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61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61화
161화. 정암사의 혈투 (1)
쏴아아아아!
늦은 가을비였다. 호남 서북지역은 일 년의 반 이상 비가 내린다. 그리고 한 번 비가 내리면 삼 일은 기본이고, 길게는 한 달 내내 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천자산은 습기가 가득했다.
“벌써 이틀째인데 언제 비가 그칠까요?”
백리난수가 쏟아지는 비를 보며 물었다. 그녀 옆에는 백수연이 같이 쭈그리고 앉아 있고, 뒤쪽에는 적운상과 옥조진인이 비에 젖은 옷을 말리고 있었다.
산을 오르는데 하늘이 심상치 않아서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이 동굴을 발견했다. 그리고 재빨리 불을 피울 준비를 한 것까지는 좋았다. 예상대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그치지를 않았다. 덕분에 적운상 일행은 좁은 동굴 안에 이틀이나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자연을 너무 우습게 본 게 실수였어. 산을 오를 때는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말이야.”
옥조진인이 혀를 차며 말하자 적운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루만 더 있어보고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내려가죠.”
“애써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자고?”
“비가 이렇게 오는데 만약 길까지 잃어버리면 끝입니다.”
“그런 걱정은 없네. 내 점괘로다가…….”
옥조진인이 산통(算筒)을 흔들며 말하다가 적운상이 손을 들자 입을 닫았다. 적운상은 그 상태로 천천히 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백리난수와 백수연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가 적운상이 갑자기 바로 옆에서 얼굴을 내밀자 화들짝 놀랐다.
“오라버니!”
“쉿!”
적운상은 백리난수를 조용히 시키고 주위를 둘러봤다. 동굴 밖은 수풀이 우거진 숲이었다. 백리난수나 백수연이 뭔가 있나 싶어서 유심히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래?”
백수연이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적운상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밖을 살폈다.
“갔군.”
“뭐가 있었어?”
“응. 상당한 고수야.”
“혹시 혈마승?”
“나도 몰라. 하지만 왠지 또 올 것 같아.”
“그럼 뭔가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뭐를?”
생각해보니 준비할 게 없었다. 상대가 적인지 확인이 된 상황도 아니었고, 적운상의 예감이 그럴 뿐, 다시 올지 안 올지도 정확히 몰랐다. 게다가 비가 이렇게 오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비가 그치기나 바라야지.”
비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때까지 계속 내렸다.
“먹을래?”
백수연이 백리난수에게 육포를 내밀었다. 그러자 백리난수가 토를 할 것같이 인상을 쓰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틀이나 육포만 먹었더니 이제는 보기만 해도 그랬다.
“됐어요. 언니는 참 대단해요. 이틀이나 먹고도 안 질려요?”
“먹을 게 없잖아.”
“그래도요.”
“어머니가 먹는 걸 굉장히 아끼셨어. 그래서 그래.”
“어떤 분이었는데요?”
“아름답고, 지혜로운 분이셨어. 내가 어렸을 때 먹을 걸 남기면 그 안에는 사람의 정성이 들어 있다면서 항상 혼을 냈었어. 그래서 아버지나 나도 먹을 걸 귀하게 여겨.”
“흐흐흐. 천응방의 방주가 공처가였나 보구나.”
옥조진인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네. 맞아요. 사람들한테는 큰소리를 땅땅 쳐도 어머니한테는 꼼짝을 못했어요.”
백수연이 어머니 이야기를 하자 적운상도 어머니 생각이 났다. 하지만 적운상이 기억하는 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주 안아줬다는 것뿐이었다. 그때는 너무나 어렸고, 또 오래된 일이라서 어머니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잘 계실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었다. 첩으로 들어온 여자를 더 좋아했었다. 어머니가 죽자 첩이 정실이 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여자의 냉대가 시작됐다. 그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두 살 차이 나는 동생 때문이었다. 동생이 적가장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데 적운상은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관대평에게 돈을 주고 형산파로 데려가게 한 것이다.
적운상은 동굴의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시 그러고 있자 조막만한 손을 내밀며 따라다니던 여자아이가 생각났다. 적운상의 배다른 누이동생이었다.
‘지금쯤 많이 컸겠군.’
그런 생각을 하던 적운상은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기척에 번쩍 눈을 떴다.
“누구냐?”
적운상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단도를 뽑았다. 그러자 동굴 안에 들어와 있던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기 서!”
적운상이 소리치면서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그 소리에 백수연과 백리난수, 옥조진인이 눈을 떴다.
“적 오라버니!”
“거기 있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적운상의 목소리만이 들여올 뿐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도 모르겠어요.”
백리난수가 대답하면서 적운상이 사라진 방향을 봤다. 추적추적 보슬비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 * *
적운상은 금안뇌정신공을 끌어올려 비마보를 펼쳤다. 그러자 눈이 황금색으로 변하면서 발바닥에 파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쉬익!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날아오자 적운상이 급히 상체를 뒤로 눕혔다.
딱!
뭔지는 모르지만 날카로운 것이 지나가 뒤에 있는 나무에 꽂혔다. 적운상은 그걸 확인할 틈도 없이 몸을 바로 세우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발밑의 나무뿌리와 수풀이 거치적거려서 제대로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적운상은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나무와 나무를 건너뛰며 누군가를 뒤쫓았다.
탓!
“후욱…….”
땅으로 내려선 적운상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쭉쭉 뻗은 나무만 보일 뿐 뒤쫓던 누군가는 보이지 않았다. 놓친 것이다. 그제야 적운상은 너무 섣부르게 움직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이렇게 쫓을 필요도 없었다.
아까 동굴을 뛰쳐나올 때 힐끗 보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것으로 봐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적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주위의 나무 뒤에서 십여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둡고 비가 내려서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적운상은 느낌으로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러잖아도 찾고 있었다. 피를 보기에는 좋은 밤이군.”
