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308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308화
308화. 천응방에서 (2)
석양이 질 때 보는 강은 정말 아름답다. 우뚝 솟아 있는 절벽이 강의 좌우에 절묘하게 위치해 있어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적운상은 뱃머리에 서서 그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백리난수를 만난 것 때문에 마음이 조금 심란했다. 그녀를 잊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양악과 백수연 때문에 잊으려고 노력을 했다. 지금 적운상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여인들은 그 둘이었다.
‘잘 지내기를 바랐건만…….’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었다. 소림사에서 봤던 백리난수는 당찼었다. 그걸 보고 조금은 안심을 했었다. 그런데 어제 본 그녀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역시, 여자의 몸으로는 무리였던가?
강호는 험난한 곳이다. 적운상도 형산파라는 버팀목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경험이 없으면 쉽게 속고, 쉽게 당한다.
백리난수와 함께 있던 자들은 전부 사파였다. 사파가 달리 사파가 아니다. 보기에는 부드러워 보여도 속은 알 수가 없는 것이 그네들이었다.
정파나 사파나 모두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지만, 정파 같은 경우는 대의명분을 갖추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협의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나쁜 놈들도 많지만 그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에 비해 사파는 명분이고 뭐고 없다. 드러내놓고 욕심을 보인다. 그래서 정파와는 반대로 좋은 놈들보다는 나쁜 놈들이 많다. 사람들이 사파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과 어울리려면 영민해야 한다. 안 그럼 그들에게 당한다. 적운상은 그게 걱정이었다.
“후우…….”
적운상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떠나왔다. 걱정해봐야 소용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화려한 배 한 척이 다가왔다. 물살이 빠르지 않은 곳이라 배는 쉽게 접근해왔다.
“걸어.”
누군가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쪽 배에서 십여 개의 갈고리가 날아와서 이쪽 배의 난간에 걸렸다.
“뭐, 뭐야?”
“수적인가?”
“아니야. 저 깃발은 금선표국이다!”
“금선표국?”
사람들이 당황하며 웅성거리다가 금선표국이라는 외침이 들려오자 모두들 안심을 했다. 금선표국은 호남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곳이었다. 이쪽 지방에 있는 대부분의 표국들이 그렇듯이 그들도 자체적으로 운행하는 배를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표국이 약탈을 할 리는 없었다.
“그쪽에 혹시 일검무적 적 공자가 계신가요?”
여인의 고운 미성이 금선표국의 배 위에서 울려왔다. 선미에 있던 적운상은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한 여인을 중심으로 네 명의 사내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인은 삼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청의궁장이 아주 잘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그 뒤에 있는 네 명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하고 허리에는 커다란 대도(大刀)를 차고 있었다.
“나를 찾소?”
“어머! 바로 앞에 있었군요. 죄송해요. 미처 못 알아봤어요.”
여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정말 적운상이 거기에 있는 걸 몰랐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봤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오?”
“시간이 되신다면 잠시 초청을 하고 싶어요. 아, 제 이름을 안 밝혔군요. 저는 진진랑이라고 해요.”
“화접요부(花蝶妖婦) 진진랑!”
그녀를 아는 장한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그러자 방금까지 생글생글 웃고 있던 진진랑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동시에 그녀의 뒤에 있던 사내의 손이 움직였다.
팍!
“크악!”
화접요부라고 외쳤던 장한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는 단검 한 자루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말 한마디 잘못해서 그대로 목숨을 잃은 그를 보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진진랑은 손속이 아주 악랄한 여자였다. 한 번 원한을 맺으면 어떻게든 끝을 봤고, 특히 자신의 미모에 끌려서 달려드는 남자들을 대할 때면 더욱이 잔인했다.
때론 섭혼술로 남자를 유혹해서 재미를 보고 처참하게 죽이기도 했다. 그래서 원래는 화접랑이라고 불렸으나 사람들은 화접요부라고 부르고 있었다.
“호호호.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줬군요. 어서 이쪽으로 오르세요. 적 공자.”
“나는 가겠다고 한 적이 없소만. 당신과 같이 갈 이유도 없거니와 시간도 없소.”
“그리 매몰차게 거절하면 후회를 하게 될 겁니다. 적 공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있어요.”
진진랑의 말에 적운상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예전에 조비가 자신을 만나려고 했을 때도 이런 식이었다.
“그게 누구요?”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오시면 절대로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아까 말했듯이 시간이 없소. 만나고 싶으면 그 사람보고 오라고 하시오.”
“제가 이렇게까지 부탁을 하는데도 안 되나요?”
진진랑이 말하면서 금방이라도 배에서 뛰어내릴 듯이 상체를 선미 밖으로 숙여서 적운상을 내려다봤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서 몇몇 사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달려 나가서 그녀를 받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적운상은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비키시오.”
