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82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82화
82화. 단서 (1)
동정호(洞庭湖). 중원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로, 그 크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호수 안에 섬이 있음은 물론이고, 호북(湖北)과 호남(湖南)이 동정호를 기준으로 나뉘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단지 크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경치 또한 지극히 뛰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 동정호를 앞에 두고 뒤로는 군산(君山)의 수려한 산세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천하 삼대누각(樓閣) 중 하나인 악양루(岳陽樓)다.
삼 층으로 되어 있는 그곳은 사시사철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어, 예약을 하고 온다 해도 기다려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때? 경치가 좋지?”
“네.”
혁무한이 하는 말에 은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산에만 있다가 이런 곳에 와보니 마치 새로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넘실거리는 동정호의 물결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탁 트였다. 거기에 탁자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어느 요리 하나 맛없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맛이 좀 강한 것이 흠이었다.
방금도 아무 생각 없이 생선요리 하나를 젓가락으로 가득 집어먹었다가 톡 쏘는 맛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훗! 그건 그렇게 먹으면 안 돼.”
“네?”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가끔 술만 한잔씩 마시며 은서린이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혁무한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요리들은 그렇게 많이 집어 먹으면 안 돼. 아주 조금씩, 맛만 보듯이 먹는 거야.”
은서린은 혁무한의 말대로 젓가락으로 아주 조금만 요리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러자 강했던 맛이 적당하니 느껴지면서 요리가 입에서 사르르 녹는 느낌이었다.
“정말이네요.”
“그렇지? 원래 이런 요리들은 부자들이 먹으라고 만들거든. 부자들은 한 끼를 먹어도 많은 요리를 맛보려고 하지. 그러자면 조금씩 먹어야 배가 부르지 않아.”
“아!”
은서린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서민들이 먹는 음식들 중에도 맛이 강해서 적게 맛만 보는 요리들이 많다. 하지만 그건 부자들처럼 하나라도 더 많이 맛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없어서,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은서린은 맛난 요리를 먹으면서 가만히 혁무한을 봤다. 그러자 혁무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순간 은서린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지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십 년 동안이나 적운상을 가슴에 품고 기다려 왔다. 그녀에게 있어서 남자라고는 오로지 적운상뿐이었다. 하지만 임옥군은 적운상을 홍은령과 맺어주려 하고 있었다.
적운상도 금검문과의 관계 때문에 대놓고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적운상이 그녀를 여자로서 보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사실 은서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적운상은 절대로 그녀를 사매 이상으로는 보지 않을 거라는 걸.
그걸 알면서도 적운상을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비록 며칠에 불과했지만 혁무한은 그녀를 여자로서 대해주고 있었다. 진심으로 위해주고 아껴주는 마음이 와 닿았다.
은서린은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처음이었다. 적운상과는 다른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동시에 지금과 같이 약간의 설렘도 주고 있었다.
‘어차피… 설아라는 그 여인 대신이겠지.’
혁무한은 밝게 웃던 은서린이 침울한 얼굴을 하자 적운상 때문에 그런다고 여겼다. 그녀가 저런 얼굴을 할 때는 대부분이 그를 생각할 때였기 때문이다. 은서린이 적운상이 아니라 그 때문에 그런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악양루에서 그렇게 두 사람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도자명은 그 앞의 길가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지루함에 하품만 하고 있었다.
며칠간 계속 두 사람을 몰래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은서린은 납치된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가 않았다. 혁무한은 은서린을 억지로 끌고 다니고는 있었지만, 끔찍하게 위해줬다.
같이 가다가 은서린이 누군가와 몸이라도 슬쩍 부딪치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볼 정도였다. 그러니 도자명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후우… 괜히 따라왔나? 그냥 돌아가는 것이 나으려나?’
도자명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쪽 길가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도자명은 그러잖아도 지루하던 참에 뭔 일인가 싶어서 그쪽으로 가보았다.
사내 둘이 금방이라도 맞붙을 것같이 험악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한 명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빛이 날카로운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커다란 덩치에 중원사람이 아닌 듯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사자왕이었다.
“칼을 뽑아.”
사자왕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와 마주보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리고 신중한 자세로 사자왕에게 겨눴다.
“흐흐. 그래야지.”
사자왕도 칼을 뽑아 들었다. 투박하니 날도 제대로 서 있지 않은 도(刀)였다. 두 사람이 그렇게 무기를 뽑아 들자 사람들이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싸움에 휘말려 화를 당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딱 십 초식만 버텨라.”
“흥! 당신은 상대를 잘못 선택했소.”
“크크크.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보군. 나도 예전에 그랬었지. 하지만 어떤 빌어먹을 놈한테 당한 이후로는 절대로 자만하지 않는다.”
어떤 빌어먹을 놈이란 적운상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검엔 눈이 없으니 죽어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오.”
