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46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46화
"이렇게 신경을 써주시니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의를 표한 소천악과 유염독은 한동안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이튿날.
유가장의 총관인 유시명의 안내로 유염독과 함께 들어간 연무장은 소천악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시설을 자랑했다.
지하 연공실은 사방이 이십여 장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였다. 수련장과 침실 그리고 욕실까지 준비된 완벽한 시설에 적잖이 감탄한 소천악이다.
"대단하군요. 이 정도면 무림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명문세가와도 추호의 손색이 없네요."
"허허! 우리 조부님이 언젠가 나올 가문의 무재에게 열심히 수련하라고 만든 거지요. 불행히도 인재가 없어 이렇게 방치된 신세지요."
약간은 씁쓸하게 말하는 유염독을 보며 소천악이 위로했다.
"조부님에게 약간은 미안하네요. 하지만 이제 곧 따님에게서 엄청난 무재가 나올 거니 심려 마시지요. 좌우간 잘 쓰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더 고맙지요. 아무래도 소 대협이 장원에 계시면 그 어떤 무인이 겁 없이 침범하겠습니까?"
"하하, 그런가요?"
"물론이지요. 계시는 동안 장원의 안전은 저절로 이뤄지니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입니다. 내 집인 양 편하게 쓰십시오."
"그리 생각하신다면 부담이 덜하네요."
유염독의 웃음을 뒤로하고 소천악은 성큼성큼 연공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본격적으로 무공수련에 들어갔다.
드디어 연공실에 혼자 남은 소천악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무공수련을 하려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중요한 건 두 가지였다.
마교에 가보니 막강한 고수들이 즐비했다. 여태껏 혈검구식 없이 다른 무공으로 무림을 종횡했지만 정작 그들과 적으로 마주치면 어려움이 많을 듯했다.
결국 사문의 비전절기인 혈검구식을 써야 하는데 아직은 썼다 하면 무림공적은 피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차라리 공적이 되는 게 낫지 힘도 못 쓰고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혈검구식을 연성하기로 작정한 터였다.
그의 손이 품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작은 단합을 꺼내 들었다. 목여국의 아타수 왕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지체없이 목함을 열어본 소천악은 여러 겹으로 접힌 서찰을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펼쳐 들었다.
<이 단환은 내공을 높여주는 비단이 아니다.
다만 이를 복용하면 정신이 극도로 맑아져 정신수련에 많은 도움이 된다. 미련한 놈들은 내공을 제일이라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사람의 정신만큼 소중한 게 없는 법이다.
이 서찰을 보는 놈이 부디 돌대가리가 아니길 바란다.>
내용을 읽어본 소천악의 눈에 실망감이 진하게 스쳤다. 사실 일국의 국왕이 준 선물이라 고이 간직하며 설렘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그의 생각에는 최소한 내공을 급증시켜 줄 절세의 효용을 지닌 영약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제길. 이거 뭐야."
투덜거리며 단환을 바라보던 소천악이 신경질적으로 입에 넣었다. 새끼손톱만 한 단환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목으로 쏙 넘어갔다.
"밑져야 본전이니 먹고나 보자."
소천악의 마음은 딱 이 마음이었다. 효과야 나중 문제고 일단은 공짜이니 먹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단환은 목에서 내려가 부드러운 향기를 뿜으며 전신으로 향내를 풍겨냈다.
"음, 일단 냄새는 좋네."
싱긋 웃으며 가부좌를 튼 소천악이 그동안 깨달았던 무리에 대해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잡생각이 떠올라 쉽지 않았지만 어릴 때 받았던 수련을 생각하니 조금씩 수련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단환은 놀랍게도 머리를 맑은 호수로 만들어 일체의 잡념으로부터 소천악을 해방시켜 주는 놀라운 효력을 발휘했다.
덕분에 만 이틀이 지나자 본격적으로 세상을 잊고 무공초식에 대해 하나씩 관찰이 가능해졌다. 객잔에서 도끼질하던 이로부터 느낀 심득과 천축의 수도승에게 들은 법어 등이 어지럽게 뇌리를 가득 채웠다.
명상이 깊어지자 전신이 자기도 모르게 진동하며 내면의 울림이 들려왔다. 점점 무념무상의 경지로 접어들며 일체의 사심과 욕망이 명경지수처럼 잔잔해짐을 느꼈다. 자신이 비워지자 우주만물의 이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희한한 경험이 충실하게 전신에 쌓여갔다.
일체의 사념이 사라지자 무아의 경지에서 혈검구식을 천천히 관조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막연한 구결로만 알았던 혈검구식이 한 초 한 초 생생하게 살아나 연결되면서 일초부터 구초까지 한 번에 쫙 펼쳐지는 묘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명상 속에서 혈검구식을 수련하는 소천악이다. 시간도 잊고 공간도 잊고 그저 멍한 상태에서 수없이 펼치고 수없이 거둬들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소천악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하~ 이게 한 단계를 넘어선다는 경지인가."
탄성이 흐르며 천천히 가부좌를 푼 소천악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머리는 가슴까지 내려오도록 자라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명상에 잠긴 건가?
못 믿을 시간의 흐름에 잠시 당황하던 그가 이내 사념을 떨치고 검을 들었다.
"혈우(血雨)."
피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검에서 피어난 혈우는 삽시간에 사방 모든 방위로 퍼져나가며 반경 이 장 내를 초토화시켰다.
"혈섬(血閃)."
검끝에서 섬전 같은 혈광이 퍼져나갔다. 날카로운 예기를 뿌리는 혈광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냈다.
"혈전(血電)."
검에서 번개가 세차게 뿜어져 나갔다.
"혈강(血强)."
검에서 하얀 막대 같은 강기가 서리서리 뿜어져 나오며 연공실 벽을 찰나에 모래로 만들었다.
