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2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24화
나지문은 발작적으로 움막을 나와 고래고래 소리쳤다.
"소천악! 감히 개방을 무시하다니, 정말 네놈의 간덩이는 호랑이 간이라도 씹어… 커헉!"
말하다 말고 이마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가는 나지문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커다란 솔방울이 마치 비수처럼 틀어박혀 있었다.
"그 양반! 도무지 반성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하네."
멀리 나무 위에서 가볍게 투덜거리는 소천악의 음성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그는 나지문이 도망칠 때부터 쾌재를 부르며 지켜보던 터였다. 그가 자기의 욕을 하자 참지 못하고 옆에 달렸던 솔방울을 따자마자 냅다 집어 던졌다.
솔방울에 담긴 내력이 장난이 아닌 탓에 솔방울은 아예 이마를 파고들어 기절 직전으로 몰아갔다.
"크아악! 네 이놈! 두고 보자! 개방의 무서움을 꼭 보여… 아악, 내 보물!"
또다시 욕을 퍼부으려던 나지문 분타주가 또다시 치부를 솔방울로 정통으로 얻어맞고 고통과 절망감에 고래고래 악을 쓰는 그에게 음산한 전음이 들려왔다.
[시끄러워 죽겠네. 알 하나 터지니 그나마 조용하네. 또 떠들기만 해보시지요. 이번에 알과 더불어 덜렁이(?)도 뭉개버릴 테니까. 그리고 전음할 줄 몰라요?]
금방이라도 솔방울이 다시 날아올 것 같은 불안감에 얼른 대답하는 나지문의 심정은 차라리 죽고 싶었다.
[헉, 아니다.]
놀란 나지문이 급히 변명하자 소천악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혹시 태어날 때부터 구제불능성 반말 환자는 아니시죠?]
[아니오, 대협!]
[좋소이다. 하지만 지부장님의 실수는 용서가 안 됩니다. 오늘 밤 다시 대로변에 벌거숭이로 누워 있는 분이 누군지 궁금하군요. 자, 그럼 이따가 뵙시다.]
[대… 협!]
간절한 소망을 담은 나지문의 음성을 가볍게 무시한 채 소천악은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갔다. 알 터진 고통과 다시 닥칠 수치를 생각하니 절로 하늘이 아득해지는 나지문이었다.
소천악은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기분이다. 자신을 우롱한 자를 용서할 인내심이 그에게는 절대 없었다. 객잔에 들어선 그는 간만에 유쾌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그날 밤.
어김없이 다리 밑 개방 분타에 나타난 소천악은 의외의 모습에 잠시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분타주 움막 안에 들어서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나지문이 보였다.
"아니 지금 동정심 유발하려는 거요?"
"아니외다, 대협! 제가 잘못했소이다. 깊이 반성하니 한 번만 용서를 바랍니다."
치욕에 몸을 떨며 차마 안 떨어지는 입으로 이야기하는 나지문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겼다. 그 심정을 대충 짐작한 소천악은 잠시 망설였다.
"이런 제길! 이리 나오시면 대로변 구경이 조금 껄쩍지근할 듯하외다."
"대협! 한 번만 봐주십시오. 이제 하나 남은 알마저 터지면 전 이세 하나 생산하지 못하는 고자 신세입니다. 대로변에 벌거숭이로 눕혀놓아도 좋습니다. 제발 알만은!"
"크음! 이거 참."
"대협! 이미 사발통문을 돌려 아수라협이란 별호를 바꿀 소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음, 뭐라고 하셨소?"
"홍수에 백성을 구한 것과 단목세가의 일화를 낱낱이 홍보하고 천축에서 보여준 무공을 열심히 전파하란 통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대협께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맨발로 뛰어나가 앞장서지요."
식은땀을 흘리며 호소하는 나지문의 말에 만족한 소천악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음, 이리 나오니 좋소이다. 넘어가기로 하지요. 단 거짓이 밝혀진다면 이번엔 알이 아니고 아예 사지를 분질러 드리겠소이다."
"여부가 있겠소이까, 대협!"
