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30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30화
30화. 조우(遭遇) (2)
임옥군의 거처에서 산 뒤쪽으로 이어져 있는 비밀통로는, 역대의 장문인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피신을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주양악이나 은서린, 그리고 쌍둥이는 이런 통로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늘 처음 안 것이다.
“적 사형이 무사할까요?”
은서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두운 동굴을 횃불에 의지한 채 따라가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같은 것을 물었다.
“사매! 이제 그만 좀 해! 도대체 몇 번을 묻는 거야?”
주양악이 결국 짜증을 냈다. 그러자 은서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냥 걱정이 돼서…….”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 그 인간이 쉽게 죽을 거 같아! 수련할 때 사람 찍어 누르는 그 박력 몰라? 아까 보니까 그 자식들도 쫄아서 칼도 제대로 못 들고 서 있더라.”
“킥!”
주양악이 하는 말에 나연란이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요, 은 사저. 아까 봤잖아요. 적 사형은 정말 강해요. 나도 꼭 그렇게 될 거예요.”
나연오가 눈을 빛내면서 주먹을 두어 번 휘둘렀다. 그러다 맨 뒤에 오는 구혁상을 보고 물었다.
“사숙조님.”
“왜 그러느냐?”
“적 사형은 사숙조님한테 배워서 그렇게 강한 거죠?”
“응? 뭐, 그렇지.”
“그럼 저도 가르쳐 주세요.”
“허! 너는 나보다 운상이에게 배우는 게 더 낫다.”
“그러지 마시고요! 네?”
나연오가 딱 붙어서 조르자 구혁상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동안 늘 혼자였다가 적운상과 지내면서 사람과 같이 지낸다는 것이 어떤 건지를 깨달은 그였다. 나연오가 친근하게 굴자 마치 손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오야, 사숙조님에게 무슨 버릇이냐?”
횃불을 들고 앞장서서 가던 임옥군이 나무라자, 나연오가 풀죽은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그걸 보고 구혁상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나가면 수련하는 것을 좀 봐주마.”
“정말이요?”
“허허. 내가 널 두고 빈말을 하겠느냐?”
“와아… 사부님, 빨리 가요. 빨리.”
나연오는 신이 나서 임옥군을 재촉했다. 동굴은 상당히 길었다. 게다가 어두워서 조심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일행이 동굴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는 시간이 상당이 흘러 있었다.
임옥군이 횃불을 바닥에 비벼서 끄고는 초사영에게 말했다.
“정위는 좀 어떠냐? 이리 내려놓아라.”
“네, 사부님.”
임옥군이 막정위의 상처를 살폈다. 구혁상의 응급처치가 좋아서 출혈은 멎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걱정이군요.”
“큰 이상은 없으니 곧 정신을 차릴 게다. 그보다 이제부터가 문제구나.”
“음… 운상이는 비밀통로를 모릅니다.”
“그렇겠지. 아마 곧바로 산을 내려갔을 게다.”
“그럼 사숙도 사영이와 함께 움직이십시오. 저희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분간 조사묘에서 머물겠습니다.”
조사묘는 형산파를 창시한 조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작은 폭포가 있는데, 그 뒤에 있는 동굴이라서 웬만해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역대의 장문인들은 죽을 때가 되면 항상 그 동굴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다른 곳에서 죽더라도 그곳에 유골을 안장했다. 그러니 조사묘라기보다는 장문인들의 묘라고 하는 것이 더 옳았다.
“알겠다. 중간에 사영이를 보내 상황을 알리마.”
“네. 조심하십시오, 사숙. 사영이도 각별히 신경 써서 움직여야 한다.”
“네, 사부님.”
임옥군이 막정위를 업고 앞장서자 주양악과 은서린, 그리고 쌍둥이가 뒤를 따라 산을 올랐다. 그걸 보고 있던 구혁상이 초사영을 봤다.
“우리도 가자꾸나.”
“네, 사숙조님.”
