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59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59화
159화. 진해문 (2)
한 명 남은 사천왕이 슬금슬금 움직이며 륜을 던지려고 했다. 그 낌새를 알아채고 적운상이 그를 힐끔 봤다.
“헉!”
순간 그는 들고 있던 륜을 놓쳐버렸다. 아주 잠시 시선이 마주쳤을 뿐이다. 그런데도 온몸을 짓눌러오는 위압감에 숨이 턱하니 막혀오면서 몸이 움찔거렸다.
그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말하나마나였다. 문주인 이중언도 발에 못을 박아놓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잘못 건드렸어. 잘못 건드렸어. 어디에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나타났단 말인가?’
진해문은 원래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작은 삼류문파였다. 그런데 어느 날 혈마승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무공을 가르쳐주고 문파의 세를 불려주는 대신에 아주 작은 대가를 요구했다.
정체를 감추고 이곳에서 지내기를 원했으며 여자를 탐하고자 했다. 그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중언은 승낙을 하고 그들에게 여자를 바쳤다. 그 모든 것은 철저하게 비밀로 취급됐다. 혈마승들이 나설 때는 복면을 쓰고 정체를 감췄다.
그렇게 진해문은 갈수록 강해졌다. 이중언은 이대로만 간다면 곧 호남칠대세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을 거라 여겼다. 적어도 오늘 적운상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보고를 받고 그가 고수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파지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악!”
팔을 잡힌 채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비명을 질러대는 혈마승은 보기에도 끔찍했다.
백수연이나 백리난수도 저건 아니다 싶었다. 적운상이 얼마나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저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적운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랬던 것이다.
“끄헉…….”
혈마승은 몸속을 갈가리 찢어놓으며 헤집고 다니는 뇌기를 참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그제야 적운상은 그의 팔을 놓았다. 그리고 아까 쓰러트렸던 혈마승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에 절망감이 서렸다.
적운상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의 팔을 잡았다.
“죽음은 해탈이라지? 해탈하는 과정을 마음껏 즐겨봐.”
파지지지직!
“크아아아아아악!”
그는 아까 적운상에게 난도질을 당한 혈마승이었다. 적운상이 그렇게 뇌기를 흘려 넣자 상처가 터지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헉헉… 헉헉…….”
“딱 한 번만 묻지. 다른 놈들은 어디 있나?”
“극락… 왕생… 극락… 으아아아아아악!”
파지지지지지직!
결국 그도 죽었다. 지붕 위에서 그걸 보고 있던 운산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잔인하군요. 그리고 과감합니다. 저런 사람이 만약 적이 된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흥! 그래봤자 혼자야.”
“사형, 오래전 일검무적이라 불리던 사람 이야기를 모르는 건 아니죠? 그 당시 소림과 무당, 청성과 아미, 거기에 이름만 대도 알아주는 쟁쟁한 세가가 일곱 군데나 나섰는데도 오히려 그에게 당했었죠.”
“결국에는 죽었잖아.”
“결과는 그랬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를 흘린 문파들은 기둥뿌리까지 흔들릴 뻔했습니다. 문파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대거 죽어나갔으니…….”
“네 말은 저자가 그자와 비견될 만큼 강하다는 거냐?”
“아직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음… 지금 우리 둘이 덤비면, 이길 수 있을까?”
운산이 그답지 않게 진중하게 물었다.
“사형 생각은 어떠세요?”
“우리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제 생각에는 우리 둘 다 죽습니다. 그래도 어찌 될지 알 수가 없군요.”
“…….”
무공은 운산이 더 강했지만 뭔가를 판단하는 능력은 운청이 더 나았다.
“싸우지 말자.”
“싸울 생각이었습니까?”
운청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적운상이 잔인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명문정파 사람이고 무엇보다 상대가 그 사악하다는 혈마승들이었다. 운산이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당연하지. 무당에 해가 된다면 미리 베어놓는 것도 좋아.”
“하아… 갈수록 대사형을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나를 그 인간하고 비교하지 마.”
운산이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끄으…….”