“거참, 말이 많군. 그놈은 그러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사자왕이 재는 모든 잣대의 기준은 적운상이었다. 그에게 어이없이 패배한 이후로 하도 이를 갈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
“도대체 그놈이 누구요? 누군데 계속 나와 그놈을 비교하는 거요?”
참다못한 사내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 사자왕과 싸운다는 중압감도 만만찮건만 계속 알지도 못하는 어떤 놈과 비교를 당하자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크큭. 내가 때려죽여야 하는 놈이다. 적운상이라는 놈인데 혹시 아나?”
“적운상? 혹시 일검무적(一劒無敵)의 전인(傳人)이라는 적운상을 말하는 거요?”
“뭐? 일검무적?”
일검무적이라면 사자왕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한때 강호를 풍미했던 고수로 그의 일검을 받아낸 사람이 아무 없었다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음… 적운상 그놈이 일검무적의 전인이었나?’
어린 나이에 그렇게 강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형산파가 워낙에 알려지지 않은 문파이다 보니, 모두들 그런 문파에서 적운상 같은 고수를 길러냈다는 것을 쉽게 믿지 못했다.
거기에 그가 일 초식에 통천문의 고수들을 쓰러트리고, 상인연합모임에서 감무식을 역시나 일 초식에 보내 버린 것이 소문나면서, 사실이 와전(訛傳)된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적운상이 일검무적의 전인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의 나이가 어떻게 되나? 생김새는?”
“나이는 약관이라고 들었소. 생김새는 잘 모르지만 풍문에 의하면 서장의 장백운사와 신강의 사자왕을 꺾고 그들의 애병을 보란 듯이 들고 다닌다 들었소.”
사자왕이 아는 그 적운상이 분명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애병인 사자도를 가지고 다닌다면 그가 틀림없었다.
순간 사자왕의 얼굴이 변했다. 그러면서 그의 몸에서 폭풍과 같이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 같은 엄청난 기세에 그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사내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는 처음에 사자왕을 보고 코웃음을 쳤었다.
변방 어딘가에서 왔는지 특이한 옷차림에 지저분한 행색을 보아하니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그가 자꾸 한 번 붙어보자고 시비를 거니 한 수 가르쳐줄 생각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그의 눈앞에 있는 이 촌놈은 생각 외로 너무나 강했다. 이런 기세를 뿜어낼 정도면 그의 말대로 십 초식을 버티기도 힘들 것 같았다.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자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운상이라면… 에이, 설마 그 바보 같은 사형은 아니겠지? 일검무적이라니 말도 안 돼.’
도자명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뭔가 찜찜함이 느껴졌다. 그때 사자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생각을 접고 다시 그쪽을 봤다.
“크크큭. 그놈을 알고 있단 말이지… 그 빌어먹을 놈을 알고 있단 말이지… 드디어 찾았구나. 크크크.”
잔뜩 흥분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는 사자왕의 모습은 누가 봐도 딱 미친놈이었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엄청난 기세만 아니었다면 제대로 미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놈은 어디 있냐?”
“모, 모르오.”
“말하는 게 좋을 텐데. 숨겨도 소용없다.”
“내가 왜 속인단 말이오? 아까도 말했듯이 나도 풍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그를 본 적은 없소.”
“끝까지 숨기려 드는군. 딱 한 번만 더 말하지. 그놈이 있는 곳을 말해. 그럼 목숨만은 살려준다.”
“보지도 않은 그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럼 죽어!”
사자왕이 크게 외치면서 한순간에 그 사내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칼을 사선으로 힘껏 내려쳤다. 사내는 그 공격을 감히 맞받아칠 수가 없었다. 칼이 닿지도 않았는데 풍압에 의해 옷자락이 펄럭거릴 정도니 맞받아치면 칼이고 뭐고 다 부러져나갈 것만 같았다.
사내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눕혔다.
후우웅!
사자왕의 칼이 그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내는 아찔함에 몸을 떨며 저도 모르게 오줌을 지릴 뻔했다.
“흐아아압!”
사자왕이 내려쳤던 칼을 위로 쳐올렸다. 몸을 뒤로 눕혔던 사내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더 뒤로 누웠다. 자연히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웅!
어쨌거나 이번에도 살았다. 하지만 그 다음 공격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있다면…….
후우웅! 캉!
사자왕이 다시 내리친 칼이 방금까지 그가 있던 땅을 쳤다. 상황이 위급해진 사내가 땅을 굴러서 그의 칼을 피했기 때문이다. 당장에 죽게 생겼는데 체면을 차릴 이유가 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사내는 필사적으로 굴렀다. 사자왕이 그런 사내를 쫓아가며 칼을 휘둘렀다. 그걸 보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다 사내가 그들에게 굴러오자 모두들 혼비백산해서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은서린은 그러지 못했다. 마치 눈앞에서 산사태가 난 것처럼 엄청난 기세를 뿜어대며 칼을 휘둘러오는 사자왕을 보고 다리가 굳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위에서 볼걸 괜히 내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기에 무슨 일인가 해서 왔는데 이런 일을 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