적운상이 씨익 미소를 지으면서 품에서 두 개의 단도를 꺼냈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들도 칼을 뽑아들었다. 검신이 불그스름하고 중간이 꺾여 있는 기형도였다. 그런 칼은 오로지 혈마승들만 가지고 다닌다.
먼저 움직인 것은 적운상이었다. 그는 오른쪽에 있는 혈마승과의 거리를 급격히 좁히면서 단도로 그의 가슴을 찍었다.
챙!
혈마승이 얼결에 혈도로 적운상의 단도를 막아냈다. 그러자 적운상이 다른 손에 들린 단도로 다시 가슴을 찍었다.
챙!
혈마승이 또다시 그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적운상이 두 개의 단도를 연이어서 계속 찍어대자 결국에는 막지 못하고 가슴을 찍혔다.
파파파팍!
“크억!”
단도에 순식간에 네 번이나 가슴을 찔리자 혈마승이 피를 왈칵 쏟아내며 쓰러졌다. 그때 적운상의 얼굴 바로 앞으로 혈도가 날아왔다. 혈마승들이 거리를 좁혀온 것이다.
챙챙챙챙!
적운상은 두 개의 단도로 물샐틈없이 방어를 하며 혈마승 세 명의 공격을 모두 쳐냈다. 그 사이에 두 명이 달려와서 합세를 했다. 다섯 명이 적운상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혈도를 휘둘렀다.
적운상이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같이 몸을 날린 세 명의 혈마승들이 공중에서 적운상의 다리를 노리고 혈도를 휘둘러왔다.
챙챙!
적운상은 몸을 웅크려 그들의 혈도를 쳐내면서 옆의 나무를 발로 찼다. 그러자 그 반동으로 인해 적운상의 몸이 옆으로 쭉 날아갔다.
“막아!”
누군가의 외침에 그쪽에 있던 혈마승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적운상의 앞을 막았다. 적운상이 비마보를 익히기는 했지만 이렇게 경공을 펼치면서 싸우는 것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적운상은 다시 나무를 발로 차는 반동으로 땅으로 내려서려고 했다. 하지만 비 때문에 나무가 미끄러웠다. 발이 미끄러지면서 머리부터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그걸 놓치지 않고 혈마승들이 혈도를 휘둘러왔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였다. 적운상은 다급하게 두 개의 단도를 나무에 꽂았다. 그러자 몸이 빙글 돌면서 다시 발이 밑으로 향하게 됐다.
타타타탁!
혈마승들이 휘두른 혈도가 나무를 쳤다. 만약 그대로 계속 떨어졌다면 혈마승들의 혈도는 나무가 아니라 적운상의 몸을 쳤을 것이다.
적운상이 단도를 나무에서 뽑으며 그 힘으로 앞에 있던 혈마승을 내려쳤다.
파가가각!
“크아아악!”
혈마승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적운상이 자세를 바로잡고 혈마승들의 공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혈마승들은 주춤거리면서 덤벼들지 않았다.
어둡고 비가 와서 싸우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가진 무공의 고하(高下)보다도 얼마나 더 싸움에 집중을 하느냐와 얼마나 더 경험이 풍부한가가 승패를 좌우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조심에, 또 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피차간에 조건은 같았다. 적운상이 불리한 만큼 혈마승들도 불리했다.
‘모두 열셋, 고수는 없어.’
그런 판단이 서자 적운상은 앞에 있는 혈마승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혈마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혈도를 내려쳐왔다.
적운상은 왼손에 든 단도로 그의 칼을 걷어내면서 오른손에 든 단도를 힘껏 내리찍었다.
파각!
“크아아악!”
쉬익! 챙!
옆에서 공격해오는 혈마승의 공격을 적운상이 재빨리 막아냈다. 그러면서 그의 팔을 베고, 몸을 돌려 뒤에서 공격해 오는 혈마승의 손목을 그었다.
“으아악!”
그가 손목을 잡고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적운상의 공격이 더 빨랐다. 어느새 적운상의 단도가 그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끄으…….”
“죽여!”
“하앗!”
혈마승 셋이 동시에 공격해왔다. 적운상은 비 때문에 그들의 공격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다가 등에 나무가 닿자 재빨리 옆으로 돌았다.
타타타탁!
혈마승들의 혈도가 나무를 쳤다. 그 순간 옆으로 피했던 적운상이 그들의 앞을 파고들며 두 개의 단도를 빠르게 교차시켰다.
파각! 파각! 팍!
“끄억!”
“큭!”
세 명이 동시에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잠시 공격이 주춤해졌다. 지금까지 쓰러트린 건 모두 여섯 명!
남은 건 일곱 명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가가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들은 상대가 적운상이라는 걸 알고 온 것이 아니었다. 산속에서 누군가가 있고, 여자도 있다기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너무 강했다.
“혈불은 어디 있나?”
대답 대신 생각지도 않은 질문이 돌아오자 혈마승들이 약간 당황을 했다.
“난 혈불을 찾아왔다.”
“무슨 일로 그분을 찾아온 거냐?”
“돌려받을 게 있거든.”
“믿을 수 없다.”
“판단을 하는 건 너희가 아니라 혈불이다.”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거다. 그분은 이곳에 안 계신다. 그것도 모르고 그분을 찾아왔다는 거냐?”
“그럼 너희들은 알고 있다는 말이군.”
“뭐?”
“그거면 됐어. 그게 너희들의 목숨을 잠시나마 연장시켜 줄 거다.”
“그게 무슨…….”
혈마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운상의 몸에서 살기가 확 번져 나왔다. 그걸 느낀 혈마승들이 움찔하는 순간 적운상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