혈절(血絶)!
검에서 파괴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가며 연공실 벽에 사정없이 부딪쳤다.
콰콰쾅!
마치 벼락이라도 작렬한 듯 연공실이 온통 부서진 돌가루로 시야를 가렸다. 먼지가 걷히자 벽을 바라본 소천악은 기겁을 했다. 벽은 커다란 구멍을 낸 채 거의 허물어지다시피 무너져 내렸다.
"제길! 유염독이 보면 잔소리깨나 하겠군."
소천악은 나머지 초식에 대해 연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혈검구식은 육식부터 그 진정한 위력이 나온다는 걸 이미 알았다. 그 위력이 전 초식에 비해 배 이상 강해진다는 걸, 깨달음을 통해 느낀 터에 펼쳤다가는 장원을 통째로 말아먹을 우려가 있었다.
"허, 그 단환이 이런 놀라운 효과가 있을 줄이야."
감탄하는 소천악은 이게 다 그 단환의 공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복용 후 갑자기 맑아진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깨달음이란 걸 뼈저리게 느꼈다.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한 번쯤 도와줘야 할 은혜로군."
가볍게 중얼거린 소천악은 더 이상 연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머지 초식을 펼치다가는 아예 장원을 말아먹을 걱정에 나중에 조용한 곳에 가서 연마할 요량이었다.
연공실을 나온 소천악의 기상은 전과는 무언가 확연히 달랐다. 눈은 깊은 호수 바닥처럼 잔잔해 전혀 무공을 익힌 무인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천천히 걷는 그를 알아본 장원 사람들이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대협,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신색이 환히 피셨습니다."
웃음 띤 소천악의 대답에 사람들은 함께 미소로 응대했다.
"이게 다 대인의 은덕이지요."
"은덕은 무슨. 무공 익혔다고 불한당 짓을 하는 소인배들을 혼내준 것뿐입니다. 그나저나 하오문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안 오긴요. 뻔질나게 오셔서 서찰을 탁천웅 님에게 주시고 갔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소천악은 바로 유염독 장주를 찾아갔다. 진심으로 반겨주는 그를 보며 미안한 듯이 첫마디를 꺼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미안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무슨 일이라도?"
약간 불안한 듯한 유염독의 말에 이실직고하는 소천악이다.
"죄송한 일이지만 제가 수련을 하다 연공실을 조금 부쉈습니다."
흠칫한 유염독이 곧 마음을 접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편하게 말했다.
"허허. 신경 쓰지 마시지요. 부서지면 수리하면 되는 일이죠."
"그리 생각하시니 마음이 편하네요. 조금 많이 부서졌으니 이해하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뽑아 올린 소천악이 어느새 유염독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유염독은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연무실로 갔다가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연무실은 거의 흔적을 찾기도 힘들게 산산조각 나 있었다.
"이게 조금인가! 아주 박살을 내놨군."
어이없어 멍하니 연무실을 바라보는 유염독의 마음에 울화병이 올라오는 듯했다. 싫은 소리 한 번 못 할 처지인 현실이 속상하기만 했다. 뒤통수가 따끔따끔한 기분으로 소천악은 서둘러 탁천웅에게 갔다.
벌컥!
"천웅아! 형이 왔……."
방문을 열고 희색을 띄우며 소리치던 소천악의 입이 열린 채 다물리지를 않았다. 침대 위에 있던 탁천웅도 기겁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침대 위에는 남녀가 벌거숭이로 열심히 작업을 하다 제대로 걸린 상황이었다. 다급한 목소리로 탁천웅이 버럭 소리쳤다.
"문 닫고 얼른 나가요."
"어… 미안하다. 자식, 작업 중이라면 진작 이야기를 하지."
"언제 이야기할 시간이나 주고 들이닥쳤어요? 지금 뭐 해요. 얼른 나가요."
허둥지둥 침대에서 소리치는 탁천웅의 모습은 완전히 자연 그대로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벌거숭이였다. 물론 그 옆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유염독의 금지옥엽 유옥여의 얼굴도 소천악의 시선을 피하지는 못했다.
"자식. 재주도 좋아요."
마지막까지 염장을 지르며 소천악이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탁천웅이 얼굴에 불만을 잔뜩 달고 나타나 빽 소리쳤다.
"무슨 놈의 형이 이렇게 예의를 몰라요?"
"어, 미안하다."
"이게 미안하다고 될 문제입니까? 형만 아니면 그냥 확!"
점점 더 울화통을 터뜨리는 탁천웅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천악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너 많이 컸다. 감히 형에게 이따위 소리를 함부로 떠들다니. 지금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거 맞지?"
"헉,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냐. 감히 하늘 같은 형님에게! 이 망할 놈이."
소천악의 손이 번개같이 탁천웅의 가슴을 격타했다. 그 후 한동안 탁천웅의 하늘을 뒤집는 비명소리와 소천악의 욕지거리가 화음을 이루며 조용하던 장원을 발칵 뒤집었다.
소천악의 분노는 상상외로 컸다. 감히 자신도 독수공방의 외로움 속에 연공에 매진한 처지인데 동생이란 놈이 무릉도원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열이 받을 판인데 소리까지 지르니 도무지 화가 수습이 되지 않았다.
"형님! 잘못했어요."
"시끄러. 일단 맞고 다시 이야기하자."
단칼에 자른 소천악의 손발은 어지럽게 탁천웅의 전신을 강타했다. 아무리 철골이라는 탁천웅이었지만 이미 무공의 한 단계를 벗어난 소천악의 손길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한 대 한 대에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강한 충격이 엄습했다. 아픔이 지나치니 이제는 둔탁한 느낌만 들 뿐 감각 자체가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