감지덕지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나지문의 얼굴에는 희열이 새겨졌다. 이제 잘하면 대로변에서 알몸으로 난리칠 일도 없고, 하나 남은 알을 무사히 보존하는 일도 이룰 수 있다는 기쁨에 얼굴이 환히 펴졌다.
"그런데 거지님 주제에 어떻게 여자를 구했소이까?"
"저기 주루에 있던 퇴기인 매옥이란 여자를 배필로 맞이할 날이 이제 불과 한 달 남았습니다."
"어호, 재주가 좋소이다."
"말도 마시지요. 무려 오 년을 공을 들인 끝에 겨우 이룬 일입니다."
"거지 인생의 인간승리는 일단은 축하드리오."
"고맙소이다."
"그리고 약소하나마 이건 결혼선물이오. 아마 다친 알을 고치는 데 좋을 것이오."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낸 건 다름 아닌 백의신의가 전해준 약이었다. 정기 보전과 치부 치료에 특효약이라는 명약이었다.
"고맙습니다, 대협!"
나지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개방의 분타주답게 그는 내민 약이 어떤 건지는 익히 짐작했다. 사양지심은 자신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였다. 얼른 손에 받아 혹시 다시 뺏어갈세라 얼른 목구멍으로 넘겼다.
바라보던 소천악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제발 분타주님이 하신 말이 진실이기를 바랍니다. 혹시 거짓이면 이번엔 알이 문제가 아닐 거란 걸 명심하시길 바라오. 물론 결과야 본인이 지는 거지요."
"헉."
놀란 나지문이었다. 사실 사발통문은 작성만 했을 뿐 아직 돌리지는 않은 처지였다. 혹시나 저놈이 해코지를 할 때를 대비해 비장의 선택으로 숨겨놓은 것이었다.
"여봐라!"
급히 부르는 나지문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개방도 하나가 들어서자 얼른 서찰을 주며 말했다.
"이 통문을 어서 전 개방 분타에 보내라. 지급이니 특급선을 이용해라."
"네, 분타주님!"
비상 상황인 줄 착각한 개방도가 서둘러 나가자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나지문이었다.
"지독한 놈! 마지막까지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놈이야."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 나지문의 마음은 하루 사이에 십 년은 족히 가슴 졸이고 산 기분이었다. 과연 강호를 위진시키는 신의괴협이란 별호는 만만한 이름이 아닌 걸 뼈저리게 느꼈다. 생각해 보니 어제 일어난 설사 소동도 왜인지 짐작이 갔다.
부르르 떠는 그의 얼굴은 후회감이 가득했다. 저지른 일을 수습할 길이 참으로 멀고도 멀어 보였다.
골치를 썩이는 나지문과는 달리 상쾌한 기분으로 냄새나는 움막을 나선 소천악은 객잔으로 움직였다. 불과 백여 장을 걸어다가 우뚝 선 그의 입이 열렸다.
"절 찾아오신 손님이신가 본데 나오시지요."
소천악은 움막을 나설 때부터 인기척이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걸 느끼고 있었다.
"허허, 과연 대단한 실력이구먼."
갑자기 허공에서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만 이내 두 사람이 조용히 눈앞에 나타났다. 언제 움직였는지 알기 힘든 절정 이상의 경공술이다. 하나 소천악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저 정도면 절정고수급이 놀랄 정도였지 그의 감각을 긴장시킬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개방도의 복색인 누더기에 허리춤에 여덟 개의 매듭이 매어져 있는 게 보였다. 천하제일의 정보망을 자랑하는 개방의 장로급이란 표식이었다. 피식 웃음을 지은 소천악이 스산하게 물었다.
"개방의 장로님이시군요. 설마 제게 방금 전의 훈계를 질책하러 오신 겁니까?"
"껄껄, 그 일도 알아야만 하지만 지금으로선 사소한 일이라고 보네. 자네가 우리 개방도를 죽인 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핍박할 수는 없지. 일단은 다만 아수라협이라 불리는 소천악이란 자네를 알아보러 왔지."
