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25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3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25화
그녀의 기세가 어찌나 거센지 구양명은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닫았다.
당황한 장천운은 다급히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왜 그러십니까? 변명 좀 해달라니까요.]
구양명은 슬며시 시선을 돌려버렸다.
[했잖은가.]
안 통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어디, 말해 봐! 나한테 불만 있어?”
“없는데요.”
“그런데 왜 새벽에 나가서 술을 마셔? 그것도 몇 병씩이나! 원래 술고래였어?”
“철 선배가 아무 말 안 하셨습니까? 원래 술 마시러 나간 게 아니라…….”
“맞아. 철무 아저씨가 그랬어. 어제 싸운 사람 만나러 갔다고. 근데 술만 잔뜩 퍼마시고 들어와?”
“술만 마신 게 아니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천운이 그 자식한테 당한 줄 알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냐고! 이 멍청아!”
장천운이 다시 뒤를 슬쩍 돌아다보았다.
‘그 자식’의 표정이 묘했다. 꼭 마누라에게 얻어맞고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는 중년의 절절한 표정 같았다.
‘크크크, 그러게 제대로 변명을 해줘야지…….’
하지만 그도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웃음을 참긴 했지만 웃는 모습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사마경이 쌍심지를 켰다.
“웃어? 나는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돌아와서 속이 새카맣게 타고, 송하는 말도 못한 채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웃어? 지금 내 말이 웃긴다, 이거지?”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혹시 저 사람하고 여자가 있는 기루에 가서 술 마신 거 아냐?”
사마경의 상상력이 점점 더 몸집을 키웠다.
“기루에 간 것이 아니라…….”
“그 자식, 만나기는 만났어?”
“만났죠.”
“만났다고? 맞아, 옷 보니까 싸우긴 싸운 것 같네. 그럼 싸움이 끝났으면 빨리 돌아와야 할 것 아냐?”
“그게…… 술을 마시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 몰랐습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해? 술 마시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어!”
“죄송합니다, 소성주.”
“흥! 하여간 남자들이란……!”
끝내 세상의 모든 남자를 싸잡아서 말 한마디로 구덩이에 파묻어버린 그녀는 그제야 구양명을 째려보며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누군데 아침부터 함께 술을 퍼마신 거야?”
장천운이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 말했다.
“구양명 선배입니다.”
“구양…… 누구?”
“새벽에 만나서 저와 한바탕 싸운 분요. 객잔에서 여태 저와 함께 술을 퍼마신 분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 자식’이기도 하다.
“…….”
사마경의 눈이 한껏 커졌다. 그러잖아도 큰 눈이 커지자 얼굴의 반은 눈이 차지한 듯했다.
한쪽에서 조마조마하게 쳐다보던 연송하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사마경 뒤에 서 있던 소연추는 입이 반쯤 벌어졌고, 방 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구산과 진구는 ‘그 자식!’의 정체를 알고 턱이 빠질까 걱정될 정도로 입을 떡 벌렸다.
장천운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사마경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은근히 고소했다.
“구양 대협과 대결을 마친 후 이야기 좀 나눌 게 있어서 술을 한잔 하다 보니 조금 늦었던 겁니다.”
그러나 사마경의 순발력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눈을 치켜 뜬 그녀는 거꾸로 장천운을 다그쳤다.
“그럼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어!”
말하려고 할 때 막은 사람이 누군데?
“나 놀리려고 그랬던 거야? 어?”
“제가 어찌 소성주를…….”
“놀리려고 그런 게 아니면, 처음 들어올 때 바로 소개를 해줬어야 할 것 아냐!”
그게 그렇게 되나?
“누가 저 모습 보고 천한마검 구양 대협이라고 생각하겠어? 안 그래?”
한바탕 장천운을 맹렬하게 질타한 사마경이 다시 구양염을 바라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정말 반가워요, 구양 대협.”
목소리도 꿀처럼 달콤했다. 천하의 천한마검 구양염이 입도 제대로 벙긋하지 못할 정도로.
“천운이 실수하는 바람에 제가 그만 실례를 범한 것 같네요.”
빙긋 웃으며 포권을 취하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마력적이었다.
풍진강호를 이십 년 동안 종횡한 구양명도 천하에 이런 여인이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구양명이오, 소성주. 대협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소. 강호의 친구들이 들으면 코웃음 칠 거요.”
‘그 자식’이라고 했던 말은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져버렸다. 그저 사마경의 웃음을 볼 때마다 황홀했다.
그리고 사마경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소연추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한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이상하게 답답해졌다.
저 여인은 누굴까? 누군데 자신의 가슴을 이렇게 뜨겁게 달구는 걸까?
팔이 하나 안 보이는 걸 보니 이상하게 가슴이 아릿해졌다.
‘도대체 어쩌다가……!’
그 와중에도 사마경은 미소 띤 표정으로 이것저것 물었다.
“잘 오셨어요. 술은 즐겁게 드셨나요?”
“하, 하, 하. 예, 즐겁게 마셨소이다.”
“혹시라도 천운이 실례를 범하진 않았나요? 그런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어요.”
“특별히 말씀드릴 일은 없소이다. 오히려 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이렇게 환대해주니 고마울 뿐이오.”
옆에서 바라보던 장천운은 사마경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가 구양명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한 듯했다.
천한마검 구양명이 사마경에게 완전히 넘어가버렸다는 사실.
진정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양반, 내상이 심한 상태일 텐데, 괜찮나?’
웃는 걸 보면 큰 이상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구양명은 넋이 반쯤 빠져서 깜박 잊고 있었다.
