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39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39화
139화. 버린 만큼 얻는다 (1)
기적이란 게 있을까?
있다. 적운상을 업은 백수연과 한쪽 다리를 다친 백리난수가 혈마승들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살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끈질기게 따라오는 혈마승들을 상대로 시간을 벌기 위해 구혁상이 죽고 백염쌍노도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마승들에게 다시 따라잡혔을 때는 두 사람 다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마침 사자왕과 함께 양추위, 백묘묘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렇게 됐을 것이다.
그들과는 중간에 헤어졌었지만 양쪽 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만난 것이다. 한바탕 접전이 일었다. 사자왕과 양추위가 혈마승들을 상대하며 여자들을 먼저 보냈다. 그 와중에 양추위가 죽었다.
남은 건 사자왕뿐이었다. 사자왕은 많이 지쳤는데도 혈마승들을 상대로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오히려 혈마승들이 겁을 먹고 물러났다.
그러나 뒤이어 온 혈마승들이 합세하면서 수가 늘자 아무리 무공이 강한 사자왕이라도 혼자서 그들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사자왕이 괴성을 지르면서 날뛰기 시작하자 그때부터는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었다. 사람과 맹수의 싸움이었다. 그 격렬하고 잔혹하면서도 처절한 싸움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사자왕은 상처 입은 맹수였다. 그 맹수를 상대하는 혈마승들의 팔다리가 뜯겨 나가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고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동안 숨겨왔던 사자왕의 진정한 실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명성이 신강에서 중원까지 알려진 진정한 이유를 혈마승들은 죽음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 * *
사자왕이 싸우는 동안 백수연과 백묘묘, 그리고 백리난수는 무사히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마을에 도착하자 의원부터 찾아갔다. 의원이 적운상을 보고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그의 실력으로는 살릴 길이 없었다.
“외상은 치료가 가능하지만 내상은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요?”
“네?”
백수연이 묻는 말을 의원이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봤다.
“당신보다 의술이 뛰어나면 가능하겠죠?”
“그, 그거야…….”
의원은 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백수연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예 가망이 없다면 저렇게 우물쭈물하지 않고 바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아직은 살릴 가망이 있다는 뜻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죠?”
상처를 치료하고 옷을 갈아입은 백리난수가 다가오며 물었다.
“천응방으로 돌아갈 거예요. 거기로 가면 적 동생을 살릴 방법이 있을 거예요.”
“언니, 다른 사람들은? 혁 공자나 서린이는…….”
“지금 그들을 어떻게 하자고? 우리 앞가림도 힘든 상황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백묘묘가 힘없이 말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백수연이 조금 냉정한 면이 있는 반면에 백묘묘는 정이 많았다.
백수연이 어깨가 축 처져 있는 백묘묘를 다독여줬다.
“걱정 마. 혁무한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야. 무당십걸인 운학진인도 같이 갔잖아. 무사할 거야.”
“응.”
“후우… 우선 아버님께 연락을 해야겠어.”
백수연은 사람을 한 명 사서 천응방으로 서찰을 보냈다. 그리고 마차를 하나 구해서 적운상을 조심스럽게 태웠다. 갈 곳이 없는 백리난수가 머뭇거리자 백수연이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가요.”
“고마워요. 당분간만 신세를 질게요.”
“얼마든지요.”
백수연은 관도를 따라 마차를 몰았다. 혹시나 혈마승들이 다시 쫓아올까 봐 불안한 마음에 쉬지 않고 밤낮으로 달렸다. 쉴 때는 말이 지쳐서 바꿔야 할 때뿐이었다. 그렇게 삼 일을 넘게 움직였을 때였다.
두두두두두두!
넓은 관도 맞은편에서 흙먼지가 일면서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천응방이었다. 백수연의 서찰을 받고 마중을 나온 것이다.
“수연아! 묘묘야!”
풍채 좋은 장년사내가 두 사람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청색의 비단 장포를 입고 한눈에 보기에도 보검으로 보이는 장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그는 천응방의 방주 백태정이었다.
“아버님!”
“아버지!”
“그래.”
백태정이 말에서 내려 달려가자 백묘묘가 마차에서 뛰어내려 품에 안겼다.
“고생 많았다.”
“아버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어요.”
백태정은 이런 때에도 예의를 지키면서 저리 말하는 백수연이 조금 서운했다. 백묘묘처럼 달려와서 안기면 얼마나 예쁜가?
“꼴이 말이 아니구나. 그러기에 내가 그리 말렸거늘.”
“심려 끼쳐서 죄송해요.”
“아니다. 무사하니 됐다.”
“아가씨!”
“괜찮으신 겁니까?”
천응방의 무사들이 앞 다투어 백수연과 백묘묘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마차에 있던 백리난수는 그런 천응방 사람들을 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백리세가가 건재했다면 그녀도 저랬으리라.
“나는 괜찮아. 의원은?”
“네? 아, 호 의원이 직접 왔습니다. 호 의원님!”
“여기 있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말을 몰아 앞으로 왔다. 호 의원은 장사에서 유명한 명의였다.
“호 할아버지.”
백수연이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서찰에 의원을 데리고 나와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백태정은 백수연이나 백묘묘가 크게 다친 줄 알았다. 그래서 장사에서 제일 유명한 호 의원과 함께 온 것이다.
“에휴… 방주님이 어찌나 빨리 가자고 성화인지 팔다리가 다 쑤시는구나.”
“수고하셨어요.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환자가 있어요.”
백수연이 다급하니 호 의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모두가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누가 다쳤기에 늘 침착한 백수연이 저런단 말인가?
백태정이 같이 가서 마차 안을 보니 적운상이 엉망인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저자는…….”
“호 할아버지, 어서 상처를 봐주세요.”
“알았다. 잠시 기다리어라.”