반말은 나이를 봐서 이해해도 듣기 싫은 명호를 서슴없이 부르는 개방장로의 말에 기분이 몹시 상한 소천악의 말이 곱게 안 나갔다.
"아수라협이라! 그건 잘나신 개방에서 사방에 흩뿌린 소문에 기인된 명호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듣는 제 입장에선 별로 기분 좋은 명호가 아니지요."
"흠, 그런가!"
나이와 신분을 앞세워 제압하려던 개방 장로가 찔끔했다.
"그렇죠. 아수라가 무슨 뜻입니까? 악마란 이야기 아닙니까? 장로님은 자신을 악마로 몰아붙이는 문파와 좋은 기분으로 만날 수 있습니까?"
"커험!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난 개방의 집법장로인 귀타신개 뇌가도(賴軻度)라고 하고, 저분은 개방의 대장로이신 혈염개 녹류강(綠流剛) 어르신일세."
"그렇습니까? 전 신의괴협 소천악이라 하는데 대개방에서 아수라협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합디다. 만나뵈어 영광이었습니다만 소생이 바쁜 일이 있어 다음에 만나면 정식으로 인사드리지요. 그럼 이만."
"이런 무례한!"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전 저를 비하하는 문파와는 더 이상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감히 네놈이 개방의 대장로님을 무시하느냐?"
"정말 웃기십니다. 황제 앞에서도 당당했던 접니다. 언제부터 개방이 황제 폐하보다 위에 있었습니까?"
"허어!"
기가 막힌 뇌가도가 말문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차가운 미소를 짓던 소천악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순간 뒤에 있던 개방의 대장로인 혈염개 녹류강이 너털웃음과 더불어 말을 꺼냈다.
"허허, 이보시게. 잠시만 기다리시게."
나이가 칠순을 넘긴 노인네의 말인 데다가 개방이란 이름은 강호를 횡행하기 위해서는 무시하긴 어려운 처지의 소천악이다. 마지못해 돌아서 예를 갖추고 물었다.
"후배에게 가르침이 남으셨는지요?"
"허허, 역시 혈기가 넘쳐 성질도 급하구먼. 그러지 말고 잠시 나와 이야기나 나누세."
"말씀은 고맙지만 아까 말했듯이 저를 고약하게 만든 문파의 어르신과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을 듯합니다."
깍듯하게 말이야 하지만 이미 심기가 상한 소천악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는 없었다. 녹류강 대장로가 그 기분을 모른다는 건 노강호답지 않은 이야기다. 당연히 그의 입에서 노련한 접대용 언어가 현란하게 구사됐다.
"허허, 이 늙은이가 이렇게 다시 부탁해도 거절하면 어쩌나!"
소천악은 더 이상 거절하면 어려워진다는 걸 느끼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러시다면 후배 귀를 열고 경청하겠습니다."
"고맙네. 일단 저쪽에 가서 앉아서 이야기를 하세."
"그러시지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내는 녹류강을 보며 잘못하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 예감이 든 소천악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역시나 바로 정곡을 찌르는 녹류강의 질문이 터졌다.
"하나 묻겠네. 강호에선 자네를 정사지간의 인물이라고 한다네. 거기에 대해선 어떤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정이나 사나 다 인간이 만들어낸 고정관념이라는 제 주관입니다."
거침없이 대답하는 소천악을 바라보며 녹류강은 만만한 일이 아님을 느꼈다.
"허허, 그런가? 내 자네의 행적에 대해서 유심히 살펴본 결과 그다지 악행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결론일세. 물론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은 있었지만 말이야."
"그것도 다 선배님 생각이시니 제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요."
"거참, 대단하이! 내 비록 대단한 명성은 얻지 못했으나 개방의 대장로란 이름은 함부로 대할 신분이 아닐세."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황제에게도 버틴 접니다. 신분으로 절 핍박하시면 전 선배님이 아닌 강호무인으로 대할 겁니다."
강단 있게 터져 나오는 소천악의 말에 일견 감탄과 다른 편으로는 괘씸한 생각도 살짝 기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