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41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41화
"그건 죄가 아닌데 형님 말을 씹은 건 죄지. 죄도 아주 중한 죄야."
"쳇! 형님은……."
"형님은 유사시에 부모님과 동격이라는 말 잊었냐?"
"알았어요. 그만 해요."
"그런데 뭘 그렇게 열심히 본 거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심드렁한 소천악의 물음에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돌리는 탁천웅이다. 순간 소천악의 눈에서 미묘한 광채가 일렁이더니 바로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천천히 탁천웅의 시선이 머무른 곳을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이색적인 풍경이 보였다. 오십여 장 떨어진 길가에 흥미를 끄는 장면이었다.
일남일녀인 그들은 무언가를 적어놓은 깃발 아래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덩치가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큰 남녀의 모습에 무언가를 느낀 소천악이 안력을 집중시키자 용모가 환히 보였다.
소천악이 본 그녀는 한마디로 절세미인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서 있는 여인은 멀대같이 큰 키에 좋게 말해서 복스러운 몸매의 소유자였다. 기가 막힌 소천악의 입이 열렸다.
"야, 천웅아!"
"네, 형님!"
"너 혹시 저 처자에게 반해 시선을 못 뗀 거야?"
"그게 무슨 소리요. 난 그런 적 없다요."
놀라 얼른 고개를 젓는 탁천웅이나 천성이 순박한 관계로 단박에 거짓말이란 게 삼척동자도 알 지경이었다. 더욱 짓궂은 마음이 든 소천악이 슬슬 약을 올렸다.
"흐흐~ 아닌 거 같은데. 쳐다보는 네 눈이 사모하는 연모의 정이 물씬 풍겨 나오던데."
"연모의 정이 뭐요?"
"관두자. 형이 물을 때는 솔직히 말해야 도와줄 수 있는 거야. 저 처자 좋냐?"
"음! 예뻐요."
가벼운 유도신문에 냉큼 넘어가 황홀한 듯 말하는 탁천웅을 보며 소천악은 역시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자신이 보기엔 거대녀 그것 이외엔 아무런 느낌이 없는데 저 녀석은 좋다고 난리인 모양이다.
"좋아, 이 형님을 따라와라."
"어쩌시려고요?"
"다 믿고 따라와. 설마 형이 네 녀석 어렵게야 하겠냐."
"믿어요, 형님."
금세 환한 얼굴로 변한 탁천웅이 쫄래쫄래 따라오자 빙긋 웃던 소천악이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가까이 다가서자 역시 남녀의 키나 덩치는 엄청났다. 여자조차도 소천악보다 일 척 가까이 큰 거녀였다. 미친 척하고 다가선 소천악은 남녀가 들고 있는 깃발에 적힌 내용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무림 영웅을 모십니다.>
깃발에 적힌 걸 보니 무슨 어려운 사연이 있음을 직감한 소천악이 피식 웃으며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낭자. 지금 강호고수를 초빙하려는 것이오?"
소천악의 질문에 얼른 고개를 돌렸던 그녀는 태양혈이 튀어나오지 않은 걸 보고 실망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공자도 검을 찬 걸 보니 무림인인 듯하지만 어쭙잖은 실력이시면 아니 오시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이건 생사가 걸린 일입니다."
"오호! 생사라."
소천악은 다급한 기색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목숨을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에 묘한 감흥이 일었다.
"그래요. 막아야 할 적은 정말 강한 고수들이에요. 일류고수들이 수두룩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호오, 그런 적을 막으려면 하나라도 더 무인을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힘들다고 아무나 데려가면 두 가지가 손해이지요. 일반 무인들이 많아 봐야 일류고수에게 모두 죽으니 전력에 도움이 안 되고요."
"그럼 두 번째는요?"
"죄 없는 사람 은자에 홀려 죽으면 그 가족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요?"
"거참, 마음씨 하나만은 놀랍게 곱구려."
감탄 어린 소천악의 말에 옆에 서 있던 탁천웅이 얼른 껴들었다.