네 번째 혈마승이 결국 모든 걸 다 불었다.
“정암사란 말이지?”
정암사는 호남서북의 천자산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한참이나 가야 했다.
적운상은 단도의 피를 닦아내고 품에 넣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천천히 그곳을 벗어났다. 그런데도 진해문의 무사들은 여전히 몸이 굳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적운상이 나가는 걸 묵묵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가자.”
적운상이 밖으로 나가자 백수연과 백리난수가 뒤를 따라갔다. 서상로는 괜히 따라왔다는 생각에 잠시 뻘쭘하게 있다가 관추서가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갑시다. 서 대협.”
“알았소.”
그들마저 가고 나자 바짝 얼어 있던 분위기가 풀어지며 진해문의 무사들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제, 제기랄… 어디서 저런 놈이 나타나서는…….”
이중언도 손에 축축하니 땀이 배어 있었다. 그걸 신경질적으로 옷에 문질러 닦고는 뒷정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새 왔는지, 두 명의 도사가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잠깐 뭐 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말이지.”
“…….”
이중언은 아직 고난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 * *
적운상은 말을 구해서 관도를 따라 이동했다. 앞장선 것은 관추서였다. 그는 정암사로 가는 동안 마을에 들를 때마다 어딘가로 가서 정보를 모아왔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그렇게 익양을 지나 상덕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누군가가 적운상의 앞을 막아섰다. 죽립을 눌러쓰고 칼을 품에 안고 있는 허름한 차림의 사내였다.
“그대가 적운상인가?”
“그렇소.”
“진해문을 하루 만에 무너트렸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그렇소.”
“나는 철혈마도(鐵血魔刀) 황용해라고 한다. 그대와 겨루고 싶다.”
적운상은 말없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백운검을 뽑았다. 오면서 적운상은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이런 도전을 받았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적운상의 명성이 호남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산파에서 적운상의 활약을 본 칠대문파의 무사들은 자파로 돌아가자 침이 닳도록 그 일을 떠들어댔다. 그것이 이제야 퍼지면서 이번에 진해문이 쑥대밭이 된 일까지 더해지자 적운상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이에 어떤 사람은 명성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또 어떤 사람은 그저 호기심으로 찾아왔다. 그때마다 적운상은 단 하나의 조건을 걸고 그들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대가는 알고 있소?”
“물론. 내가 지면 형산파로 가서 오 년 동안 식객으로 지내지.”
그것은 호남일도 이존의와 겨룰 때 적운상이 제시한 조건이었다. 적운상은 도전해오는 자들에게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 지면 무조건 형산파에서 오 년 동안 식객으로 지내야 한다.
그게 소문이 돌았는지 이제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건을 승낙하고 나섰다.
황용해가 칼을 뽑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적운상을 겨눴다. 그의 나이 마흔하고도 다섯! 그간 적지 않게 노력을 해왔다. 수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철혈마도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늘 부족한 뭔가를 느꼈었다. 그 뭔가를 찾아 수많은 사람들과 겨뤘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섰다.
‘놈은 항상 일검에 끝을 봤다. 일검만 피하면 된다. 일검만 피하면 기회가 있어.’
적운상은 그동안 도전해오는 자들을 모두 일 초식으로 꺾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
두 번은 없었다.
황용해가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적운상이 움직였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늦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웠다.
쉭!
“…….”
승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적운상의 검은 어느새 황용해의 목에 대어져 있었다.
“이, 이런… 다시, 다시 한 번 부탁하오.”
적운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발자국을 물러났다.
황용해가 다시 칼을 겨눴다.
‘방금은 방심한 거다. 방심해서 그런 거야. 정신을 집중하고 반격을 한다면…….’
쉭!
“…….”
결과는 같았다. 황용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어떻게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이렇게 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만… 부탁해도 되겠소?”
“그러지.”
적운상이 두 걸음을 물러나서 황용해를 봤다. 황용해가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칼을 휘둘러갔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쉭!
적운상의 검은 움직이는 순간 황용해의 목에 대어져 있었다. 황용해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제야 황용해는 그것이 실력 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적운상은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격이 다르다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졌소…….”
