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42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42화
142화. 이 년 후 (1)
적운상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깜깜한 동굴 안에 앉아서 명상만 했다. 사람은 죽게 전에 그간 살아온 평생을 한순간에 회상한다고 한다.
지금 적운상이 그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한순간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하나씩 전부 회상됐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생생한 기억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명상이 끝났을 때는 어느새 십여 일이나 지나 있었다. 그동안 적운상은 먹고 마시고 싸는 것도 잊은 채, 오로지 명상에만 잠겨 있었던 것이다.
적운상은 그제야 구혁상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주양악을 찾고자 마음먹었다. 살아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 있든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강해져야 했다. 죽어 있던 적운상의 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적운상이 불을 밝혔다. 조사묘에 들어와서 처음 밝히는 불이었다. 조사묘의 입구는 적운상이 들어오고 나서 밖에서 사람들이 바위로 막았다. 음식을 건넬 수 있는 작은 틈만 남겨놓고 완전히 막아버렸다.
적운상이 그러기를 원했다. 그렇게 막아놓지 않으면 어딘가로 가버릴지도 몰랐다. 스스로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겁이 났던 것이다.
바구니가 보였다. 열어보니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들어 있었다. 쪽지도 들어 있었다. 펼쳐보니 백리난수가 쓴 것이었다. 밥을 먹지 않아 다들 걱정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적운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구괴산에서 돌아온 이후로 처음 짓는 웃음이었다.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음식이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아주 소량만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바구니를 밖으로 밀어놓고 안쪽으로 왔다.
임옥군이 건네준 보따리를 풀자 안에서 세 권의 책이 나왔다. 금안뇌정신공과 비마보, 그리고 풍뢰십삼식이었다.
적운상은 먼저 금안뇌정신공을 펼쳤다. 그리고 그걸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글씨 하나 틀리지 않게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그러면서 그간 익혀온 금안뇌정신공과 의 차이점을 찾았다.
금안뇌정신공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가 있었다. 첫 단계는 뇌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단계로 팔 성까지의 성취가 있으면 완성이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그 그릇을 채우는 단계다.
예전에 구혁상이 가지고 있던 비급에는 두 번째 단계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 있지 않고 어렵게 꼬여서 쓰여 있었다. 그래서 구혁상과 적운상이 그 고생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결국 억지로 해결책을 찾기는 했지만 문제가 많았다. 벼락을 맞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방법도 방법이지만 생명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임옥군이 준 비급에는 두 번째 단계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첫 단계에서 그릇을 만든 후, 그 그릇을 채우는 방법은 신체에서 순수한 뇌기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어차피 인간이 품고 있을 수 있는 뇌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뇌기의 양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질을 좋게 하는 것이다. 적운상이 했던 것처럼 목숨 걸고 벼락을 맞으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쨌든 그러한 방법으로 수련을 하니 성취가 상당히 느렸다. 책에 나온 대로라면 팔 성을 성취한 이후, 십이 성의 경지에 이르는 데 사십 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운상은 이미 십 성까지 이룬 상태였다. 저번에 다시 벼락을 맞아서 십이 성의 성취를 이뤘었지만, 혈마승들을 상대로 모두 쏟아내는 바람에 다시 십 성의 성취만 남은 것이다.
그러니 적운상의 생각에 사십 년씩은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부터 적운상은 금안뇌정신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순도가 높은 뇌기를 만든다는 것은 굉장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고, 그만큼 심력을 소모시켰다. 한 번씩 수련을 하고 나면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도로 지쳐서 쓰러졌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자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적운상은 비마보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비마보는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경공술이 아니었다. 그저 일반적인 그런 경공술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경공술이 없어서 고생을 하다 보니 그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적운상은 겨우 삼 개월 만에 비마보를 완벽하게 익혔다.
이제 남은 건 풍뢰십삼식이었다. 그러나 적운상은 풍뢰십삼식을 쭉 한 번 훑어보고 그냥 던져놓았다. 굳이 익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운상은 이미 무상지검의 경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심검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무공을 익힌다는 것이 이제는 무의미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것이 더 수련에 도움이 됐다.
그렇게 적운상은 하루의 대부분을 금안뇌정신공을 익히는 데 보내고 남는 시간은 명상을 했다. 그리고 식사는 계속 한 끼만 했다. 예전에 하루 종일 미친 듯이 검만 휘두르며 수련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시간이 흘렀다. 깜깜한 동굴 안이라 적운상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적운상은 우연찮게 조사묘 안에 또 다른 동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금안뇌정신공의 위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무심코 벽을 쳤는데 그곳이 무너지면서 동굴이 나타난 것이다.
횃불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리로 가보니 조금 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인공적인 흔적은 전혀 없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었다.
여기저기 횃불을 들이대자 벽에 긁힌 자국이 많이 보였다. 뭔가 싶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검에 의해 생긴 자국들이었다.
‘검에 의해 이렇게 깊이 파일 수도 있나? 게다가 이건…….’
너무나 깔끔했다. 검이 적어도 반자는 들어가서 헤집고 다닌 것 같았는데, 그런 것치고는 검흔이 너무나 깨끗했다.
저 정도로 깊이 박혀서 검이 헤집고 다녔다면 벽이 무너져야 정상이다. 그렇지 않다는 건 그만큼 검법이 고명하다는 뜻이다.