차갑게 말하는 적운상을 보며 진진랑이 눈을 빛냈다. 그녀의 섭혼술은 정신을 뒤흔들어서 상대를 뜻대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내공이 뛰어나도 마음에 틈이 있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잠시나마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적운상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했는데 너무 차갑게 대하는군요.”
진진랑이 다시 한 번 요염한 목소리와 표정, 몸짓으로 섭혼술을 걸었다. 그러자 적운상의 눈이 황금색으로 바뀌었다. 그걸 보고 진진랑이 당황하고 있는데 적운상이 훌쩍 뛰어올라서 배의 앞부분을 발로 차고 비스듬히 쭉 날아갔다.
“무슨 짓…….”
소리를 지르던 진진랑이 입을 다물었다. 적운상이 경공술을 펼쳐서 날아간 곳에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소선 세 척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대나무 배를 타고 다니며 물건을 나르거나 고기를 잡았다.
“뭣들 해! 빨리 저 배를 잡아!”
“알겠습니다.”
진진랑이 소리쳤지만 큰 배의 방향을 갑자기 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배를 트는 동안 적운상은 대나무배의 주인에게 적당한 사례를 하고 강가에 내려달라고 했다.
뜻하지 않은 수입이 생긴 주인은 좋아라하면서 배를 강가에 댔다. 뒤늦게 방향을 튼 금선표국의 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지만 적운상은 관심도 두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멀리서 그걸 보고 있던 사도공이 혀를 찼다.
“쯧쯧. 그러게 안 된다고 했는데…….”
사실 진진랑은 사도공의 연락을 받고 왔다. 자신의 섭혼술이라면 적운상을 손쉽게 요리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하면서.
사도공은 그때도 지금과 같이 혀를 찼었다. 철없는 진진랑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과가 이랬다. 만약 그때 대나무배가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진진랑은 오늘 크게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하긴, 연락받고 하루 만에 저리 온 것만은 정말 대단한 능력이었다.
* * *
대로는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장사는 호남의 성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적운상도 그들 틈에 묻어서 천응방으로 향했다. 귀찮은 자들이 자꾸 꼬이고 있었지만 잠시 미뤄뒀다.
지금은 백수연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적운상은 가까운 포목점으로 가서 깨끗한 옷을 한 벌 샀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이곳으로 달려오느라 많이 더러워져 있었다. 그때 백리난수 때문에 사내들을 베어내서 피도 조금 묻어 있었다.
아직 백수연과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천응방은 이미 처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더러운 차림으로 찾아갈 수는 없었다. 더구나 천응방의 가장 큰 어른인 백구환이 위독하다고 하지 않는가?
최대한 예의를 차리는 것이 좋았다. 옷을 갈아입은 적운상은 포목점을 나와 천응방으로 갔다.
늘 활짝 열려 있던 천응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덕분에 오가는 손님은 보이지 않았고, 쇠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백구환이 위독하다고 해서 그 많은 장인들이 모두 손을 놓고 있단 말인가?
탕탕!
적운상은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기에 다시 한 번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에 인상이 험악해 보이는 사내가 문에 나 있는 작은 창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누구요? 헛! 당신은…….”
사내는 의외였던지 놀란 눈으로 적운상을 훑어봤다. 그러고는 재빨리 안쪽을 한 번 보고는 문을 조금 열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적운상이 안으로 들어오자 사내가 문을 닫고, 커다란 빗장을 채웠다. 그러고는 너스레를 떨면서 말했다.
“정말 당신이 맞구려. 예전에 왔을 때 먼발치에서 한 번 본적이 있지. 하하하. 이거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왔군.”
그는 이곳에서 일하는 장인 중 한 명이었다. 예전에 적운상이 찾아왔을 때 한 번밖에 보지 않았는데도 용케 기억을 하고 있었다. 하긴, 누구라도 적운상을 보면 쉽게 잊지는 못한다.
“백 어르신이 위독하다고 들었소.”
“음, 그건 사실이오. 그래서 요즘 분위기가 좋지 않소.”
적운상은 왜 일을 안 하고 있는지도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안으로 들어가서 백수연을 만나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또한 그쪽이 더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오.”
사내는 적운상을 객방으로 안내하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적운상은 뭔가가 이상했지만 가만히 서서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상하군.’
확실히 이상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이렇게 기다리게 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벌써 누군가는 왔었어야 정상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십여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시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적운상을 보고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더니 서찰을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냐?”
“아가씨께서 드리라고…….”
적운상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서찰을 펼쳐봤다. 거기에는 지금은 만날 수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적혀 있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쓴 건 아닌지 필체를 다시 한 번 봤다.
분명 백수연이 쓴 것이었다.
적운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리로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오니까 다시 가라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