"거봐요, 형님. 내가 사람은 잘 보지요."
가만히 듣던 탁천웅이 얼른 그녀의 편벽을 들어주자 소천악이 톡 쏘았다.
"아주 지랄을 해요. 네놈이 무슨 점쟁이냐? 어쩌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꼴이지."
"아씨! 정말 이렇게 무시할 거야요?"
"관두자. 그나저나 천웅이 너는 무조건 도와줄 거냐?"
"아니, 하나를 물어보고 승낙하면 도와줄 거야요."
"그게 뭔데?"
궁금해진 소천악이 묻자 들은 척도 안 하고 탁천웅은 거녀 옆으로 가 씩씩하게 말했다.
"이봐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 나랑 결혼해요."
"커헉!"
놀란 소천악이 탄성을 지르며 눈을 치켜떴다. 물론 가만히 듣던 거녀도 놀라움이 지나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망부석처럼 굳어졌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처음엔 분노의 기색을 띄우며 단방에 탁천웅을 때려죽일 기세를 보이더니 이내 안색을 바꿨다.
아무리 봐도 탁천웅이 자기 동생을 두고 장난치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탁천웅은 그 크나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초조한 기색으로 거녀를 바라보는 모습이 누가 보면 마치 키만 큰 어린애가 앙탈을 부리는 것과 흡사했다.
비록 어려운 처지였지만 그녀는 성내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유염독의 무남독녀 유옥여(劉玉如)였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겁니다."
"진짜인데요. 나도 장난 아닌데요."
탁천웅은 나름 심각하게 말했다. 그 말에 담긴 진실을 이내 알아챈 유옥여가 한동안 머뭇거리다 겨우 말했다.
"말씀은 고마운데 이건 절대 장난이 아니에요. 힘으로 상대할 적도 아니고 저들은 칼을 아무렇지 않게 사람 목에 휘두르는 잔인한 놈들입니다."
"어! 그런 놈 많이 봤어요. 다 때려눕혔지만."
"호호, 여기는 허풍이 통하는 곳이 아니어요."
처음으로 피식 웃으며 대꾸하는 유옥여를 보며 말주변이 변변치 않은 탁천웅 대신 소천악이 비집고 들어왔다.
"농담 아니오. 내 동생이지만 어지간한 무인들은 그 앞에서 무사하지 못하오. 적어도 저놈을 이기려면 구파일방에서도 이름난 초절정고수 두 명 이상은 덤벼야 승산이 있을까 말까요. 그건 내가 장담하오."
"아니, 그 말이 사실인가요?"
영 미심쩍다는 듯 반문하는 유옥여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소천악은 피식 웃으며 놀라운 말을 꺼냈다.
"사실이오. 나 소천악의 명예를 걸고 장담하오."
엄숙하게 말하는 소천악을 보며 낯익은 이름에 중얼거리던 유옥여가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이내 버럭 소리를 쳤다.
"소천악! 신의괴협 소천악 대협이 당신인가요?"
"그렇소."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소천악을 보며 유옥여는 얼굴 가득 희열을 내비치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소녀 유옥여가 강호에 위명이 자자하신 소천악 대협을 뵙습니다. 모르고 저지른 무뢰를 용서하시길."
"원래 모르면 황제 따귀도 때리는 법이오. 개의치 마시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들어나 봅시다."
깊은 관심을 표하는 소천악을 고마운 눈으로 바라보던 유옥여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저희 가문이 은자가 조금 있습니다."
"오, 은자라. 그걸 탐내는 무리가 있다는 말인가요?"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소천악을 보며 분노를 겨우 삼킨 유옥여가 말을 이었다.
"네, 대협. 겉으로는 보호해 준다는 말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 유가장을 고스란히 집어삼키겠다는 속셈이지요."
"아니 그런 놈들을 보고 정파에서는 가만히 있나요?"
분기가 오른 소천악의 물음에 유옥여는 슬픈 듯이 대답했다.
