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230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230화
230화. 중책(重責) (1)
적운상은 아침저녁으로 운기조식을 하고 조비가 내상에 좋다는 약을 잔뜩 가져다 먹이는 바람에 몸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그래서 이제는 틈이 날 때마다 명상에 잠겼다. 그러면 조황인과 겨룰 때의 일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그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는지, 다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는지, 그러한 것들을 깊이 있게 계속 생각해보지만 답은 없었다. 수십, 수백이나 그때의 상황에 비추어서 심상수련을 해봤지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실제로 조황인과 다시 겨뤄도 필패란 뜻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적운상은 상대가 누구건 겨뤄서 이기지 못했을 때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방법을 찾았다. 그건 구혁상을 따라서 새외를 돌 때부터 해오던 하나의 습관이었다. 그랬기에 지금의 적운상이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뭐가 부족한 거지? 여기서 더 올라서야 하나?’
며칠째 명상을 해도 답이 안 나오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심검의 경지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다는 말은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다. 심검의 경지만 해도 대단해서 거기까지 오른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혹여 심검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다고 해도 거기에 오른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실제로 적운상도 먼저 심검의 경지에 올라 있던 벽로검객 왕대곡을 만나서 대화를 하고 난 후에야 자신이 심검의 경지에 올랐음을 확신했었다.
그때 적운상이 눈을 번쩍 떴다.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황인은 어쩌면 심검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을지도 몰랐다. 조사묘에서 익힌 베기를 맨손으로 잡아내고, 금안뇌정신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뇌기를 모두 쏟아냈는데도 버텨냈다. 심검의 경지에서 과연 그러한 일들이 가능할까?
왜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는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어쨌든 그걸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또 하나의 벽을 깨야 했다. 그 벽이 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깨야 할지도 모르지만 뭔가를 하기는 해야 했다.
그래서 적운상은 일단 금안뇌정신공의 뇌기를 벼락을 맞아서 얻었던 뇌기처럼 강하게 만들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그다음이었다.
“안에 있나?”
방 밖에서 조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조비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탁자에 앉았다.
“상처는 좀 어떤가?”
“많이 좋아졌어. 보내준 약이 제법 좋더군.”
“다행이군. 아버님이 자네를 보자고 하시네.”
적운상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아직은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를 이길 방법을 찾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스스로에게 좀 더 자신이 생겼을 때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조비가 저리 말을 전하러 온 것을 보니, 조황인이 그때까지 기다려줄 것 같지가 않았다.
“만나기 싫은 표정이군. 하긴 그런 꼴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걱정 말게나. 이번에는 좋은 일이 있을 걸세.”
“무슨 뜻이지?”
“전에 이야기했듯이 아버님은 자네를 중(重)하게 쓰려는 생각일세. 첫 대면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건 자네 잘못이 커. 그냥 시험이라고 생각하게. 어쨌든 이번에 자네를 부르는 건 그 일 때문일세.”
“그건 내가 호천마궁에 속했을 때의 이야기지.”
조비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잠시 적운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적운상은 그런 조비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냈다. 그러자 조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하게. 지금이라도 아버님의 말 한마디면 자네는 물론이고 형산파까지 끝장이 날 걸세. 그러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 않나? 세상이 자네 뜻대로만 흐르지는 않네. 싫어도 숙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설득의 어조로 조비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적운상은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조비의 마음이 고마워서 저도 모르게 나온 웃음이었다.
짧은 만남인데도 조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적운상을 친우(親友)처럼 대하고 있었다. 거기에 사심은 없었다. 진심으로 대했고, 그것이 와 닿았다.
“왜 웃는 건가?”
“아니야. 그렇게 하지.”
적운상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이 잘못되는 건 상관이 없지만 형산파가 잘못되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문득 예전에 마염견이 묻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때 마염견은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앞을 막고 있다면 숙일 건지, 아니면 부딪칠 건지를 물었었다. 적운상은 당연히 부딪치겠다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지금 적운상은 숙이려 하고 있었다. 나중을 위해 그렇게 결정을 한 것이다.
사실 예전에 마염견도 그랬었다. 나중을 생각하며 숙였었다. 하지만 마염견에게는 끝내 그 나중이 오지 않았었다.
“정말인가? 잘 생각했네. 하하.”
“자네 생각에는 내가 어떻게 쓰일 것 같은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군. 하지만 아버님 성격상 쉬운 자리는 내주지 않을 걸세. 아버님은 괜찮다고 생각할수록 여러모로 시험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네.”