적운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과연 여기서 검을 휘두른다면 저런 자국을 낼 수 있을 것인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물론 내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검을 휘두르면, 저렇게 반자 가까이 검신을 박아 넣을 수는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휘두르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벽이 부서지지 않게 저렇게 깔끔한 흔적을 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해낸 거지?’
이곳은 형산파의 장문인들이 죽음을 예감하고 말년에 들어와서 숨을 거두는 장소였다. 그러니 아마 형산파의 전대 장문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적운상이 그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심상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냈다.
가상의 적운상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이 벽을 긋고 지나갔다. 그러자 흙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벽이 무너져 내렸다.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적운상은 심상수련을 계속 했다. 몇 번이나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벽에 나 있는 검흔과 같은 흔적을 남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 * *
며칠이 지났을까?
적운상은 알지 못했다. 얼마나 굶었을까?
그것도 알지 못했다. 적운상이 아는 건 자신이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몇천 번, 몇만 번을 휘둘렀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벽에 나 있는 검흔과 같은 흔적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불가능한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적운상의 심상이 깨졌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런 흔적이 어떻게 남아 있겠는가?
쾌, 중, 변, 그 이외에 또 뭐가 있는 걸까?
노력?
아니었다. 그렇다면 재능?
그것도 아니었다. 적운상은 심검의 경지를 깨달을 때를 곰곰이 되새겼다. 심검을 깨달았을 때는 뭐든지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하는 순간 이미 상대를 베고 있었다. 혈불을 상대했을 때 실제로 그랬었다. 그럴 수 있다는 걸 자신은 어떻게 안 것일까?
앎?
적운상은 그 한 글자를 생각하자 머릿속이 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앎이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랬기에 그런 느낌이 들고, 그랬기에 벨 수가 있었다.
적운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을 봤다.
쉭!
적운상이 검을 뽑음과 동시에 벽이 크게 일자로 갈라졌다. 반자의 깊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한 자 정도는 되는 깊이였다. 그런데도 벽에서는 부스러기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검이 베고 지나간 그 부분만 깔끔하게 없어졌다. 심상이 사라지고 원래의 벽이 나타났다.
적운상이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까지 적운상은 심검의 초입을 넘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심검을 완전히 깨우친 상태였다.
이제는 나갈 때가 됐다. 더 이상 이곳에서 수련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 * *
이른 아침 형산파의 연무장에서는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힘찬 기합을 지르며 아침 수련을 하고 있었다.
“패악룡! 힘을 좀 더 빼! 힘만으로 휘두르면 안 된다고 했잖아!”
“네! 대사형!”
막정위에게 지적을 받은 패악룡이 다시 풍뢰십삼식의 초식을 펼쳤다. 그는 이제 눈을 감고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풍뢰십삼식을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였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이 년이 넘게 풍뢰십삼식만 익히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막정위는 계속 풍뢰십삼식만 반복 수련시켰다.
그게 패악룡은 내심 불만이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모를 막정위가 아니었다.
“모두 멈춰!”
막정위가 크게 소리치자 모두 동작을 멈췄다.
“너희들은 왜 내가 계속 풍뢰십삼식만 가르치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는 것 같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칼만 휘두른다고 수련이 아니야.”
“하지만 대사형! 풍뢰십삼식은 이미 모두가 완벽히 익히고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하는 말에 막정위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방금 완벽히라고 했냐?”
“네? 네.”
“일단 봐라.”
막정위가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의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풍뢰십삼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막정위의 풍뢰십삼식은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마치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봤냐?”
“…….”
대답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뭘 봤냐고 하는 건지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다시 봐!”
막정위가 다시 풍뢰십삼식을 펼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두들 눈을 부릅뜨고 쳐다봤다. 뭐를 보라고 하는 건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봤냐?”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막정위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크게 소리쳤다.
“눈 똑똑히 뜨고 다시 봐!”
막정위가 다시 한 번 풍뢰십삼식을 펼쳤다. 도대체 뭘 보라고 그러는 건지 모두들 이유를 몰랐다. 그러다 가장 먼저 그걸 찾아낸 것은 장동오였다.
“어?”
“왜?”
“뭔가 찾았어?”
“네… 그게…….”
장동오가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풍뢰십삼식을 모두 펼친 막정위가 모두를 보며 똑같은 걸 물었다.
“봤냐?”
“저기…….”
“뭐냐? 본 게 있으면 말해봐.”
“제가 아니라 동오가 봤다는데요.”
“하하하하.”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장동오. 네가 본 걸 말해봐.”
“네. 대사형이 펼친 동작이 모두 똑같은 것 같습니다.”
똑같다?
같은 초식을 펼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장동오는 왜 그걸 이야기한 걸까?
그런데도 막정위는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봤구나. 아까 너희들 모두가 풍뢰십삼식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다고 했지? 아니다. 너희가 펼치는 풍뢰십삼식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 증거로 같은 자리에서 풍뢰십삼식을 펼쳐봐. 펼칠 때마다 보폭이 달라 디딘 자리가 다르고 칼이 휘두른 자리도 다를걸.”
막정위의 말에 사람들이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뭐냐?”
“사람이 하는데 어떻게 완벽하게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방금 너희들한테 보여준 거야. 다시 한 번 해볼 테니까 눈을 크게 뜨고 잘 봐.”
막정위는 같은 자리에서 풍뢰십삼식을 연이어 두 번이나 펼쳤다. 그걸 보고 모두들 그제야 깨닫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