* * *
산을 내려온 적운상은 인근에 있는 가장 큰 객잔으로 향했다. 그런 곳은 으레 세력이 가장 강한 곳이 뒤를 봐주는 법이었다. 이곳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곳은 금벽도문이었다.
구혁상은 혼자서 금벽도문을 치지 말라고 적운상에게 당부를 했었다. 이에 적운상은 그곳에서 금벽도문 놈들을 조금씩 불러내서 처리할 생각이었다.
적운상이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행인들이 그를 보고 슬금슬금 길을 비켜줬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은근히 박력이 느껴지는 적운상이었다.
그런데 옷에 피까지 잔뜩 튀어 있었으니, 모두들 겁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어? 적 오라버니!”
누군가 뾰족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적운상이 고개를 돌려보니 전에 만났던 원릉금검문의 홍은령이었다.
그녀 옆에는 그녀의 오라버니인 홍기우와 호위무사로 보이는 이들 다섯 명이 같이 서 있었다.
“세상에나. 옷이 이게 뭐예요? 어디 다친 거예요?”
홍은령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다가 적운상의 옷에 묻어 있는 피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아니야.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보자.”
적운상이 그냥 가려고 하자 홍은령이 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요.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
“지금 바쁘다니까.”
“저도 바빠요. 원릉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본체만체 하는 게 어디 있어요.”
“어쩌라고?”
적운상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 같은 적운상의 태도에 홍은령은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한 달 전에 적운상과 헤어진 이후로 그녀는 다시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래서인지 뭘 해도 따분하고, 시간이 너무나 더디게 느껴졌다.
그러다 태상문주이자 할아버지인 홍문형이 형산파에 청첩장을 보내려고 하자 그것을 가지고 직접 온 것이다. 당연히 적운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왔건만 이렇게 냉대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적운상은 홍은령이 눈물을 그렁거리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말이 조금 심했어.”
“아니에요. 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다시 보는군요.”
홍기우가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네자 적운상도 포권을 취했다.
“무슨 급한 일이 있나 봅니다.”
“그렇소.”
“흐음. 우리는 할아버님의 명으로 형산파로 가는 길입니다.”
홍기우가 하는 말에 적운상은 한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홍문형은 두어 달 뒤에 다시 한 번 만나자는 말을 했었다. 보아하니 그 일 때문에 온 것 같았다.
“지금 머무는 곳이 어디요?”
“형산파가 코앞이라 객잔을 잡지 않았소.”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남악객잔(南嶽客棧)이라는 작은 객잔이 있소. 그곳에서 기다리면 일을 끝낸 후에 찾아가겠소.”
“아! 하지만…….”
홍은령이 아쉬움에 뭐라 하려고 하는데, 홍기우가 그녀를 말리며 적운상에게 포권을 취했다.
“알겠소. 그럼 그곳에서 기다리겠소.”
“그럼.”
적운상이 포권을 하고 휑하니 가버리자 홍은령이 홍기우를 봤다.
“오라버니.”
“됐다. 저리 다급하게 가는 걸 보니 형산파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구나.”
“그럼 더욱이 같이 가야죠.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홍은령이 하는 말에 홍기우는 어이가 없었다. 형산파와 금검문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형산파가 위급하다고 해서 금검문이 도와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홍은령은 당연하다는 듯이 형산파를 도와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함부로 끼어들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몰라요. 도와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죠? 오라버니라면 웬만한 일은 해결할 수 있잖아요. 응? 오라버니.”
홍은령이 애교를 부리면서 부탁을 하자 홍기우의 마음이 약해졌다. 더구나 홍은령은 이러다가 뜻대로 안 되면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리면서 자지러진다. 그러면 그 뒷감당을 하기가 힘들었다.
“후우… 그래, 알았다. 하지만 그의 무공이 뛰어나니 우리가 나설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일단 몰래 뒤를 쫓아가면서 상황을 지켜보자.”