“흠, 그건 좀 골치 아프겠군.”
“걱정 말게. 자네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라 믿네. 안 되면 내가 좀 도와주지. 하하.”
조비가 그렇게 말하면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다음 날이 되자 조비가 적운상을 부르러 왔다. 조비는 적운상을 대청까지 안내하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괜찮을 걸세.”
조비가 적운상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적운상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태사의에 앉아 있는 조황인이 있었다.
“또 뵙는군요.”
적운상이 포권을 취하면서 하는 말에 조황인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여전히 건방진 놈이었다. 하지만 이미 인정을 했으니 그 정도는 가볍게 넘겼다.
“상처는 어떠냐?”
“조비가 좋은 약을 보내줘서 많이 호전됐습니다.”
“그 녀석이 누군가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 처음 보는군.”
조비는 주위사람들로부터 태생을 의심받을 때부터 줄곧 혼자였다. 조비의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조황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자 소문은 더욱 커졌고, 그 때문에 가장 힘들어한 사람이 바로 조비였다.
뭐든지 다 줄 것같이 아양을 떨던 사람들이 급변해서 경멸에 찬 눈빛을 보냈다. 친구라고 여겼던 이들은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하던 여자들은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오로지 태생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그때부터 조비는 혼자서 힘을 키웠다. 미친 듯이 무공에 전념했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선을 확실하게 그었다.
그런 조비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적운상에게는 마음을 열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조황인도 신기하게 여겨졌다.
“나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남자한테 취미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적운상이 하는 말에 조황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신 앞에서 저렇게 대놓고 농지거리를 하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저번에 그렇게 당했으면 주눅이 좀 들 만도 하건만 적운상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껄끄러우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호천마궁에는 여섯 명의 장로가 있다. 그 밑에는 열 개의 대대가 있지. 지금 마지막 십대의 대주 자리가 비어 있다. 네가 맡아라.”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들었더라면 아마 크게 놀랐을 것이다. 호천마궁은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사파의 제일세력이었다. 그런 곳의 대주라면 그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하기 힘들었다.
조황인은 그런 자리를 지금 적운상에 주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정말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냥은 아닐 테고, 조건이 뭡니까?”
적운상이 받아들일 것같이 묻는 말에 조황인이 피식 웃었다. 한 번 더 대들지는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숙이고 들어왔다. 대주 자리에 마음이 흔들렸음인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적운상의 눈을 보니 아니었다. 적운상은 진심으로 숙이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따를 뿐이었다.
저러다 언제든 틈을 보이면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그걸 알기에 웃음이 나왔다. 지금껏 자신에게 저런 도전적인 눈빛을 보이는 놈은 오로지 마염견 한 명뿐이었다.
“조건은 없다. 우선 대주가 돼라. 할 일은 그다음에 주지.”
그렇게 말한 조황인이 둥근 금패를 하나 던져줬다. 적운상이 그걸 받아서 살펴보니 앞면에는 십(十)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구름 속에서 노니는 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대주패다. 자세한 건 조비에게 듣도록.”
조황인이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하기 싫은 거 억지로 시키는 거니 고맙다는 인사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대답도 필요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조황인이 자리를 뜨자 적운상이 손에 있는 금패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 확신이 없었다.
* * *
“그게 정말인가?”
방으로 돌아와 있는데 조비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서 물었다.
“뭐가?”
“십대의 대주가 되었다는 말 말일세.”
적운상은 대답 대신 탁자 위를 봤다. 그러자 조비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하다가 거기에 놓여 있는 대주패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이군.”
대주의 자리면 응당 좋아해야 하건만 조비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눈으로 적운상을 봤다.
“뭔가 있군.”
“후우……. 설마 아버님이 그 자리를 줄 줄은 몰랐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야.”
적운상은 조용히 조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호천마궁에는 총 열 개의 대대가 있네. 그중 십대(十隊)는 죽음의 대라고 불리지. 대대 중에서 가장 서열이 낮기 때문에 모든 일을 앞장서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일세. 그런 만큼 위험이 많이 따라.”
“그래도 대주 정도 되면 안전하지 않나?”
“예전에는 그랬지. 동우량이라는 사람이 대주로 있을 때는 십대의 전성기였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자 단주들의 불만이 굉장했었어. 대주가 독살을 당했거든. 그 이후에 대주가 두 명 정도 바뀌었었네. 모두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죽었지.”
