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31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31화
131화. 주양악의 기연 (3)
“극락왕생. 감히 혈불님께 무례한 언동을 한 대가다.”
혈불!
혈불이 누구던가?
혈불은 혈마사의 주인이자 수천 명에 달하는 혈마승들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지금껏 수없이 혈마사가 출현했었지만 혈불이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호남의 모든 문파들이 손을 잡고 혈마사와 대적해도 그들을 뿌리 뽑지 못한 이유가 그래서였다. 그런데 그 혈불이 나타난 것이다.
“어? 숨어! 숨어!”
문방사우를 사서 나오던 백묘묘가 다급하게 주양악을 다시 안으로 밀었다.
“왜 그래?”
“쉿!”
백묘묘가 슬쩍 밖을 봤다. 가마를 멘 혈마승들이 극락왕생을 외치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혈마승이잖아!”
주양악이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가마를 타고 오는 것을 보니까 혈마사에서도 지위가 높은 사람일 거야.”
“천마총으로 가는 건가?”
“응. 그럴 거야.”
“빨리 가자. 사형이 위험할 수도 있어.”
“기다려. 저들이 간 후에 움직여야지.”
“알고 있어.”
두 사람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데 저만치 가던 혈마승 일행이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혈불이시여.”
네 명의 호법 중 첫 번째인 일호법이 가마로 다가와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근천에서 천마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조용하지만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가마에서 흘러나왔다.
“천마라면… 배화교의 무리가 근처에 있다는 이야깁니까?”
일호법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아니다. 이 기운은 천마의 것이로구나.”
“그, 그 사람은 몇 세대 전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못난 것 같으니라고. 내가 환생했듯이, 그도 환생했을 것이다. 찾아라!”
“하지만 저희는 미천하여 천마의 기운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십 장 이내에 있다.”
막연했다. 지금 혈마승들은 대로에 있었다. 십 장 이내라 해도 길 양쪽에 있는 집들과 상점이 더러 포함이 된다.
하지만 말을 한 이가 누구던가?
혈불이었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라 해도 따라야 했다.
“명을 받듭니다.”
일호법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주위의 혈마승들을 향해 소리쳤다.
“십 장 이내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여라! 수상한 자가 있으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명을 받듭니다.”
가마를 메고 있는 열여섯 명의 혈마승들과 네 명의 호법들을 제외한 이백여 명의 혈마승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분산했다.
“저, 저것들이 뭐하는 거야?”
“몰라 나도, 일단 튀어!”
주양악과 백묘묘가 다급하게 상점 안으로 들어가서 후문으로 달려 나갔다.
“빨리! 이쪽이야!”
“알아! 어서 가! 어서!”
골목에 세워놓은 대나무들과 잡다하게 늘어놓은 것들을 마구 밀치면서 두 사람은 정신없이 달렸다.
“으아아악!”
“아아아악!”
갑자기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사람들을 죽이고 있나 봐.”
주양악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백묘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딜 가? 혼자 가서 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나도 마음이 안 편해! 하지만 지금은 도망가야 해. 혈마승들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
“알았어. 가자.”
힘없는 정의는 만용일 뿐이었다. 언젠가 적운상이 해줬던 말이었다. 주양악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찜찜함을 남겨둔 채, 필사적으로 경공을 펼쳤다.
* * *
“오… 왔느냐?”
“네. 사숙조님.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주양악은 백묘묘와 함께 마을에 갔을 때 봤던 혈마승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구혁상의 미간이 좁혀지며 얼굴이 심각하니 굳었다.
“그들이 가마를 들고 있다 했느냐?”
“네. 굉장히 큰 가마였어요.”
“음… 그런 것으로 봐서 아마도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 왔나 보구나.”
“어쩌죠? 사형이 위험하지 않을까요?”
“맞아요. 아까 우리가 왔을 때도 혈마승들이 굉장히 많았었잖아요.”
“그 동굴의 입구 쪽으로도 가봤느냐?”
“아니요. 혹시나 혈마승들이 남아 있을까 봐 돌아서 내려갔어요.”
