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91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91화
191화. 사투(死鬪) (5)
“저는 상대 없이 초식만 죽어라고 연습했었습니다. 하루 종일 한시도 쉬지 않았죠. 그 덕분에 무상지검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변초를 쓰지 못했습니다. 초식이 몸에 완전히 배어서 싸울 때면 습관처럼 초식이 나갔죠.”
“호오…… 그런 경우도 있었군.”
“그 후로 변초를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왕대곡은 적운상이 하는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문제는 모른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걸 깨달은 후로는 알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생각하면 이미 손이 가더군요.”
“옳거니. 그게 바로 심검의 경지일세.”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운산과 운청은 귀를 쫑긋 세웠다.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신경을 집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상승의 경지에 있는 고수들이 무론(武論)을 나누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운이 좋으면 그걸 듣고 깨달음을 얻어 무공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도 있었다. 깨달음을 통해 벽을 허물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영약이나 비급보다도 나은 기연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됐다.
“그걸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 년 동안 폐관수련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심상수련을 통해 방금 썼던 베기를 익혔습니다.”
“후후. 내가 뒷걸음질 치게 만든 그 베기 말이군.”
“그렇습니다. 우연찮게 전대의 고수가 동굴에 남긴 흔적을 보고 실마리를 얻었죠.”
“그렇지. 무공이 발전하는 데는 선인들의 심득을 얻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지.”
왕대곡이 맞장구를 쳤다.
“그 후로는 적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수로 보였습니다. 누구를 상대하든 진심으로 마음먹고 검을 뻗으면 모두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그 노인을 만났죠. 벽이 느껴지더군요.”
“나와 비교하면 어떤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청한 겁니다.”
“그렇군. 그런 자가 호남에 있었다니 의외로군.”
왕대곡이 뭔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자네가 익힌 그 베기를 다시 한 번 해보게.”
적운상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뒤로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쉭!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저 그런 베기였다. 그러나 왕대곡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깔끔하고 완벽한 베기였다. 그래서 무엇이든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걸 본 운산은 심각한 얼굴이 됐다. 예전에 적운상과 겨뤘을 때 저 베기를 썼다면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봐줬었군.’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 덕에 살아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좋군. 나도 그런 베기는 하지 못하네.”
같은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수련해온 방법이 다 다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작이 크군.”
“그렇습니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적운상의 베기는 동작만 보자면 보통의 베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운산이나 운청도 동작이 크다는 왕대곡의 말이 조금 의외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적운상의 동작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 휘두르는 무기가 아닐세. 찌르는 무기지. 자네가 도를 사용한다면 동작이 크다고 느껴지지 않았을 걸세.”
듣고 보니 그랬다. 검은 찌르는 무기지만 도는 휘두르는 무기다. 찌르기 위해서는 몸을 움츠려야 하고, 휘두르기 위해서는 몸을 펴야 한다.
“제가 검을 쓰기는 하지만 크게 구애받지는 않습니다. 사실 가장 먼저 익힌 건 도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랬군. 그래서 아마 그런 베기를 터득할 수 있었을 걸세.”
“그럼 동작을 작게 해서 찌르기를 터득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러면 좋기야 하지만 쉽지 않을 걸세. 그 사람과 겨룰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도를 사용하게. 그편이 훨씬 나아.”
“차이가 있을까요?”
“물론일세. 지금 자네의 베기는 완벽하네. 내가 동작이 크다고 지적했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위력을 못 내고 있다는 뜻일세. 그러니 동작을 줄이지 말고 그 동작에 맞는 무기를 들게. 그래야 애써 익힌 기술이 빛을 발할 것 아닌가?”
“음…… 그것만으로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니지. 그건 어떻게 보면 작은 문제일세. 하지만 실마리가 거기에 있지. 지금 자네가 할 일은 자네 앞에 있는 벽을 부수는 것이 아닐세.”
“그럼 뭘 해야 합니까?”
“자네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걸세.”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왕대곡은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생각일세. 그러니 저녁때 다시 한 번 겨뤄보세나. 그때까지 자네가 어떻게 수련해왔는지를 곰곰이 되돌아보게나.”
왕대곡은 그 말만 남겨놓고 자리를 떴다. 적운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왕대곡이 한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내가 걸어온 길이라…….’
적운상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운청이 모두를 보며 말했다.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 혼자 있게 놔둡시다.”
“알았어요.”
