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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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9화
19화. 귀환 (2)
“술 나왔습니다.”
아까 음식을 놓고 갔던 점소이가 다시 와서 술과 요리를 내려놓았다.
“술은 추가한 적이 없는데.”
적운상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저희 가게에서 가장 비싼 술입니다. 자그마치 오십 년이나 묵힌 거거든요. 요리도 드셔보시면 알겠지만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 시킨 적이 없다니까.”
“알고 있습니다. 이건 모두 저쪽에 계신 분이 대접해 드리라고 한 겁니다.”
점소이가 말하면서 한쪽을 슬쩍 가리켰다. 그쪽에는 초로의 노인과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노인은 풍채가 좋고 허리에 금빛이 나는 검을 차고 있었다.
같이 있는 사내는 노인과 생김새가 비슷하고,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이로 짐작컨대 그의 손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소녀는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귀엽고 생기발랄해 보였다.
그녀는 적운상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빨개져서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반응을 보아하니 술과 음식을 보낸 것은 그녀인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어! 사숙조님, 그거…….”
구혁상이 방금 점소이가 내려놓고 간 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려고 하자 적운상이 놀라서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왜?”
“독이 있으면 어쩌려고요?”
“클클. 쓸데없는 걱정 말고, 너도 한잔해라.”
구혁상이 적운상의 손을 뿌리치면서 잔을 채워줬다.
“사숙조님, 중원에 와서 너무 긴장이 풀린 것 같습니다.”
“네놈이 있는데 피곤하게 뭐 하러 긴장을 하느냐? 게다가 내 나이 벌써 환갑을 넘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으니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살아도 되지 않겠느냐?”
구혁상이 이런 말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구혁상은 한 번도 저렇게 약한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손과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노인이니 늙은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적운상은 이상하게 화가 치밀었다.
“쳇!”
적운상이 앞에 있던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확 올라왔다. 처음에는 입 안에 쓴맛이 가득했으나 곧 부드러운 향기가 돌았다.
“후우… 명주는 명주군요.”
“클클. 아까 점소이가 좋은 술이라고 하지 않더냐? 그 정도는 향만 맡아도 알아야지.”
구혁상이 안주를 집어먹으면서 미소를 짓는데 적운상이 슬그머니 다시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구혁상이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그의 손을 치고 팔꿈치를 찍으려고 했다. 풍뢰십삼식이었다.
적운상이 급히 손을 오므리며 탁자에 있던 젓가락을 들었다.
타탁! 탁탁탁탁!
두 사람의 젓가락이 정신없이 부딪쳤다. 서로의 젓가락을 제압하기 위해 걸고, 당기고, 밀고, 누르며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적운상이 다른 손으로 술병을 잡으려고 하자, 구혁상이 그 손을 내려쳤다.
적운상은 이미 예상했었다는 듯이 급히 손을 피하며 팔꿈치로 되레 그의 손을 쳤다.
다급해진 구혁상이 젓가락으로 그의 팔을 찍으려고 하는데, 적운상의 손이 교묘하게 움직이더니, 그의 팔목과 젓가락을 든 손을 겹치게 해서 탁자에 눌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헤헤.”
적운상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서, 남은 한 손으로 여유롭게 술병을 잡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헛! 네 사부가 아니냐?”
“네?”
구혁상이 객잔의 입구를 보며 놀란 얼굴을 하자, 적운상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짧은 찰나에 구혁상은 손을 빼며 팔꿈치로 적운상의 양손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재빨리 술병을 잡았다.
뒤늦게 속은 것을 깨달은 적운상이 인상을 잔뜩 쓰며 투덜댔다.
“아, 정말, 치사하게 그런 수까지 쓰깁니까?”
“클클. 속은 놈이 바보지. 한 잔만 먹고 떨어져라. 더 이상은 아까워서 못 주겠다.”
구혁상이 적운상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나머지는 병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크하… 좋구나. 역시 명주는 명주다.”
“쳇!”
적운상이 뚱한 얼굴로 술잔을 비우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아까 그 소녀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금세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다 드셨으면 가요, 사숙조님.”
“클클. 그러자꾸나. 하지만 그 전에 술을 얻어 마신 인사는 해야지.”
“원해서 마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다 마시기는 구혁상이 다 마셨다. 적운상이 마신 거라고는 기껏해야 두 잔뿐이었다.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니다. 어쨌든 저쪽에서 호의를 베풀었으니 인사를 해야지.”
구혁상의 말에 적운상이 그쪽 탁자를 봤다. 이번에도 소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쪽을 볼 때마다 이렇게 시선이 마주친다는 것은 소녀가 계속 적운상을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적운상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포권을 했다. 그 나름대로 인사치레를 한 것이었다. 소녀가 화들짝 놀라서 같이 포권을 취하려고 했으나, 적운상은 그냥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원, 녀석. 무뚝뚝하기는. 이 녀석아, 같이 가야지.”
구혁상이 적운상의 뒤를 따라 나가자, 소녀와 같이 있던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허! 오지 않고 그냥 가는구나.”
노인은 적운상이 와서 인사라도 한마디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무성의하게 포권을 하고는 그냥 가버린 것이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도 저럴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령아야, 저딴 놈 말고… 헛! 어디 가!”
같이 있던 소녀가 적운상을 쫓아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가자 사내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령아!”
노인도 놀라서 소녀를 불렀으나, 그녀는 이미 객잔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큰일이군요. 령아 성격에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럼 뭘 보고 있느냐? 어서 쫓아가야지.”
“네, 할아버님.”
사내가 대답을 하며 급히 객잔 밖으로 나갔다.
“쯧쯧! 사고나 치지 않아야 되는데. 원, 누구 닮아서 성격이 저런지…….”
