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43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43화
그 사실은 유염독 장주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의 무인이 아쉬운 판이라 모른 척할 뿐이었다. 그는 오로지 협상이 잘되길 하늘에 빌고 빌었다.
아차 하면 유씨 핏줄이 자신의 대에서 멸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눈가에 스쳤다. 하지만 그도 엄연히 일가의 주인으로 돌아오자 곧 위엄을 차리고 꿋꿋하게 맞서갔다. 유염독도 손에 검을 굳게 쥔 채 서둘러 합류하며 소리쳤다.
"그들인가?"
"네, 장주님. 종소리로 볼 때 그자들이 온 거 같습니다."
몇 명 남지 않은 장원 호위무사 중 한 명이 바로 대답했다. 일이 벌어지기 전 삼십여 명을 헤아리던 호위무사는 겨우 다섯 명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음! 이런 낭패가."
유염독의 얼굴에 어두움이 삽시간에 자리했다. 아무리 대비했다 해도 저들은 일류 이상의 무서운 고수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기껏해야 돈으로 산 낭인무사들은 일류고수를 찾기도 힘들거니와 여차하면 다 버리고 도망갈 게 뻔했다.
"어떻게 할까요, 장주님?"
"일단 정문에서 저들과 마지막으로 협상을 펼쳐보자."
"네, 장주님."
협상이라는 말에 위안을 얻은 총관이 약간이나마 기대감을 품고 서둘러 유염독을 정문으로 호위하며 걸어갔다. 잠시 후 정문에서 살기등등하게 기다리고 있던 적호방의 임가빈을 본 유염독이 예의를 갖추며 물었다.
"도대체 원하는 게 무엇이오?"
"서찰을 안 보셨나? 우리 적호방과 동맹관계를 맺자는 이야기요."
차갑게 응수하는 임가빈을 본 유염독은 아무래도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임가빈은 적호방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로 외당 당주를 맡고 있는 자였다.
"동맹이라."
중얼거리는 유염독은 기가 막혔다. 말이 좋아 동맹이지 서찰 내용대로라면 유가장을 송두리째 바치고 고개를 숙이라는 일방적인 통고에 불과했다. 고심하는 그를 임가빈이 재촉했다.
"어떻게 할 거요, 유염독 장주님?"
"사실 동맹도 좋지만 일단은 적호방과 손을 잡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게 어떨까 싶소이다."
위기를 모면하려는 유염독의 안간힘은 임가빈의 딱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졌다.
"흐흐! 얄팍한 수를 쓴다고 넘어갈 본 방이 아니외다. 오늘 유염독 장주에게는 선택이 딱 두 개가 있소이다."
"그게 무엇이오?"
"죽느냐 따르느냐. 그 외에는 없소이다. 자, 어서 결정하시오."
단호한 말투에 기분이 상한 유염독이 거칠게 저항했다.
"이런 법은 세상천지에 없소이다. 어찌 이렇게 무례하게 하실 수가 있소이까?"
"없긴 뭐가 없소이까! 여기 이렇게 있잖소이까? 성가시니 어서 결정하시구려. 나도 바쁜 몸이라 더 이상 말장난은 사양이외다."
"허, 이런."
망연자실한 유염독이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임가빈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스산한 언어가 새어나왔다.
"결정하셨소?"
"이건 정말 아니오이다. 다시 한 번 방주님과 협의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후후, 기어코 장주님이 벌주를 마시겠다면 사양하지 않지요. 여봐라, 유가장의 모든 생명이 있는 걸 싸그리 지워버려라."
"존명!"
임가빈의 명령에 적호방도들은 모두 검을 뽑아 들고 금방이라도 피를 부를 듯한 살기 어린 표정으로 서서히 다가섰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유염독과 일행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이리 신속하게 움직일 줄은 미처 몰랐던 유염독은 두려움과 분노에 턱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호위무사들과 돈으로 구해 온 낭인무사들이 두려움에 질려 금방이라도 도망갈 눈치가 확실히 보였다. 아득한 절망감에 사로잡힌 유염독이 막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장주님, 저 소천악입니다. 아주 유가장의 기막힌 위기군요.]