적운상은 그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생각에 잠겨서 왕대곡이 말한 대로 지난 세월을 돌아봤다. 깊은 명상이 시작됐다.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구혁상의 손을 잡고 따라가서 정말 지독하게 고생을 했었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머리가 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까지 하루 종일 검을 휘둘렀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무상지검의 경지에 올라 강해져 있었다.
그 후로는 새외의 수많은 무인들과 비무를 했다. 그 중에는 사자왕과 장검운사를 비롯한 수많은 강자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몽골의 절대자 트루칸을 이겼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금안뇌정신공의 끝을 보고 구혁상과 눈물을 흘리던 일이 떠올랐다.
중원에 와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호남일도 이존의와의 대결을 했었고, 형양 호왕문에서 쳐들어와 그들과 싸우기도 했었다. 그리고 통천문의 고수들도 상대했었고, 혁무한과도 생사를 걸고 검을 겨눴었다.
또한 혈마승들과 싸우며 수없이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결국 혈불까지 베었다.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너무나 많은 강자들을 만났었고, 그들은 지금의 적운상이 있기까지의 밑거름이 되어 줬다.
“후우…….”
한창 옛날 생각에 잠겨 있던 적운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추억이나 되새기라고 왕대곡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 왕대곡이 한 말이 떠올랐다.
- 좋군. 나도 그런 베기는 하지 못하네.
적운상이 조사묘에서 익힌 베기를 보여줬을 때 왕대곡은 그렇게 말했었다.
‘설마…… 그런 건가?’
그제야 적운상은 뭔가 알 것 같았다. 왜 왕대곡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적운상이 마염견을 보고 느낀 벽은 실력 차이로 인해 느낀 벽이 아니었다. 그건 마음의 벽이었다. 왕대곡을 봤을 때 거대한 산처럼 느껴진 것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왕대곡이나 적운상은 그렇게 실력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둘 다 심검의 경지에 올라 있으니 무공의 경지는 같았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그간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수련을 해왔는지가 문제였다. 그것이 승부를 결정짓는 주된 요소였다.
적운상의 베기는 같은 경지에 오른 왕대곡도 하지 못한다. 그만큼 훌륭한 기술이었다. 반대로 왕대곡이 펼쳤던 천중낙화검법의 그 현란한 검의 움직임은 적운상이 흉내도 내지 못한다. 각자가 걸어온 길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자부심을 가지면 될 일이다.
왕대곡이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적운상이 그걸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적운상이 눈을 떴다. 긴 명상이 끝났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면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되도록 적운상은 계속 명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적운상이 미소를 지으며 노을을 봤다.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주위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안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왕대곡이었다.
“말씀하신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런가? 다행이로군. 그럼 다시 한 번 겨뤄볼 텐가?”
“아니요. 사양하겠습니다. 지금은 이 기분을 계속 맛보고 싶군요.”
“후후. 저 노을을 보고 있으니 예전의 일이 생각나는군.”
“재미있는 일이 있었나 보군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 아찔한 일이었지. 한 십 년쯤 된 것 같군. 그때 나는 비슷한 실력의 고수에게 도전을 받았었네. 우리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였지. 반나절을 싸우면서 가진 기술과 힘을 모두 쏟아 부었네.”
“이겼습니까?”
“당연히 이겼지.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이겼다네. 둘 다 오랜 시간의 싸움으로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네. 그런데 새가 날아가면서 똥을 눈 걸세. 그 친구가 그걸 암기로 착각하고 틈을 보였지. 그래서 이겼다네. 훗! 아마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친구에게 패했을 지도 모르지. 그때도 이렇게 노을이 지고 있을 때였네.”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승패는 붙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걸세. 어떤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누가 알겠는가?”
적운상은 얼마 전에 주양악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왕대곡에게 듣게 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나?”
“그 말을 제가 얼마 전에 사매에게 해줬었거든요.”
“하하하. 그랬었나?”
“네. 고맙습니다. 왕 대협.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적운상이 왕대곡에서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닐세. 자네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나도 기쁘네. 자신감을 가지게. 자네는 충분히 강해. 나를 그렇게 밀어낸 자는 지금껏 자네밖에 없었다네.”
“과찬입니다.”
“그럼 이만 떠나야겠군. 원래는 내일 가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부디 몸조심하게나.”
“왕 대협도 몸조심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대신 인사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왕대곡이 떠나자 적운상은 다른 사람들을 보러 갔다. 제갈호월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주양악이 환하게 웃으면서 달려왔다. 운산은 왕대곡이 비무를 하면서 너무 심하게 다루는 바람에 방에 누워 있었고, 운청은 그 옆에서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