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3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3화
13화. 겹치는 인연 (1)
“배가 없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구혁상과 적운상은 배를 타기 위해 인근을 다 돌아다녔으나 배가 없었다. 대부분의 배를 누가 다 예약해 놓은 것이다.
“어쩌죠? 육로(陸路)로 가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요.”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방법이 없구나. 강을 따라 하천으로 계속 내려와도 이 모양이니…….”
“가다가 또 노숙이나 해야겠군요.”
“험!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구혁상이 뭘 봤는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적운상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사람들이 커다란 배에 짐을 싣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들은 상관보의 호남상단이다. 아마도 호남으로 가는 길일게다.”
“정말입니까?”
“그래. 가서 부탁을 해보자꾸나.”
“네.”
구혁상은 적운상과 함께 일꾼들을 부리고 있는 뚱뚱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보시오.”
“왜 그러시오?”
“혹시 상관보의 호남상단이 아니오?”
“그렇소만…….”
사내가 말끝을 흐리며 구혁상과 적운상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그러다 두 사람의 허리에 걸려 있는 칼을 보고 은근히 경계를 했다.
“그럼 호남으로 가는 길이겠구려.”
“그렇소.”
“허! 그거 정말 잘됐구려. 실은 우리도 호남으로 가는 길이라오. 그런데 배가 없구려. 뱃삯은 줄 테니 우리를 좀 태워주면 안 되겠소?”
“어림도 없소. 상단에서 중요한 물건을 운반 중이라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태울 수가 없소.”
“그러지 말고 사정을 좀 봐주시오. 우리도 호남 사람이오. 타지에 와서 고생고생 하다가 이제야 돌아가는 길이라오.”
“호남 사람이오?”
뚱뚱한 사내가 뜻밖이라는 듯이 물었다.
“그렇소이다. 남악현(南岳縣)에 살고 있다오.”
“오오. 형산 아래의 남악현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혹시 그쪽 사람이오?”
“맞소. 나는 남악현 바로 옆의 형동현(衡東縣)에서 나고 자랐다오.”
“허허. 이거 동향(同鄕) 사람이었구려.”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반갑다. 그래서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보아하니 낭인무사 같은데, 어쩌다 이곳까지 왔소?”
“이 녀석이 내 손자인데, 글쎄 표사가 되겠다고 집을 나오지 않았겠소. 그래서 고생 끝에 잡아서 이렇게 데려가는 길이라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소?”
“쯧쯧, 고생이 심했겠구려. 나도 아들놈 때문에 요즘 골머리가 아프다오.”
구혁상의 거짓말이 술술 먹힌다.
“허허. 자식들 키우는 것이 다 그렇지 않겠소.”
같은 고향사람인 데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까지 들자, 뚱뚱한 사내는 구혁상에게 상당한 친근감을 느꼈다. 이에 대놓고 하대를 하며 적운상을 나무랐다.
“할아버님에게 잘해, 이놈아! 살아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거야.”
“네? 네…….”
적운상이 얼결에 대답을 하자, 그가 다시 혀를 찼다. 그 모습을 보며 구혁상이 미소를 지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챙겨두고 부탁을 좀 합시다.”
구혁상이 품에서 돈을 꺼내 그에게 슬쩍 건넸다. 그러자 그가 혹시나 누가 볼까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린 후에 재빨리 돈을 챙겼다.
“험! 원래는 안 되는 거지만, 동향 사람이라 모른 척할 수도 없구려. 그냥 태워줄 수는 없으니, 저리로 가서 짐을 나르시오. 내 일꾼이라고 대충 둘러대리다. 아, 칼은 안 보이게 잘 숨기시오.”
“훗! 그러리다. 정말 고맙소.”
“됐소. 어서 가보시오.”
“밥은 제때에 주나요?”
적운상이 묻는 말에 뚱뚱한 사내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당연한 거 묻지 말고 가서 짐이나 날라.”
“네.”
“원, 녀석. 아직도 그리 식탐이 강하구나.”
“헤헤. 천성이 어디 가나요?”
두 사람은 일꾼들 틈에 섞여서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짐은 가로세로 한 자는 될 법한 상자들이었는데, 등에 메기 쉽게 줄이 좌우로 감겨 있었다.
한 시진 정도를 부지런히 나르자 짐이 모두 배에 실렸다. 그러자 뚱뚱한 사내가 와서 현지의 일꾼들은 돈을 줘서 보내고, 몇몇 일꾼들만 배에 태웠다. 그중에는 당연히 적운상과 구혁상도 끼어 있었다.
원래 일꾼들은 현지에서 짐을 내리고 실을 때만 사서 쓰는 것이 제일이었다. 그래야 돈이 적게 든다. 그럼에도 몇몇 일꾼들을 배에 태우는 이유는, 그들이 짐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사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짐을 보호하되, 관리는 하지 않는다. 표국에 표사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짐을 관리하는 쟁자수들이 따로 있는 이유와 마찬가지였다.
일단 칼을 좀 쓰게 되면, 대접을 받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어?”
적운상이 구혁상과 함께 일꾼들 틈에 섞여서 쉬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상관도백과 상관보연이었다.
‘그때 그 여자잖아! 그럼…….’