귀에 가느다란 전음성이 들려오자 유염독의 얼굴에 화색이 피어나며 얼른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에 소천악이 있는지 찾으려 애썼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인기척을 찾기는 어려웠다.
우왕좌왕하는 유염독에게 다시 소천악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으려 하지 마시지요. 아무리 둘러봐도 못 찾습니다. 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고개를 끄덕이시지요.]
소천악의 제안에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염독이다. 거부는 죽음인 판에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바로 다시 소천악의 음성이 귀에 들려왔다.
[이제라도 유옥여 낭자와 제 동생의 결혼을 승낙하시면 도와드리지요. 사실 우리 동생이 보다시피 힘 좋고 인간성 좋은 녀석입니다. 어디 가도 이런 사윗감 구하기는 어렵지요. 어때요? 승낙하시겠습니까?]
유염독은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이미 딸에게서 탁천웅과 혼인하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여기서 다시 거절하면 전멸이 뻔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결정을 내린 그에게 다시 전음성이 들렸다.
[자, 승낙하시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유염독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딸도 소중하지만 아차 하면 아들도 몰살당해 가문의 대가 끊어질 판에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신호를 본 소천악의 입에서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자, 이제 갑니다.]
짤막한 말을 마지막으로 귀에 들려오던 전음성이 끊어졌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후 장원을 쩌렁 울리는 큰 소리가 들렸다.
"모두 동작 그만!"
검을 들고 다가서던 적호방의 고수들이 모두 놀라 잠시 멈칫하는 사이 소천악이 막 혈전이 벌어지려는 정 중앙에 유령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소천악의 등장에 놀란 임가빈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누구냐? 웬 놈이기에 이리 무례하게 온 것이냐?"
"조용히 하시오. 잠시 후면 다 알게 될 건데 뭐 그리 서두르시오."
두 사람이 결코 호의적이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탁천웅이 부지런히 거구를 날려 소천악의 왼쪽에 늠름하게 섰다.
"형님, 제가 왔습니다요."
"그래, 잠시만 기다리거라."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는 둘을 보며 임가빈이 비위가 상한 듯 거칠게 소리쳤다.
"어디서 나타난 개뼈다귀 같은 놈이냐?"
"아, 그 양반 입 한번 더럽게 거치시네요."
거친 말투에 기분이 몹시 상한 소천악이 스산하게 말하자 바로 역정을 내는 임가빈이었다.
"뭐라고? 이런 발칙한 놈이! 감히 내가 누구라고."
"누구긴 누구시겠소. 손에 칼 든 도둑님이지. 그나저나 내가 말입니다. 검이 조금 필요하니 거 가지고 계신 검을 다 주셔야겠소."
"뭐라고? 검을?"
"그렇소이다. 선택은 딱 두 개뿐이오. 검을 주든지 아니면 목숨을 주든지."
"그거 말이라고 하느냐? 무인에게 자신의 애검을 달라고 하다니 네놈이 제정신이냐?"
"말 잘했소. 그럼 무인께서는 은자뿐인 장원에 와서 은자 다 주든지 아니면 죽든지 하라고 말하는 건 어디 법도요?"
"감히 네놈이 우리 적호방의 행사를 방해하려는 수작이냐?"
"거참, 눈치 없으시오. 당연한 말을 뭐 그렇게 빙빙 돌려서 물어봅니까. 이 정도면 당연히 방해하는 거지, 뭘 그리 확인하고 난리요."
태연하게 대꾸하는 소천악을 보며 임가빈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뒤에 있던 부하들에게 고함쳤다.
"당장 저 두 놈의 모가지를 썰어버려라."
"존명!"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앞으로 나서는 적호방의 고수를 바라보던 소천악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천웅아! 저분들이 우리를 썰어버린다고 하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는 법! 네가 알아서 썰어버려라."