주양악의 대답에 구혁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잘했다. 운상이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자꾸나. 그들이 이곳을 발견하면 그것이 더 큰일이다. 빨리 벽에 있는 것을 필사하고 모두 지워야 한다.”
“하지만 사숙조님…….”
“괜찮다. 양악아. 운상이가 어떤 녀석이냐? 나와 함께 새외를 돌며 그 고생을 했어도 아직까지 살아 있지 않느냐? 걱정 없을게다. 더구나 무당파의 무당십걸과 사자왕도 함께 있지 않으냐? 정 걱정이 된다면 여기 일을 빨리 끝내고 한 번 가보자꾸나.”
“네!”
그때부터 네 사람은 벽에 있는 무공비급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그걸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
“후우… 이제 다 끝났어요.”
은서린이 한숨을 내쉬며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그녀의 코와 손에는 먹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럼 이제 이걸 지워야겠구나.”
“어떻게 지우죠?”
“주위에 떨어진 무기로 지우면 될 게다.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멀쩡한 걸 보면, 백련정강이나 만년한철로 만든 무기들일 게다.”
“정말이요?”
백련정강이나 만년한철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쇠였다. 그런 쇠로 만들어진 무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의 날카로움이 없어도 쇠가 워낙에 단단해서 뭘 만들든지 보물로 취급됐다.
은서린이 장검 하나를 주워 와서 벽을 향해 휘둘렀다.
파각!
벽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와아아… 정말이에요. 사숙조님.”
“그래. 어서 지우자꾸나.”
“어디 나도.”
주양악과 백묘묘도 땅에 떨어진 무기를 찾느라 눈에 불을 켰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골라 와서 휘둘러봤다.
파각! 팍!
“이거 정말 좋은 검 같아.”
“그러게.”
“그런데 이렇게 해서 언제 이걸 다 지우지?”
백묘묘의 말에 주양악이 벽을 봤다. 검이 날카로워서 벽이 팍팍 파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차라리 돌멩이를 들고 문지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음… 그러지 말고 사저가 한 번 쳐보는 게 어때요?”
“뭐?”
“사저는 내공이 굉장히 강해졌잖아요. 그러니까 사저가 벽을 부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어요.”
“후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한번 해보아라.”
구혁상까지 그리 말하자 주양악이 어쩔 수 없이 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내공을 끌어올리자 화룡의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주양악은 몸이 후끈하며 달아오르는 느낌에 당황하면서 양손을 쭉 뻗어냈다.
텅! 콰아아아아앙!
꾸르르르르릉!
“꺄아악!”
“헉!”
동굴이 무너질 것같이 진동을 하자 은서린과 백묘묘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구혁상도 여차하면 밖으로 뛰어나가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다행히 더 이상의 진동은 없었다.
“후우…….”
구혁상이 크게 한숨을 내쉬는데 은서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사숙조님…….”
“왜 그러느냐?”
은서린은 대답대신 방금 주양악이 후려친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헉!”
구혁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벽이 주양악으로 인해 커다란 원형으로 움푹 파여 있었다. 그곳에 적혀 있던 무공비급은 더 이상 형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양악도 설마 이렇게까지 엄청난 위력을 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손바닥 자국이나 남겠거니 했었다.
“양악아.”
“네. 사숙조님.”
“방금 전력을 다한 거냐?”
“아니요. 가볍게 쳤는데요.”
구혁상은 뭐라 할 말을 잊었다. 은서린과 백묘묘도 기가 막혔다. 가볍게 친 게 저 정도라면, 마음먹고 제대로 쳤을 때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위력이 나온단 말인가?
“허허…….”
구혁상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 * *
“저기… 무겁지 않아요?”
“아니. 괜찮소.”
백리난수는 지금 적운상의 등에 업혀 있었다. 절뚝거리면서 가는 걸 보다 못한 적운상이 등을 내밀었고, 이미 보여줄 거 다 보여주고 입도 맞췄는데 업히는 것이 뭐 대수냐 싶어서 등에 업힌 것이다.
