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241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241화
241화. 산동으로 (1)
이른 아침이라 안개가 뿌옇다. 그 안개 속에 사백 명이 넘는 인영들이 서 있었다. 얼핏 자유스럽게 있는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자유스러움 속에 기강이 바로 서 있었다.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목소리를 죽였고, 움직이기는 했지만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때 한 사내가 천천히 그들 앞으로 걸어왔다. 검은색 무복에 검은색의 포를 입고 허리에는 칼을 한 자루 차고 있었는데,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도 주위를 압도하는 기세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적운상이었다.
그가 오자 자유스럽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싹 사라졌다. 모두들 자세를 바로하고 적운상을 주목했다.
“다 모인 건가?”
“올 수 있는 사람은 다 왔습니다.”
한쪽 팔에 부목을 대고 하얀 면포를 칭칭 감은 낙제성이 대답했다. 그의 옆에는 우화린이 서 있었다. 정어중은 이틀 전에 적운상에게 갈비뼈가 박살났고, 오진학은 내상을 심하게 입어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조장들 중에서도 상처를 심하게 입은 사람들은 모두 오지 못했다. 하지만 부상이 심한데도 이를 악물고 나와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적운상이 그들을 잠시 훑어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상자는 빠져라. 조금이라도 다친 사람은 무조건 열외다.”
대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어떤 마음으로 나왔는데 열외를 한단 말인가?
지난 과거는 모두 잊고 새 출발을 하고자 단단히 마음을 잡고 나왔다. 적운상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어서 이틀 동안 벼르고 벼렸었다. 그런데 이깟 부상 때문에 빠지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조용히! 이틀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내 말에 따를 사람들만 필요하다. 내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내 말에 의문을 품지 마라. 이견(異見)도 달지 마라. 그저 따라라. 절대복종할 자신이 없으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떠나라.”
아무도 떠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거면 오늘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다. 적운상이 잠시 그들을 보다가 다시 말했다.
“부상자는 열외다. 돌아가서 몸을 치료해라. 너희들은 지금 짐이다. 오기를 부리다가 동료의 발목을 잡고 같이 죽고 싶은가? 다친 걸 창피하게 여겨라. 다치려면 차라리 상대와 함께 죽어라. 그래야 동료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적운상이 하는 말에 사람들이 신음을 낮게 뱉어냈다. 독하고 냉철했다. 정이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옳은 말이었다. 실제로 싸움 도중에 다친 동료를 살리려다가 더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빈번했다.
특히나 십대는 동우량이 죽은 이후로 지들끼리 똘똘 뭉쳐서 지내느라 동료 간의 정이 깊었다.
그걸 지금 적운상은 말 몇 마디로 잘라버린 것이다.
다친 사람들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뒤로 빠졌다. 그들 중에는 분해서 주먹을 움켜쥐는 자들도 많았다.
낙제성도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우화린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너밖에 없구나. 일 잘 처리하고 와라. 부탁한다.”
“걱정 마.”
우화린이 주먹으로 낙제성의 가슴을 가볍게 한 번 툭 쳤다. 부상자들이 모두 빠지고 나자 남은 건 삼백 명 정도였다.
“조장이 몇 명이지?”
적운상이 묻는 말에 우화린이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조장 앞으로!”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십여 명이 후다닥 뛰어나왔다. 한 개의 대대에는 대주 밑에 네 명의 단주가 있고, 한 명의 단주 밑에는 열 명의 조장, 그리고 한 명의 조장 밑에는 열 명의 조원이 있었다.
그러니 원래 조장이 사십 명이어야 했지만 적운상에게 반 이상이나 당하는 바람에 그들뿐이었다.
“각조의 조원들을 조장 뒤에 세워. 조장이 없는 조원들은 원하는 곳에 가서 서도록.”
“모두 들었지! 빨리 빨리 움직여라!”
우화린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줄을 맞춰 서는 것이 끝나자 우화린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원래 한 명의 조장 밑에는 열 명의 조원들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는 스무 명 가까이 되기도 했고, 누구는 서너 명뿐이기도 했다.
“끝났습니다.”
우화린은 일단 보고를 했다. 그러고 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열 명씩 끊어서 맞추라고 할까요?”
“됐어.”
“하지만…….”
우화린이 다시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고 하자 적운상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러자 아까 적운상이 했던 말을 떠올린 우화린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 조장들은 뒤에 서 있는 조원들을 데리고 흩어져서 산동 제남까지 이동한다. 기한은 한 달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조원을 두고 오거나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는 놈들은 알아서 하도록. 이상.”
적운상이 말을 마치고 메고 있던 봇짐을 우화린에게 던졌다. 얼결에 그걸 받아 든 우화린이 적운상을 봤다.
“가자.”
“네? 네.”
우화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적운상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가버리자 그때까지 도열한 채 꼼짝도 하지 않던 대원들이 갑자기 우르르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산동 제남까지 한 달 만에 가려면 기를 쓰고 가야 했다. 잠시라도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호천마궁을 떠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비와 장로들이었다.
