 누워 있었다. 백수연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그리된 것이다.
적운상은 백수연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얼마 전에 호천마궁과 크게 싸웠고, 며칠 후면 무당삼현, 화산이로와 비무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백수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항상 살얼음판을 걸어가는구나.”
“아니. 탄탄대로야.”
적운상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백수연도 마지못해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거야?”
“당연히 실력에서 오는 거지.”
“하긴…….”
“지금은 그것보다 북진마문의 일이 걱정이야.”
“그게 뭐였을까? 왜 미인도를 검 속에 넣어뒀을까? 더구나 만년한철로 만든 검이었잖아. 할아버님이니까 그 안에 있는 걸 멀쩡하게 꺼냈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거야.”
백수연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적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뭐가 생각났는지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솜씨 좋은 화공에게 백 누이를 좀 그려달라고 해야겠어. 그래서 멀리 갈 때면 가지고 가서 보게.”
“후후. 멀리 안 가면 되잖아.”
“나도 그러고 싶어.”
적운상이 그렇게 말하면서 백수연을 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줬다. 그러자 백수연이 가만히 머리를 기대왔다.
“우리 혼례식은 언제 올릴 거야?”
“글쎄? 대사형이 혼인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조금 기다렸다가 해야 할걸.”
“훗! 그냥 우리가 먼저 해버릴걸.”
“조금만 기다려.”
“응. 그럴게.”
적운상이 백수연의 머리에 살짝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허락을 받은 사이라지만 아직은 혼전이었다. 같은 방에서 자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방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푹 쉬어. 걱정하지 말고.”
“응. 너도 잘 자.”
밖으로 나온 적운상은 방으로 가다가 멀리에 있는 대장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봤다. 그리로 가보니 백구환과 백태정이 미인도를 앞에 두고 인상을 잔뜩 쓰고 앉아 있었다.
“아직 안 주무셨군요.”
“응? 그래. 잠이 와야 말이지.”
“쉬십시오. 그런다고 뭔가 방법이 나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백태정이 말끝을 흐리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적운상이 보아하니 두 사람은 이대로 그냥 쉬러 갈 것 같지가 않았다. 아마 뭔가 단서라도 잡지 못하면 밤새 저러고 있을 것 같았다.
“같이 방법을 찾아보죠.”
“방법이 뭐가 있겠나?”
백태정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적운상을 말리지는 않았다. 적운상은 미인도를 들고 찬찬히 한 장, 한 장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문득 종이 재질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걸 보십시오. 지금 보니 이 그림을 그린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흠. 우리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네. 하지만 검 속에 넣어두면 종이가 쉽게 상하지 않네. 그러니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네.”
“그렇다 해도 몇백 년씩 되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이 여자가 누군지 한 번 유추해보죠. 이렇게 뛰어난 미인이라면 분명 세간에 어느 정도 알려졌을 겁니다. 그거라도 알아내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오…… 생각해 보니 그렇군.”
백태정이 반색을 하며 다 죽어가던 얼굴을 폈다. 그건 백구환도 마찬가지였다.
“음…….”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다시 미인도를 천천히 살폈다.
“자세히 보니 수연이를 닮은 것도 같군.”
“미인들은 원래 조금씩은 닮아 보이죠.”
“옷차림을 보자면 남방 여자로군.”
백구환의 말에 백태정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그렇다면 일단 북방미인들은 제쳐놓아야겠군요.”
“그래.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나 많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옷차림을 한 번 보십시오. 화려하지가 않습니다. 유행하는 옷도 아니고요. 다섯 장 모두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는 건 명문가의 여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적운상의 말에 백태정과 백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명문가의 여식이 아니면서 미인으로 이름이 난 여자겠군.”
“그렇습니다.”
적운상은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미인도를 봤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왠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지? 분명 본 얼굴인데.’
생각이 날듯 하면서도 나지 않았다.
“왜 그러나?”
적운상이 갑자기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있자 백태정이 물었다.
“지금 보니 어디선가 본 여자 같은데 생각이 안 나는군요.”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분명 본 여자입니다.”
“생각을 잘 해보게.”
“음…….”
적운상은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을 한 명씩 모두 떠올려봤다. 심지어 호천마궁에서 봤던 여자들까지 모두 떠올려봤지만 그림 속의 여자와 일치하는 여자는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나?”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게.”
“어쩌면 그저 낯이 익을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 참. 계집들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군.”
“그만두어라. 갑자기 생각한다고 해서 희미한 기억이 떠오를 리가 없지 않느냐.”
백태정이 실망하며 말을 가려서 하지 않자 백구환이 한마디 하며 그를 말렸다. 그리고 적운상을 보니 그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살랑살랑 한 번 흔들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가?”
“네. 하지만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말이나 해보게.”
“금마도주였던 마염견을 아십니까?”
“물론이네.”
형산파에서 있었던 적운상과 마염견의 비무는 호북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명대결이었다. 당연히 백태정과 백구환도 알고 있었다.
“그의 제자 중에 남예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가 이 그림의 여자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남자라니?”
“남예는 남자지만 여기 이 미인도의 여자처럼 굉장히 예쁩니다. 게다가 항상 여장을 하고 행동도 여자 같기 때문에 누구도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그런…….”
“혹시 음양인(陰陽人)인가?”
음양인이란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양성을 뜻하는 말이었다.
“정확히는 저도 모릅니다.”
“허 참…….”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호천마궁에 맞서기 위해 그의 사형과 함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래? 그럼 어쩐다…….”
“일단 기다려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금극영이 검 속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든 행동을 취할 겁니다. 그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본 후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네. 그동안 자네는 그를 찾아주게나.”
“알아는 보겠습니다.”
“좋네.”
“그래도 자네가 있어 다행이로구만. 하하. 이래서 사람들이 아들을 원하나 보군.”
“사위도 아들이잖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적운상의 말에 백태정과 백구환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맞네.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적운상도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백태정은 적운상을 영 못마땅하게 대했었다.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오히려 뛰어난 적운상이건만, 딸을 빼앗겼다는 느낌 때문에 괜히 질투가 났던 것이다. 적운상도 그런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풀 수가 없었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서로 마음을 열게 된 것이다. 적운상은 이제야 한 가족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