적운상은 그제야 도락방에서 나왔을 때 봤던 여자가 객잔에서 봤던 상관보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객잔에서 봤을 때 그녀는 방갓을 쓰고 있었고, 잠깐 눈이 마주친 것이 다였다. 그래서 도락방에서 만난 여자가 그녀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그녀가 있는 호남상단의 배를 타지는 않았을 터였다. 더구나 그때는 그녀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몇몇 호위무사들도 같이 있었다. 혹시나 알아보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어떡하지?’
잠시 생각하던 적운상은 눈을 위로 치켜떠 자신의 앞머리를 봤다. 적운상은 몽골에 있을 때 벼락을 맞는 바람에 머리가 홀라당 다 탔었다. 시일이 흘러 머리카락이 자라기는 했지만 아직 어깨까지도 내려오지 않았다.
중원에서는 그렇게 짧게 머리를 자르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머리 모양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머리 모양만 바꾸면 몰라볼 수도 있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적운상은 옷자락을 조금 찢어서 머리를 뒤로 넘겨 묶었다. 그러자 꽁지머리가 됐다.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구혁상이 물었다.
“뭐 하냐?”
“네? 아니요. 전에 상관보는 알아서 득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했잖아요. 혹시나 압니까? 저 소저가 나한테 반할지.”
적운상이 둘러대는 말에 구혁상이 혀를 찼다.
“쯧쯧, 가끔 보면 내가 정말 너한테 뭘 가르쳤나 싶다. 얼굴에 때구정물이나 닦고 그런 말을 해라.”
“아니요. 괜찮아요.”
적운상은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얼굴이 지저분하면 더 못 알아볼 가능성이 컸다.
적운상이 그렇게 나름 변장(?)을 하는 동안 상관도백과 상관보연은 십여 명의 무사들과 함께 배에 실린 짐을 일일이 확인했다.
“이상 없군.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상관도백의 말에 무사 하나가 대답을 하고, 사람들에게 출발준비를 시켰다. 그러자 잠시 후, 드디어 배가 출발했다.
그때 젊은 도사 하나가 선착장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뭐라고 소리치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배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배와 선착장까지의 거리는 못 되어도 칠팔 장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도 그 젊은 도사는 마치 새처럼 허공을 날아 배의 갑판 위로 가볍게 내려섰다.
그 놀라운 경공술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주위에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그를 에워쌌다. 모두들 여차하면 칼을 휘두를 것 같은 흉흉한 기세였다.
분위기가 이상하자 일꾼들이 겁을 먹고 짐이 있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모두들 궁금증이 일어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들 틈에는 구혁상과 적운상도 있었다.
“누구죠?”
“옷차림을 보아하니 무당파의 도사구나.”
사실이 그랬다. 그 젊은 도사는 도락방의 참사를 조사하던 무당파의 운학이었다.
운학은 칼을 뽑아 들고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무사들을 향해 정중하게 반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본인은 무당파의 운학이라 합니다. 남하(南下)하는 배를 구할 수가 없어 곤란하던 참인데, 마침 이 배가 선착장을 떠나기에 급한 마음에 실례를 무릅쓰고 올라탔습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무당파라는 말에 사내들의 기세가 약간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칼을 거두지는 않았다.
“모두들 칼을 거두어라.”
상관도백이 나서자 그제야 무사들이 칼을 거뒀다.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들었구려. 반갑소. 나는 상관도백이라고 하오.”
“아! 상관보주님이었군요. 몰라 뵈었습니다. 무당파의 운학이라고 합니다.”
그렇잖아도 이들을 뒤쫓고 있던 참이었다. 운학은 오늘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허. 무당십걸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게 듣고 있소이다.”
역시나 상관도백이었다. 그는 운학이 젊은 나이에 혼자서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이나 은연중에 드러나는 청량한 기운에 그가 무당십걸이라는 것을 단번에 짐작해 낸 것이다.
주위에 있는 무사들이 운학을 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경계하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이 무당십걸이란 명성이 가진 힘이었다.
“별말씀을…….”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같이 차라도 합시다.”
“청해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적운상이 구혁상에게 말했다.
“우리도 저렇게 탈 걸 그랬어요. 그럼 돈도 안 들고 일을 안 해도 됐을 텐데.”
“클클. 아무나 저리 태워준다느냐? 무당십걸 정도 되니까 그냥 넘어간 게야.”
“무당십걸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내가 무당파와 척을 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네. 예전에 말해 주셨잖아요.”
“그 당시에 난 저들의 그림자만 봐도 도망을 쳤었다.”
“흐음……. 지금은요?”
“지금도 나는 저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허나 너라면 한 번 해볼 만할 게다.”
말이 끝나는 순간, 구혁상과 적운상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적운상이 미소를 지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가죠.”
“그러는 것이 좋겠구나.”
“그런데 밥은 언제 주나? 제때에 준다더니…….”
적운상이 배를 쓰다듬으며 투덜대는데 마침 두 사람을 이곳에 태워줬던 뚱뚱한 사내가 일꾼들을 불러 모았다.
“식사다. 모두들 이리 모여.”
때늦은 점심이었다. 밥으로 나온 것은 만두와 소찬 몇 개가 다였다. 적운상과 구혁상은 일꾼들 틈에 끼어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