하지만 막상 업히고 나니 여간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하의가 모두 찢겨져 나가서 적운상이 준 상의로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적운상이 그녀를 등에 업으면서 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든 것이다. 옷이 얇아서 마치 맨살을 내맡긴 기분이었다. 거기다 적운상의 등에 가슴까지 밀착이 되니 더욱이 그런 느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적운상 역시 편한 건 아니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가슴의 탄력과 손으로 받쳐 든 엉덩이의 감촉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저기…….”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아까의 일은… 당분간 비밀로 해주세요.”
“알겠소.”
적운상이 너무나 쉽게 대답하자 백리난수는 조금 서운함이 느껴졌다.
“저는 어떻게든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해요. 그래서 일노와 이노의 도움으로 이를 악물며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저야 상관없지만 그 두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백리난수가 애써 변명을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적운상은 예전의 자신이 생각났다. 적운상도 형산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구혁상을 따라다니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때 적운상은 구혁상을 실망시키지 않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했었다. 그래서 백리난수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걱정 마시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소.”
“당신은 처음 봤을 때의 인상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내 인상이 어땠소?”
“잘생기기는 했지만 무서웠어요. 호감이 가면서도 다가가기 힘든 느낌이요.”
“훗!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요.”
“어머, 정말이요?”
“그렇소. 적당히 예쁘면 다가가기가 쉽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그게 쉽지가 않소.”
“그거 칭찬이죠?”
“그럴 거요.”
“아 참, 그리고 보니 일행 중에 굉장히 예쁜 여자가 있지 않았어요?”
“백 누이를 말하는 거요?”
“무슨 관계죠?”
“누이, 동생 하는 관계요.”
“음… 성이 백씨면 혹시 천응방의 백수연인가요?”
“맞소.”
“그랬군요.”
잠시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그러다 백리난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요?”
“없소.”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적운상은 문득 주양악이 생각났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없소.”
“있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오?”
“방금 대답하는 게 조금 늦었잖아요. 그건 누군가를 생각했다는 뜻이에요. 맞죠?”
“하하하.”
“왜 웃죠?”
“재미가 있어서 그렇소. 소저는 백 누이를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군.”
“혹시 백 소저하고… 그… 입을 맞추거나 하지는 않았죠?”
“그렇소만…….”
왜 그런 걸 묻는지 적운상이 잘 모르겠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백리난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훗! 그런데 왜 백 소저는 누이라고 부르고 나는 소저라고 부르는 거죠?”
“그럼 뭐라 불러야 하오?”
“올해 몇 살이죠? 약관은 넘었죠?”
“그렇소.”
“나는 이제 약관이에요. 그러니까 수… 수 매라고 불러요.”
“그러지. 그럼 수 매라고 부르지.”
“그럼 나도 상 오라버니라 부를게요. 아!”
백리난수가 갑자기 신음소리를 내고는 얼굴을 확 붉혔다. 적운상이 몸을 돌리느라 엉덩이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줬기 때문이다.
“쉿! 누가 오고 있소.”
“누구죠?”
그녀의 의문은 곧 풀렸다. 횃불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혈마승들이었다. 그들은 동굴 입구에서 정의회에서 보낸 사람들과 일전을 벌였던 혈마승들이었다. 백오십 명이나 되던 정의회 사람들은 그들에게 패해 대부분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을 갔다. 그리고 저들은 이리로 들어온 것이다.
“꽉 잡아!”
“알았어요.”
적운상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가 힘들었지만 일단은 도망가야 했다. 아까 운기조식을 하기는 했지만 뇌기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부상을 입은 백리난수까지 보호를 하려면 목숨이 두 개라도 힘들었다.
“뭐냐?”
“누가 있다!”
“서라!”
뒤에서 혈마승들이 소리치며 쫓아왔다. 적운상은 사력을 다해 뛰었다. 동굴은 갈수록 좁아지다가 갑자기 탁 트인 넓은 곳이 나타났다.
“헉헉!”
“뭐야?”
“어?”
갑자기 백리난수를 등에 업고 나타난 적운상을 보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