“그가 위험하면 도와줄 거죠?”
“그래.”
“훗! 고마워요.”
홍은령이 홍기우의 팔에 매달리며 환하게 웃었다.
* * *
“사숙조님, 마을 어귀에서 그들을 봤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이야기를 들은 초사영이 구혁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구혁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골목길로 사라지는 몇몇 사내들을 유심히 봤다. 보아하니 금벽도문인 것 같았다.
“빨리 그들을 찾아야겠구나. 가자.”
“네.”
구혁상이 초사영과 마을 어귀로 향하는데, 골목에서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은 구혁상의 예산대로 금벽도문 패거리였다. 어제 초사영이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던 걸 기억한 사내가 있었던 것이다.
“헛!”
초사영이 놀라서 급히 검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자 구혁상이 검을 뽑지 못하게 그의 팔을 잡아 눌렀다.
“기다려라.”
초사영이 의아한 눈으로 구혁상을 봤다. 구혁상은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금벽도문 패거리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아!”
초사영은 그제야 구혁상이 말린 이유를 알았다. 앞에서 화산파의 도사들 여섯 명이 천천히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다가오자 금벽도문 패거리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도사들이 풍겨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화산에서 오신 분들이 아니오?”
구혁상이 도사들에게 다가가 포권을 하며 물었다. 그러자 그들의 인솔자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노도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소. 그대는 누구요?”
“나는 형산파의 구혁상이라 하오.”
“흠.”
형산파라면 노도사도 들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워낙에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형산파와 화산파는 서로 왕래가 없었다.
“무슨 일로 빈도의 발걸음을 세운 것이오?”
보통은 이쪽이 신분을 밝히면 자신도 신분을 밝히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노도사는 당장에 용건부터 물었다.
당연히 구혁상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하지만 구혁상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용건을 이야기했다.
“혹시 일성이라는 젊은 도사를 찾고 있지 않소?”
“응? 일성을 아시오?”
뜻밖에도 구혁상이 일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노도사가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그렇잖아도 노도사 일행은 갑자기 사라진 일성을 찾느라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성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족이라고는 오로지 누이 하나밖에 없었다. 인근을 지나가던 중 잠깐 보고 오겠다고 해서 보냈는데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누이의 집으로 가보니 어제 벌써 돌아간다고 떠났단다. 길이 엇갈렸나 싶어서 마을 밖으로 되돌아 가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이렇게 구혁상을 만난 것이다.
“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들었소.”
“그게 무슨 말이오?”
구혁상은 대답 대신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금벽도문의 패거리들을 봤다. 그러자 노도사는 구혁상이 도움을 대가로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뜻으로 오해를 했다.
“빈도는 화산파의 적우라 하오. 내게 볼일이 있는 것이오?”
노도사가 내공을 실어서 소리치자,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니 사방으로 울렸다. 금벽도문 패거리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금벽도문 패거리들이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서 주춤거리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방금 그가 보여준 내공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화산파였다.
“화산파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당신들을 해칠 마음은 없소. 우리는 저자들만 죽이면 되오.”
제법 강단이 있어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서서 초사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노도사, 아니 적우자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봤다. 그 시선에 사내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물러났다.
“해칠 마음이 없다?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가?”
사내는 그제야 괜히 나서서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들이 화산파 도사들을 어찌해 볼 능력이나 되겠는가?
그런데도 마치 아량을 베푼다는 듯이 말을 했으니, 적우자의 입장에서 보면 무시를 당한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마, 말을 실수했습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사내가 다급하게 포권을 하면서 사과를 했다. 그러나 적우자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이들에게서 들어야 할 말이 있다. 그 후에는 상관을 하지 않을 터이니 기다리든가 아니면 물러가라.”
“아, 알겠습니다.”
사내가 적우자의 눈치를 보며 동료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모두들 우르르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고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적우자의 시야에서만 사라졌을 뿐, 골목과 건물 모퉁이에 숨어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