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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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4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47화
장천운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설가장 무사와 싸운 사람을 말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럼 일단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겠구려. 이 호양청은 은혜를 입었으면 배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오. 귀하의 이름을 알려주신다면 나중에 반드시 갚겠소.”
호양청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장천운이 옅은 미소를 짓고는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남자라면 자고로 복수는 열 배, 은혜는 백 배로 갚아야한다고들 하죠.”
슬쩍 고개를 쳐든 호양청의 눈이 커졌다.
설마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줄이야.
그래도 어쨌든 빚을 진 사람은 자신이니 그에 대해서 토를 달 것도 없었다.
“옳은 말씀이오. 그러니 귀하의 이름을 알려주시오.”
“아마 당신은 나를 전에 봤을 거요.”
“물론이오. 비록 잠깐이지만 객잔에서 본 적이 있소.”
“아니, 그 이전에도 본 적이 있을 거요.”
호양청은 이마를 찌푸렸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전에 봤던 사람이라는 말인데…….
그의 기억력은 조양 사람들이 모두 인정해줄 정도로 뛰어났다.
누군가가 농담처럼 ‘천은공자는 조양의 모든 사람 얼굴을 기억하고 이름마저 안다네.’라고 했다. 평소 호양청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이름을 대며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호양청은 한번 본 사람의 얼굴을 잊지 않았다. 들었던 이름 역시.
조양 사람을 모두 만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양에 사는 사람 모두를 알진 못했지만.
그런 호양청이 봤을 때 장천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 호모의 기억력이 대단하지 못한 모양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노형을 떠올릴 수가 없소이다.”
“물론 지금 이 얼굴은 모를 거요.”
“그럼……?”
“나는 이유가 있어서 잠시 얼굴을 감춘 상태요.”
“성함을 말씀해주실 수 있겠소?”
“장천운.”
장천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실명을 밝혔다.
어차피 호양청은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려면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았다.
“장천운?”
이름을 되뇌던 호양청이 눈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곧, 기겁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흑월대주 장천운?”
동굴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 울림이 사라지기도 전, 동굴 안쪽에서 천은사호가 달려 나왔다.
두어 사람은 상처가 무척 심해서 걷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다. 그럼에도 장천운이라는 이름에 놀라서 뛰어나온 것이다.
백궁이 호양청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방주,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하지만 호양청은 물러서지 않고 장천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상대가 흑월대주 장천운이라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오. 굳이 그대가 나설 것도 없소.”
“소방주…….”
“더구나 저 사람은 어제 나를 구해주었소. 이곳에서 죽이려고 구해준 것은 아닐 터, 내 안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백궁을 비롯한 천은사호는 장천운의 눈치를 보았다.
장천운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죽고 싶다면 얼마든지 죽여줄 수 있소. 하지만 굳이 죽음을 택할 필요는 없지 않소?”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천은사호도 그러한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왜 우리를 구해준 거냐?”
백소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장천운의 미소가 짙어졌다.
“거래를 하나 해볼까 해서.”
“거래?”
호양청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장천운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양청으로선 곤혹한 마음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구천성과 천은방은 전쟁을 벌였다. 구천성은 그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천은방을 절대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거래를 하자니.
“무슨 거래를 하자는 거요?”
“아마 천은방이 전쟁을 벌이기로 작정한 것은 누군가의 사주가 있었기 때문일 거요. 안 그렇소?”
호양청은 바로 대답을 못했다. 인정해도, 안 해도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장천운이 다시 말했다.
“나는 사주를 한 사람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소.”
“알면서 왜 묻는 거요?”
“확인은 해야 하니까.”
“부친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 내 입으로 말해줄 순 없소.”
“말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소. 어차피 거래하고자 하는 것은 그자의 이름이 아니니까.”
“그럼……?”
“하나 묻겠소. 천은방을 보존하고 싶소, 아니면 이대로 망하도록 놔둘 거요?”
참으로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흑월대주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천은방의 존망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그럼에도 아무 말 할 수 없는 현실이 호양청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내 인내를 시험해보려 했다면 성공한 것 같구려.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임에도 당신을 다그칠 수 없는 내가 한심하기만 하오.”
“한심하다? 맞소. 당신은 정말 한심한 사람이오.”
“말이 심하다!”
백궁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장천운은 호양청만 바라보았다.
“천은방을 지금의 상황에 처하게 만든 것은 사실 귀하 부친의 고집 때문만은 아니오. 곰곰이 따져보면 천은방을 나락으로 빠뜨린 자, 원수나 다름없는 자는 따로 있다고 할 수 있소. 그런데도 그자를 향해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니 얼마나 한심한 일이오?”
호양청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장천운이 그런 호양청을 노려보며 다그치듯 말했다.
“당신은 대협의 기질이 있어서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은 흑도 건달의 기질이 있어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절대 참지 않았을 거요.”
“……참지 않으면?”
“받은 만큼 돌려주려 했을 거요. 열 배로! 백 배로! 아주 철저히!”
“하지만 그 일은 결국 부친께서 결정을 내린 거요. 부친께서 내린 결정을 남 탓만으로 돌리는 건 도리에 맞지 않소.”
“아직도 모르시는군. 무림맹과 파천회가 그곳에 우연히 나타났을 거라 생각하시오?”
“그건…….”