“단주들이 죽인 건가?”
“증거는 없지만 추측으로는 그래. 동우량의 죽음이 너무 유야무야 넘어가는 바람에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그 불만이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은 상태네. 그들에게는 아직도 동우량만이 대주일세.”
“단주 중에서 한 명을 뽑아 대주로 앉히면 되질 않나?”
“그들이 거부하고 있네.”
“웃기는군. 그런데도 조직이 굴러가고 있는 건가?”
“그들은 똘똘 뭉쳐 있네. 그래서 한동안 대주 자리가 비어 있었어도 상관이 없었지. 하지만 아무래도 대주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아. 언제까지고 비워둘 자리는 아니지.”
“거기에 내가 앉은 거로군. 어쩐지 아무 조건 없이 말하더라니.”
“하지만 그들의 인정만 받으면 굉장한 권력을 쥐게 되는 걸세.”
“원하지 않는 권력이야.”
“어쨌든 조심하게. 자네라면 잘할 거라고 믿지만 후우……. 이거 축하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
“취임식이나 그런 걸 해야 하나?”
“예전에는 크게 했었지만 짧은 시간에 두 번이나 대주가 바뀌다 보니 이제는 약식으로 하고 있네. 언제가 좋겠나? 내가 길일을 알아보지.”
“한 달 정도 더 쉬었으면 좋겠군. 아직 몸이 완쾌된 것이 아니라서 움직이기가 불편해.”
“알았네. 그럼 한 달 뒤로 날짜를 잡으라 이르겠네.”
“고맙네.”
“고맙기는, 취임식이 끝나면 축하주나 한 잔 하세.”
“그러지.”
조비가 나가고 나자 적운상은 침상에 벌러덩 누웠다. 조황인의 속셈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직접 죽였을 것이다. 그럼 십대를 휘어잡으라는 건데, 그게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군. 이건 시험이로군.’
처음에는 무공을 시험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능력을 보려는 것이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조황인은 가차 없이 손을 쓸 테고, 그럼 적운상뿐만이 아니라 형산파도 끝이었다.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너구리같은 늙은이야.’
호천마궁의 궁주인 조황인을 너구리로 보는 사람은 천하를 통틀어도 아마 적운상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 * *
적운상은 방에서 계속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내상도 치료해야 했고,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많았다. 조황인과 다시 겨룬다면 어떻게 싸워야 할지, 형산파를 호천마궁으로부터 어떻게 지켜야 할지, 그리고 당장에는 십대의 대주 자리를 어떻게 굳혀야 할지, 등 어려운 일들이 겹쳐 있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방에서 명상만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적운상이 그러고 있는 동안 조비와 조완만 간간이 찾아왔다. 그 외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적 오라버니, 식기 전에 빨리 와서 드세요.”
조완은 그동안 뻔질나게 드나든 대가로 적운상과 상당히 친해졌다. 그래서 호칭도 예전과는 달랐다. 물론 그녀가 그러는 건 어디까지나 조비 때문이었다.
“응. 매번 고맙군.”
끼니때마다 굳이 조완이 식사를 가져올 필요는 없었다. 이곳에는 시비들이 넘쳐나게 많았다. 게다가 적운상은 이제 걸어도 될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 그러니 식당에 가서 먹어도 된다. 그런데도 조완은 항상 방으로 이렇게 식사를 가져왔다.
적운상에게 사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적운상이 조비와 친하기 때문에 이럴 뿐이었다.
“아니에요. 고맙기는요.”
적운상은 말없이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완이 빤히 적운상을 쳐다봤다.
“왜? 할 말 있어?”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적운상이 보아하니 아닌 게 아닌 것 같았다. 분명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조비는?”
“며칠 있으면 적 오라버니 취임식이잖아요. 그거 준비하느라 바빠요. 마치 혼인식을 준비하는 신랑 같아요.”
조완이 하는 말에 적운상이 인상을 팍 썼다. 비유가 썩 좋지 않았다. 조완도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조비가 만날 적운상만 위하니 샘이 나서 말이 그렇게 나간 것이다.
“조비가 그렇게 좋으면 밤에 덮쳐버려.”
“하아…….”
조완은 뜻밖에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적운상이 젓가락질을 하다가 멈칫하며 그녀를 봤다.
“설마…….”
“네. 제가 왜 안 그랬겠어요.”
적운상은 괜히 그런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또 한바탕 넋두리를 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완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