황용해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약속 잊지 마시오.”
적운상이 백운검을 거두고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천천히 황용해의 곁을 지나갔다. 백수연과 백리난수가 같이 가며 안타깝다는 듯이 황용해를 봤다. 관추서도 힐끗 그를 한 번 보고는 지나쳐갔다.
황용해는 멍하니 서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적운상과 다시 한 번 겨룰 것을 마음으로 속으로 다짐하면서 형산파가 있는 형산으로 향했다.
* * *
“오늘만 벌써 세 명째네.”
적운상에게 도전한 사람들의 수였다. 백수연이 웃으면서 말하자 관추서가 크게 감탄하며 말을 받았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대단하지만 그들의 도전을 전부 받아주는 적 대협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오로지 일 초식만으로 모두 꺾고 있으니…….”
적운상은 관추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관추서는 진해문에서의 일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찍어 누르며 거침없이 행동하던 적운상의 모습은 완전히 그의 뇌리에 각인이 되었다. 적운상과 함께라면 혈마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배가 고픈데 먼저 식사를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관추서가 묻는 말에 적운상이 길가 한쪽에 있는 객잔을 가리켰다.
“저리로 가지.”
객잔 앞에 도착해 말을 묶어두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웬 노도사가 쭈그리고 앉아서 점을 치는 것이 보였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 제법 태가 났다. 옆의 서궤(書櫃 : 책과 문방사우를 담아서 등에 메고 다니는 궤짝)에 달려 있는 깃발을 보니 원시천존(元始天尊) 무불통지(無不通知)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적운상이 그 노도사를 잠시 쳐다보다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잠깐 기다려.”
“어디 가요?”
백리난수가 물었지만 적운상은 그냥 웃기만 하면서 노도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백리난수가 의아한 얼굴을 하며 백수연을 봤다. 하지만 백수연도 적운상이 왜 저러는지 이유를 몰랐다.
“점을 치려는 거 같은데요. 혹시 혈마사의 위치를 물어보려는 건가?”
관추서가 농담으로 하는 말에 백수연과 백리난수가 미소를 지었다. 적운상은 늘 진지해서 장난으로라도 점 같은 건 볼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가봅시다.”
관추서가 앞장서자 백수연과 백리난수도 함께 그 노도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노도사는 갑자기 손님이 네 명이나 오자 괜스레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눈을 감았다.
“험! 원시천존 무불통지.”
적운상이 그 노도사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노도사를 빤히 쳐다봤다.
노도사는 여전히 눈을 감고 안 보는 척하다가 다시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험! 근심이 있구먼.”
“그렇습니다. 무슨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어허, 이게 안 보이는가?”
노도사가 서궤에 달려 있는 깃발의 문구를 가리켰다. 원시천존은 도교에서 모시는 신이었다. 그리고 무불통지란 통하지 않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디 보자…….”
노도사가 뭔가를 작은 목소리로 중얼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적운상이 또다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원수가 있어. 아주 감당하기 힘든 원수로구만.”
“어머! 어떻게 알았죠?”
백리난수가 신기하다는 듯이 묻자 노도사가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허! 그런 것도 모르고 여기에서 점을 보겠나? 음… 여자가 얽혀 있군.”
주양악이 관계가 되어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맞습니다.”
“험!”
노도사가 살짝 헛기침을 하더니 둥근 통을 내밀었다. 더 듣고 싶으면 돈을 내라는 소리였다.
“얼마입니까?”
적운상이 돈을 낼 것같이 묻자 백리난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적 오라버니, 설마 진짜 점을 치려는 거예요?”
“응. 이 할아버지 점괘가 신통하거든.”
백리난수의 얼굴에 불신이 떠올랐다. 백수연은 상황이 재미있는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여태껏 내 점괘는 틀린 적이 없지. 뭐하면 소저도 한 번 봐줄 테니 조금 기다려.”
노도사가 그렇게 말하면서 둥근 통을 툭 쳤다. 빨리 돈을 내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