"형님, 정말로 썰어버립니까?"
"특별히 형님이 선물한 쇠몽둥이로 머리 한 방씩 쥐어패드려라."
"알았다요."
소천악의 말이 마음에 든 탁천웅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바로 전의 바보스런 표정은 간데없고 패기에 가득 찬 얼굴로 다가서는 적호방의 고수들에게 말했다.
"자, 어서 와라. 머리통에 한 대씩 시원하게 두들겨주마."
"저런 웃기는 놈이. 네 이놈! 오늘 덩치가 아무 필요 없다는 강호의 지엄한 율법을 보여주마."
"어려운 개소리 말고 어서 와."
싸가지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는 탁천웅의 말에 노화가 치민 임가빈이 소리쳤다.
"쳐라! 저 두 놈을 당장 도륙을 내라."
"존명! 죽여라."
고함치며 달려드는 적호방의 정예들을 바라보는 탁천웅의 표정은 여유만만이었다. 소천악의 몸으로 때우라는 말을 들은 후라 걱정이라곤 한 치도 보이지 않았다. 형님으로 모시는 그의 말은 당연히 신뢰 그 자체였다.
바로 적호방의 무인들의 시퍼렇게 날이 선 살기 찬 검이 무서운 속도로 탁천웅의 온몸에 작렬했다.
텅! 쨍그랑.
이해할 수 없는 음향과 함께 무인들의 검은 두 동강이 나 졸지에 반 토막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외공이."
놀란 무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눈빛을 번쩍이던 탁천웅이 번개같이 쇠몽둥이를 사방으로 비산시키며 무인들의 머리통을 노렸다.
퍽! 퍽!
여기저기서 머리통과 쇠몽둥이가 부딪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박살난 무인의 비명이 요란하게 울렸다.
"크으악! 이런 잔인한 놈."
"시끄러. 네놈들은 인정이 많아서 내 몸에 검을 들이댔냐?"
신경질적인 말과 함께 연이어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탁천웅은 마치 양떼에 돌입한 늑대처럼 거칠게 휩쓸고 다녔다.
놀라운 신력과 결합된 쇠몽둥이는 머리고 가슴이고 가림 없이 맞는 무인에게는 바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붕붕거리는 소리와 함께 밀어닥치는 쇠몽둥이의 위력에 놀라 적호방도들이 안간힘을 쓰며 부러진 검으로 막아섰으나 부질없는 발버둥이었다.
탁천웅의 쇠몽둥이는 막아서는 검을 박살내며 머리를 정통으로 두들겨 팼다. 머리에 격중되는 쇠몽둥이에 의해 하나둘 피분수를 뿜으며 죽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겁 없이 덤볐던 무인 열 명이 모조리 시체로 변해 땅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우뚝 서서 임가빈을 바라보는 탁천웅의 손에 들린 쇠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 이제 네가 와. 아주 머리통을 수박 깨듯 시원하게 패주지."
무감정하게 말하는 탁천웅의 목소리에 임가빈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서는 추태를 보였다. 극도의 놀라움이 일류무인의 끝에 도달한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을 알았다. 수치감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가 외쳤다.
"감히 네놈이 우리 적호방을 적대시하고 살아날 듯싶더냐?"
"당연히 살지. 그럼 이런 비리비리한 놈들이 날 죽일 수 있냐?"
"이런 무식한 놈이."
"너 자꾸 욕하지 말고 이리로 와."
욕을 배 터지게 얻어먹은 탁천웅이 노화를 터뜨리며 성큼성큼 임가빈에게로 걸어갔다. 마치 저승사자가 걸어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던 임가빈이 놀란 심신을 가다듬고 부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저놈을 합공하라."
"존명."
비장한 표정으로 임가빈의 옆에 다가선 적호방의 무인들의 손에 들린 검에서 시퍼런 살기가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강적을 만난 기분으로 뭉쳐든 그들은 바로 사방으로 흩어져 탁천웅을 포위 합격할 준비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