노인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호남성 원릉(沅陵)에 있는 금검문(金劒門)의 태상문주로 이름은 홍문형이었다.
홍문형은 금검문을 일으키기 위해 한평생을 노력해 왔다. 그 결과 금검문은 호남성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세가 강한 곳이 됐다.
이에 얼마 전에 모든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이렇게 손자, 손녀와 함께 유람을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손녀인 홍은령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손자인 홍기우가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더 골치를 썩었을 것이다.
홍은령은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어여쁜 손녀딸이었다. 생긴 것도 귀엽고 굉장히 총명한 데다, 할아버지인 홍문형을 아주 잘 따랐다.
하지만 그놈의 지랄 같은 성격이 문제였다. 외동딸에 막내여서 부모는 물론이고 오빠들까지 너무 오냐오냐 하면서 키운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세상을 접하다 보면 좀 철이 들까 했는데 웬걸, 타고난 성품이 그런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로 그녀는 바뀌지 않았다.
방금도 생긴 것이 좀 괜찮다 싶은 사내를 보더니 혹해서는, 그 비싼 술과 음식을 산 것으로도 모자라,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저렇게 쫓아간 것이다.
홍문형이 객잔을 나서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잠깐만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적운상이 걸음을 멈췄다. 아까 객잔에서 봤던 소녀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감히 내가 그렇게 호의를 보였는데 무시하고 그냥 가! 보아하니 딱 낭인에 삼류구만. 좀 생겼다고 뻐기기는……. 어디 혼 좀 나봐라.’
“무슨 일이오?”
기세등등하게 다가갔던 홍은령은 적운상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멀리서만 보다가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에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
‘이게 아닌데. 이 자식을 혼내줘야 되는데…….’
“할 말이 없으면 그냥 가겠소.”
“아! 저기, 잠깐만…….”
“뭐요?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그게… 그러니까…….”
적운상은 홍은령을 보면서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나운 기세를 풍기며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이 다가와서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배배 꼬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 술이… 괜찮았나 싶어서…….”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은 것이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홍은령이 손을 마구 저으며 말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쪽에서 마음대로 산 거니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소. 게다가 인사라면 아까 하지 않았소?”
‘이 자식이! 처먹고 오리발이냐?’
속은 그랬지만 말은 다르게 나왔다.
“그게 아니라 그냥… 이름이나 알려줬으면 해서…….”
홍은령이 곁눈질로 적운상을 힐끔거리며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운상이오. 됐소?”
“네? 네…….”
적운상이 몸을 돌리려는데, 조용하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 손녀딸이 실례를 하지는 않았나?”
“아! 할아버지.”
홍은령은 든든한 원군이 오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홍문형은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객잔을 나와 보니 먼저 홍은령을 따라 나갔던 홍기우가 멍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금검문에서 ‘소악녀’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홍은령이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배배 꼬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땍땍 거리거나, 아니면 칼을 뽑아 들고 죽자사자 휘둘러야 정상이었다.
‘허! 녀석. 제대로 임자를 만났구나.’
홍문형은 허탈한 웃음이 나오는 한편, 손녀딸이 안타까워 보여서 어쩔 수 없이 끼어든 것이었다.
“실례라니요. 그런 것 없습니다. 갈 길이 바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적운상이 몸을 돌려서 가려고 하자, 홍은령의 얼굴에 다급함이 스치며, 홍문형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잠깐 기다리게나.”
“왜 그러십니까?”
“험! 나는 금검문의 홍문형이라고 하네.”
홍문형이 스스로를 밝혔다. 알아서 조금 기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적운상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래서요?”
“험! 바쁘지 않으면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하네만.”
“바쁩니다.”
적운상이 딱 잘라 말하자, 홍문형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칼을 두 개나 차고 있는 걸 보면 무림인이 분명한데, 설마 금검문을 모른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금검문을 무시할 정도로 대단하단 말인가?
어쨌든 당장에 아쉬운 것은 이쪽이니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허허. 뭐가 그리 바쁜가? 이야기나 듣고 가게나.”
홍문형은 적운상이 또 딱 잘라 거절할까 봐 살짝 불안했다. 자꾸 간다는 놈을 붙잡아두자니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만약 홍은령이 그 정도로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자존심을 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클클. 적당히 해라, 이놈아. 혹시 금검삼영(金劒三影)이라 불리는 홍 문주가 아니시오?”
“아! 반갑소. 그대는…….”
홍문형은 구혁상이 아는 척을 하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아는 걸 보니 대화가 좀 통할 것 같았다.
“구혁상이라 하오. 이 녀석이 아는 것이 없어서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아까 호의를 베푼 것에 고맙소이다.”
구혁상이 포권을 취하자 홍문형이 마주 포권을 취했다.
“별말씀을… 허허.”
“한데 우리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 것이오?”
“실은…….”
차마 홍은령이 적운상에게 관심이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홍문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까 두 사람이 손을 나누는 것을 잠시 보았소이다. 실력이 아주 출중하더군요. 마침 손자 녀석이 여기 있는 젊은이와 비슷한 또래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무공을 비교해 보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자리를 마련하면 어떨까 해서 이렇게 뒤따라 온 것이오.”
한마디로 홍기우와 적운상을 겨뤄보게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호오… 그랬구려. 잠시라면 좋을 것 같소이다.”
“마침 내가 아는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갑시다.”
두 사람이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홍기우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적운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홍은령이 그에게 너무 호감을 보이자 질투심이 난 것이다. 누이동생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법이었다.
적운상은 적운상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형산파로 돌아가고 싶건만, 뜻하지 않게 늦어지게 생겼으니 당연했다.
다만 홍은령만은 마냥 신이 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