“그가 잘 해낼까요?”
장로 중 한 명이 조비에게 물었다. 그러자 조비가 들고 있던 부채를 쫙 펼쳐서 살랑살랑 부채질을 했다.
“글쎄……. 하지만 이번에 가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의 마음을 알 수 있겠지.”
“만약을 위해 준비를 해놓을까요?”
“아니야. 그가 본궁을 배신한다면 내 손으로 죽일 생각이야.”
멀어지는 적운상을 지켜보던 조비의 눈에서 싸늘한 한기가 흘러나왔다.
* * *
우화린은 질려버렸다. 정말이지 저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사람이 저렇게까지 독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적운상은 배를 타고 이동할 때는 무조건 잤다. 그리고 말을 타고 육로를 이용할 때는 하루에 딱 한 시진씩만 잤다. 나머지 시간은 말이 거품을 물고 쓰러질 때까지 달렸다.
쉬는 시간은 배설을 할 때뿐이었다. 식사도 달리는 말 위에서 했다. 오면서 말 다섯 마리가 쓰러졌다. 그러면 경공을 펼쳐서 가까운 마을까지 달렸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을 구해서 또 달렸다.
그러면서도 적운상은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우화린은 아주 녹초가 되어서 몇 번이나 정신을 놓을 뻔했는데도 적운상은 멀쩡하기만 했다.
그 결과 딱 십오 일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십오 일 만에 산동 제남에 도착한 것이다.
그 같은 일을 해내면서 우화린은 저 사람에게 과연 불가능이란 것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마 없을 것이다. 그가 하고자 마음먹으면 뭐든지 가능할 것만 같았다.
“대주님.”
“왜?”
“이렇게 빨리 온 이유가 뭡니까?”
“즐기려고.”
“네?”
우화린은 적운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즐기다니? 도대체 뭘 즐긴단 말인가?
“저기 저 객잔이 좋겠군. 가서 방 잡아놓고 와. 한 달 정도 머물 거야.”
“네.”
적운상이 시키는 대로 우화린은 객잔으로 가서 방을 잡아놓고 왔다. 그러자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꼬치를 먹고 있는 적운상이 보였다.
“이리로 와. 이거 맛있다.”
“하…….”
우화린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호천마궁의 대주가 채신머리없이 저렇게 길거리에서 꼬치를 먹고 있는 걸 누가 봤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대주님, 배가 고프시면 여기 말고…….”
“자. 너도 먹어.”
우화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운상이 꼬치를 내밀었다. 어쩔 수 없이 꼬치를 받아든 우화린은 이걸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먹어. 맛있으니까. 돈 계산하고.”
“네? 네.”
우화린이 품에서 돈을 꺼내서 주인에게 건네고 적운상의 뒤를 따랐다. 적운상은 꼬치를 먹으면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걸 보며 자신도 모르게 꼬치 하나를 입에 넣은 우화린은 적운상이 저러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저러는 건 아니겠지?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따라다녀 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적운상은 정말 즐기고 있었다. 가다가 아이들이 귀엽다면서 당과를 사주기도 했고, 싸구려 물건 하나를 놓고 주인과 가격을 흥정하기도 했다. 그러다 필요도 없는 우산을 사기까지 했다.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은 왜 산 겁니까?”
우화린이 묻는 말에 적운상이 갑자기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 우화린에게 얼굴을 바짝 가까이 대면서 우산으로 행인들의 시야를 가렸다.
“이렇게 쓰기에 좋거든.”
우화린은 생각지도 못한 적운상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당황을 했다. 적운상의 얼굴이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데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런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지?”
그제야 적운상이 뒤로 물러나며 우산을 다시 접었다. 그러고는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우화린을 보며 물었다.
“사람들이 방금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아?”
“그거야 당연히…….”
연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가끔 길거리에서 그런 대범한 짓을 하는 연인들이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우화린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서, 설마 지금 저를 유혹하시는 겁니까?”
“뭐? 하하하하.”
적운상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오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고 갔다.
“걱정 마. 우 단주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잖아도 여자라면 머리가 아파.”
“음…….”
왠지 자존심이 좀 상하는 말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이해가 됐다. 호천마궁의 여자들이 얼마나 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달라붙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화린은 자신도 그들 틈에 끼어서 고생하는 것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너무 쉽게 믿어. 그래서 오해도 쉽게 하지. 오는군.”
적운상이 혼잣말을 하듯이 말하면서 앞을 봤다. 우화린이 그의 시선을 쫓자 오가는 행인들 틈에 서 있는 사내가 보였다. 그는 적운상에게 무시무시한 투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누구죠?”
“방성.”
이름을 말해봤자 우화린은 그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서 뿜어지는 투기로 봐서 보통의 고수가 아니란 것은 알 수가 있었다.
“준비가 됐나?”
적운상이 물었다.
“물론.”
방성이 짧게 대답했다.
“여기는 좋지 않군. 장소를 옮기지.”
“따라와라.”
방성이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적운상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우화린도 어쩔 수 없이 적운상과 같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