자신의 내상이 제법 심하다는 걸.
사마경이 그 점을 일깨워주었다.
“천운의 검이 조금 거칠었을 텐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윽!’
구양명은 그제야 자신이 내상을 입었다는 걸 인지하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표를 내지 않았다.
“하, 하, 하. 견딜 만하오.”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
북풍한설이 부는 겨울과 싱그러운 바람이 부는 봄이 단 일각 만에 오갔다.
겨우겨우 상황을 무마한 장천운은 구양명과 함께 사마경의 방을 나왔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흑월대 대원들이 몰려들었다.
모두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난 어디서 지내면 되나? 일단 운기요상부터 해야 할 것 같군.”
구양명이 창백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장천운은 몰려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막소광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저기 막 형 방에서 지내시죠. 그 방에 침상이 남았을 겁니다.”
막소광의 방은 사인실인데, 그와 등평만 썼가 때문에 침상이 두 개 남았다. 막소광의 인상 때문에 사람들이 기피한 탓이다.
구양명이 슬쩍 막소광을 일견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인상을 보니 저 친구의 방이 조용할 것 같군.”
‘씨바, 내 인상이 어때서…….’
막소광은 기분이 상했지만 겉으로 표출시키진 않았다.
상대는 천한마검이다. 그가 아무리 무시무시한 인상을 지녔다 해도 인상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자.
‘내 더러워서…….’
그때 사마경의 방 쪽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운! 곧 간부회의 할 거니까, 빨리 입 헹구고 옷 갈아입어!”
옷이야 여분이 있으니 갈아입으면 되었다. 얼굴도 씻고 머리도 쓸어 올리면 그럭저럭 어제 모습은 나왔다.
술기운도 일각 만에 운공조식으로 주기를 몰아냈다.
다만 냄새만큼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단내가 훅훅 쏟아졌다.
그런데 연송하가 사발을 들고 그의 방을 찾아왔다.
“이걸로 입안도 헹구고 반쯤은 마셔요.”
장천운은 뭔가가 가득 찬 사발을 보고 흠칫했다. 그 동안은 사발을 워낙 많이 봐서 괜찮았다 싶었는데, 약 냄새가 나는 사발을 보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뭐지?”
“계피하고 감초를 넣어서 끓인 물이에요. 입 냄새 없애는데 좋데요.”
“그래?”
장천운은 연송하가 말한 대로 반으로는 입안을 헹구고 반은 천천히 마셨다.
계피향 때문인지 몰라도 입안에서 풍기던 술냄새가 약해진 듯했다.
“흠, 정말 개운한 것 같은데?”
“다행이네요.”
입을 삐죽이며 말한 연송하가 사발을 들고 돌아섰다.
장천운이 그녀의 등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고맙다, 송하야.”
두어 걸음 옮기던 연송하가 움찔했다. 하지만 곧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방을 나갈 즈음 반쯤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난…… 오빠를 믿어요. 하지만 다시는 걱정하게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렵게 ‘오빠’라는 단어를 내뱉은 그녀는 고개를 쓴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갔다.
‘그래, 오빠만 해도 어디야? 내 주제에 언감생심이지.’
괜히 슬펐다.
그런데 눈물은 또 왜 나오는 거야? 창피하게.
소매로 물기를 찍어낸 연송하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간부회의는 북풍객잔 이층에의 대연회실에서 진행되었다.
머리 위에 만근 바위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분위기가 무척 무거웠다.
그때까지도 간부들은 장천운이 구양명과 싸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흑월대원들에게 단단히 입조심하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그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것이다.
북풍객잔에 머물던 몇몇 간부는 장천운이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이상 술을 마신 것만으로는 뭐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더구나 지금은 전쟁을 앞둔 상황. 그딴 일은 이야기꺼리도 되지 않았다.
“오늘 천은방을 치는 일은 무리일 것 같소, 소성주.”
혁련광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혼단주 진강도 그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저들의 전력을 정확히 알고 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 같소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장로 마동곽이 큰소리로 주장을 펼쳤다.
“천은방과 사절방이 뭐가 두려워서 공격을 미룬단 말이오? 계획대로 오늘 칩시다!”
대원들을 많이 잃은 절검당주 손득환도 이를 갈며 동조했다.
“여기서 머뭇거린다면 강호의 친구들이 우릴 비웃을 거요! 구천성이 언제부터 남의 눈치를 봤단 말입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백리호가 넌지시 몇 마디 보탰다.
“여기서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도 옳진 않은 것 같소, 소성주. 일단 당하 쪽으로 이동해서 천은방과 사절방의 움직임을 살펴본 후 결정을 내리면 어떻겠소?”
어제였다면 사마경도 고려해봤을 의견이다. 그러나 장천운으로부터 구양명의 말을 전해들은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천은방과 사절방이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자신들이 모르는 또 다른 뭔가가 있다는 뜻.
멋모르고 움직였다가는 음모자의 간계에 휘말려들 공산이 컸다.
“오늘은 적의 전력을 파악하는 일에 주력할 거예요. 모두 그렇게 알고 무사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단속해 주세요.”
“소성주, 절검당 무사 수십 명이 사절방 놈들에게 죽었소이다! 그런데 보고만 있겠다는 것이오?”
“저 역시 무사들의 죽음 때문에 가슴이 무척 아파요. 그들의 복수는 그 몇 배로 해줄 작정이에요.”
“복수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올씨다!”
손득환이 불만 가득한 투로 말하자 사마경의 눈빛이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