“그들은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오. 그들은 구천성과 천은방이 양패구상을 당했을 때 모두 쓸어버릴 생각이었소. 똑똑한 당신이라면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진 않을 거요.”
“토사구팽…….”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게 제일 깨끗하지 않겠소?”
호양청은 허공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반각이 지나도록 입을 다물고 있자, 백소가 넌지시 물었다.
“소방주, 왜 그러십니까?”
호양청은 시선을 다시 장천운에게로 돌렸다.
“뭘 원하시오?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원하는 것이 있을 텐데.”
“물론 있소. 그리고 내 말을 들어주면 천은방을 보전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귀하를 친구로 대해줄 수도 있소.”
“내가 알기로 당신은 소성주의 호위무사대인 흑월대의 대주일 뿐이오. 그런 결정을 내릴 위치는 아닌 것 같소만.”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장천운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이니 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상대는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
“내 말을 잘못 이해하셨군.”
“무슨 말이오?”
“구천성이 그 일을 해준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장천운이 그렇게 해줄 수 있다는 거요.”
참으로 광오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구천성과 자신을 동급으로 여기는 말투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호양청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떨렸다.
장천운을 처음 본 것은 석청산에서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천괴성!
‘그래, 천괴성이라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지.’
정말로 장천운이 천괴성의 기운을 타고났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라 해도 상관없고.
‘그래, 저런 자라면 친구로 지내서 나쁠 것 없어.’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처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해졌다. 모든 고민이 사라진 듯했다.
모두가 앞에 있는 자 때문이다.
흑월대의 대주, 장천운. 구천성 소성주의 호위무사.
‘호위무사라…… 가히 무적의 호위무사군.’
고민을 털어낸 호양청의 목소리가 전보다 밝아졌다.
“좋소, 당신의 친구가 되겠소. 그런데 무슨 방법으로 천은방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거요?”
“간단하오.”
“간단하다고?”
“앞으로 내 말만 잘 들으면 되니까.”
호양청의 얼굴이 구겨졌다.
“제길, 완전히 걸려들었군.”
“그래도 후회하진 않을 거요.”
***
왕규는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장천운이 절벽에 올라갔다 오더니 실실 웃기만 한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기에 저렇게 기분 좋은 표정이란 말인가.
자신은 순간순간이 답답해 미칠 지경인데!
‘왜 저렇게 쪼개는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안 갈 겁니까? 이러다 밤이 되어도 도착하지 못하겠습니다.”
왕규는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언젠가는 말해주겠지.’하면서 잊으려 할수록 궁금증만 커졌다.
“장 대주, 정말 말해주지 않을 건가?”
“친구를 하나 사귀었습니다.”
“친구? 친구가 누군데 절벽에서……? 혹시 호양청?”
장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의문이 왕규를 괴롭혔다.
“도대체 구천성과 원수나 다름없는 그를 왜 친구로 삼았나? 이해할 수가 없군.”
“천은방의 주인 정도면 친구로서 괜찮지 않습니까?”
“그래봐야 곧 망할 방파 아닌가.”
“망하지 않을 수도 있죠.”
장천운을 힐끔 쳐다본 왕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괴물과 친구가 되면 망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
유시 무렵, 마침내 독왕 남사명에게 들었던 계곡을 찾아냈다.
계곡 입구에 적어도 다섯 사람이 팔을 둘러야 둘레를 잴 수 있는 거대한 고목이 서 있어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계곡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서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길이 보이지 않고 계곡이 중간 중간 갈라져서 미리 말을 듣지 않았다면 엉뚱한 곳으로 갔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장천운은 경공술을 넘어서, 허공을 자유자재로 유영할 수 있는 환술법마저 익힌 사람이었다.
그는 간간이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독왕이 알려준 지형을 찾아냈다.
그렇게 십 리쯤 들어가자 제법 넓은 공터가 나왔다.
삼면이 절벽이고, 삼 장 높이 절벽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매우 아름다운 장소였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소에 고였다가 왼쪽의 절벽 밑을 따라 흘렀는데, 그 부근에 통나무집이 있었다.
장천운은 커다란 바위가 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는 곳에 멈춰 서서 통나무집을 향해 소리쳤다.
“노선배님! 절독곡에서 만났던 장천운입니다!”
왕규는 그런 장천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여기서 소리치나? 안으로 들어가 보세.”
“안 됩니다.”
“안 되다니? 왜 안 된단 말인가?”
“이 앞에는 기문진이 펼쳐져 있습니다.”
“기문진이라고?”
왕규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일그러뜨리며 투덜거렸다.
“웃기는 양반이군. 독왕이 독이나 잘 다루면 되지, 무슨 기문진이야?”
그때였다.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전면에서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독왕 남사명이었다.
“그놈은 누구냐?”
장천운은 한숨이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안녕하셨습니까, 노선배님. 이분은 왕규라는 분입니다.”
“보아하니 못 먹을 걸 처먹은 것 같군.”
“그게…….”
“돌아가라. 난 저런 놈과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까.”
“저, 노선배님…….”
“들어오고 싶으면 알아서 기문진을 뚫고 들어와.”
“한번만 봐주시면…….”
“미리 말하는데, 엉뚱한 길로 들어서면 내가 뿌려놓은 독에 당해서 고름처럼 녹아 죽을 수도 있어. 신세 알아서 해.”
남사명은 할 말 다했다는 듯 말릴 틈도 없이 다시 기문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