호 의원이 적운상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다 심각한 얼굴을 했다.
“좋지 않구나.”
“살 수 있나요?”
“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아직 늦지는 않았다.”
역시 사천의 성도에서 명성을 떨치는 의원다웠다. 작은 마을의 의원과는 달랐다.
“아!”
백수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백태정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저놈과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수연이가 저러는 거지?’
“험! 수연아.”
“네, 아버님. 잠시만요. 호 할아버지, 그럼 어서 치료를 해주세요.”
“여기서는 무리다. 일단 응급처치를 하고 천응방으로 가자꾸나. 방주님 때문에 약재도 거기에 잔뜩 가져다놓았다.”
“네. 어서 가요.”
“수연아.”
“네, 아버님. 가면서 이야기해요.”
백수연이 다급하니 서두르면서 건성으로 하는 말에 백태정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딸자식은 키워놓아도 소용없다고들 할 때 백태정은 웃었었다. 백묘묘라면 몰라도 백수연은 절대로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백수연이 먼저 저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서운함이 파도치듯이 팍팍 밀려왔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색도 할 수가 없었다.
* * *
“음…….”
“어때요? 호 할아버지.”
백수연의 말에 호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외상이나 내상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충분히 치료할 수가 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건가요?”
“그래. 정신만 돌아온다면 치료는 문제가 없을 거다.”
호 의원의 말에 백수연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백리난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 동생은 강해요. 분명 다시 정신을 차릴 거예요.”
“그래. 그럴 거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안 돼요! 아직 정신을 차린 건 아니잖아요.”
“허 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어. 이제 나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니까 그러네.”
“그래도 안 돼요.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데 호 할아버지가 옆에 있어야죠.”
“그럼 의원은 누가 보냐? 내가 너한테 잡혀서 여기에 있는 게 벌써 며칠째인 줄 아느냐?”
“여기에 있으면 편하고 좋죠. 뭐. 이럴 때 좀 쉬세요.”
“그러다 의원 망하면 네가 책임질 테냐?”
“그럴게요. 이 기회에 아예 천응방으로 들어오세요.”
“끙. 됐다. 소귀에 경 읽기지. 깨면 연락 주거라.”
“네. 알았어요.”
호 의원이 혀를 차며 밖으로 나갔다. 그를 배웅한 백수연이 방으로 돌아와서 걱정 가득한 눈으로 적운상을 봤다. 그걸 보고 백리난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백리난수와 백수연은 그동안 친분이 쌓여서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걱정 마세요. 금방 일어날 거예요. 강한 사람이잖아요.”
“응. 알고 있어.”
“오늘 통천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다. 깜빡 잊고 있었어.”
“여기는 제가 있을 테니까 갔다 오세요.”
“후우… 그래야겠어. 그럼 부탁해.”
“네. 걱정 마세요.”
백수연은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간에 있었던 일을 정의회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백수연이 방을 나가자 백리난수가 적운상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할 일이 있었다. 백리세가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런데 적운상을 보고 있으면 그걸 자꾸 잊게 된다.
지금도 이곳에 이렇게 있을 이유가 없었다. 천마총의 보물을 찾아서 백리세가를 재건하려는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거기다 백염쌍노까지 죽었다. 그러니 혼자서라도 다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백리난수는 적운상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하아…….”
백리난수가 다시 한숨을 내쉬다가 흠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적운상이 눈을 뜨고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적 오라버니!”
“…….”
백리난수가 기쁜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며 적운상을 꽉 껴안았다.
“이제야 깨어났군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
“적 오라버니.”
백리난수가 고개를 들어 적운상을 봤다. 뭔가가 이상했다. 적운상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마치 죽은 사람의 눈 같았다.
“오라버니.”
다시 불러봤지만 적운상은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언니! 언니!”
백리난수가 다급하니 방을 뛰어나가며 백수연을 불렀다. 백수연은 그때 외출 준비를 다 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언니!”
“왜? 혹시 적 동생이 깨어났어?”
“네. 방금 눈 떴어요. 그런데…….”
백리난수가 상태를 자세히 말하기도 전에 백수연은 적운상의 방으로 달려갔다.
“깼어? 아!”
침상에 누워 있던 적운상이 고개를 돌려 백수연을 봤다.
“깼구나.”
백수연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적운상에게 다가갔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
잠시 후, 백리난수가 호 의원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정신을 차렸군.”
호 의원이 적운상에게 다가가서 진맥을 했다. 그리고 멍한 눈을 한 번 까뒤집어 보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 말이 들리는가?”
“…….”
적운상은 멍하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죠?”
“눈은 떴지만 정신이 혼미한 상태인 것 같군. 잠시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질 게야.”
“정말인가요?”
“정말이니 안심해도 된다.”
“정말 감사드려요, 호 의원님.”
“허허. 그래. 이제야 나도 좀 편하겠구나.”
호 의원이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이 지나자 호 의원의 말대로 적운상은 상태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맘때쯤 운학과 혁무한, 은서린이 돌아왔다.
운학과 혁무한은 백수연에게 그간의 일을 듣고 착잡한 기분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은서린은 구혁상이 죽었다는 말에 아니라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러다 좀 진정이 되자 적운상을 보러 왔다.
“사형. 저예요. 서린이.”
적운상이 멍한 눈으로 은서린을 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은서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적운상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멍하니 아무 생각도 못하는 사람 같았다.
사지에서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는데도 저런 반응이라니, 예전의 적운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어떤 상황, 어떤 때에도 사람을 찍어 누르는 박력을 보였건만 지금은 너무나 작고 초라해 보였다.
“사형… 가요. 이제 형산파로 돌아가요.”
은서린이 적운상의 손을 잡고 다독이며 말했다. 그런 은서린의 표정에는 슬픔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