"그전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지금은 혈교가 준동하여 정파에서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탄 거지요."
"쥐새끼 같은 놈들이군요. 도대체 그놈들이 누구요?"
"적호방(赤虎幇)이라는 곳이지요. 이 지역에서 나름대로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방파랍니다. 일류고수가 즐비하고 방주는 비검혈도 형가위라는 절정고수이죠. 절정고수라지만 거의 초절정고수 반열에 들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두려운 듯 떨며 말하는 유옥여와는 달리 소천악은 천하태평이었다.
"허! 그런 웃기는 분들이 아직 숨을 쉬시고 계시다니. 역시 부처님은 무심한 모양이오."
얼핏 소천악의 눈가에 가는 살기가 섬전같이 스쳤다. 미처 그 눈빛을 못 본 유옥여는 간절한 표정으로 호소했다.
"소 대협! 도와주세요. 우리 장원 오십 명의 생사가 걸린 일입니다."
"하하. 아까 분명히 우리 천웅이가 도와준다고 했소만."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직 감사는 이르지요. 천웅이가 말한 부탁은 어찌 되나요?"
조용히 묻는 소천악의 질문에 유옥여가 얼굴을 붉히며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론 남녀 사이는 서로 마음이 통하고 호감이 있어야 비로소 혼인을 거론할 수 있다고 압니다. 어찌 초면에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아, 쉽게 생각합시다. 사람이 살다 보면 첫눈에 마음이 끌리기도 하는 법. 정이야 그저 살 부대끼며 살다 보면 자연적으로 생기겠지요."
황당한 논리를 펼치는 소천악을 바라보던 남매는 어이가 없었지만 감히 말대꾸할 용기가 없었다. 그들도 귀가 있어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는 위명과 악명(?)을 익히 알았다. 그들의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소천악이 호기롭게 외쳤다.
"자, 이제 장원에 갑시다. 원래 싸가지 없는 분들은 몽둥이가 보약이라오."
"아니 다른 무인들은 더 필요하지 않으신지요?"
"우리 형제면 충분합니다."
호언장담하는 소천악을 보며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유옥여였다. 이미 강호 소문을 통해 강북에서 이 두 형제가 세외강파인 대막살궁의 절정고수들을 짚단 넘기듯 꼬꾸라트린 전적을 잘 알았다.
"네, 믿지요. 천하의 소천악 대협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당연한 말씀이지요."
스스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르며 걸음을 옮기는 소천악의 재촉이 뒤따랐다.
"뭐 하십니까? 어서 장원으로 갑시다."
"네, 대협."
갑자기 얼굴에 희색이 돈 유옥여 남매가 쩔쩔매면서 길을 인도했다. 혹시나 도중에 마음이 변할까 봐 조바심을 치는 남매에겐 길이 멀어도 너무 멀어 보였다. 가까스로 도착한 장원은 멀리서 봐도 은자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장원 내에 줄지어 늘어선 고루거각이 유가장의 재력을 실감나게 했다.
소천악은 적잖이 감탄하며 유옥여에게 말했다.
"정말 부자시군요. 이 정도면 중원에서도 만만치 않은 거부의 대열에 무난히 들어갈 듯합니다."
"아버님이 평생 동안 피땀 흘려 쌓아올린 거랍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지킬 힘이 없다는 게 통한스럽지만요."
"자자, 맥 빠진 소리 그만 하시고 이제 제가 왔으니 만사는 술술 풀릴 겁니다."
자신 있게 말하던 소천악은 뭔가 허전함을 느끼고 두리번거리다 옆에 탁천웅이 없는 걸 보고 인상을 구겼다. 잠시 후 찾아낸 탁천웅은 어느새 장원 안에 있던 커다란 물가에 자리잡고 물속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속셈을 능히 짐작한 소천악이 혀를 차며 재빨리 다가섰다.
"천웅아, 낚시 생각하냐?"
"형님! 여기 노다지입니다. 물속을 보세요. 완전히 물 반 고기 반이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