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20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20화
한마디로 천하가 진동할 난세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걸 어지간한 노고수들은 직감했다. 물론 무림세가 중 손꼽히는 성세를 자랑하는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한이 그 낌새를 모를 리 없었다.
여태껏 누려왔던 평화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아차 하면 멸문이 기다리는 풍운의 시기를 맞이해 고심에 고심을 하느라 흰머리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형편이었다.
시원치 않은 동반자라도 구하고픈 심정인데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듯 손안에 들어온 소천악을 호락호락 내칠 리가 없었다. 조용히 바라보던 남궁한 가주가 가벼운 화제를 들고 나왔다.
"허허! 듣자하니 소 대협이 아내감을 찾아 중원을 떠돈다는 뜬소문이 있더이다."
"소문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아니 정말 부인감을 찾아 강호에 나오신 게요?"
그저 인사치레로 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소천악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소천악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거침없이 대답하는 소천악의 말에 남궁한 가주는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을 생각도 잊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사내대장부로서 천하를 휘몰아칠 야망은커녕 여자 하나에 목표를 걸다니 어리석은 놈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허, 뜬소문인 줄 알았더니, 이거 참!"
"누가 뭐라 해도 남자라면 당당하게 자신의 목표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사부님에게 배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혈사부는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욕지거리 아니면 약올리기만을 구사한 사부였다. 다만 나름대로 강호경험과 심자앙 책사를 보며 배운 대로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법을 배운 달콤한 언변이었다.
"하긴 인생의 목표란 사람마다 다 다르니 뭐라 하는 것도 그렇소만 천하를 질타하는 영웅이 되어볼 생각은 없소이까? 그리만 한다면 내 기꺼이 옆에서 도움을 주겠소만."
유혹의 손길은 은밀하고 조용히 소천악에게 다가왔다. 보통 남자라면 바로 넘어갈 만한 속삭임이지만 불행히도 상대는 상식을 벗어난 인물이었다. 가만히 듣던 소천악이 칼날같이 대답했다.
"말씀은 고마우시나 아직 그쪽에는 뜻이 없소이다."
"허, 거참!"
입맛을 다시며 남궁한은 이 방법을 접기로 했다. 아무리 유혹해도 소용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가주답게 포기도 빨랐다.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아직 그에게는 펴보지 않은 마지막 승부수가 있었다.
남궁수란!
그의 하나뿐인 귀한 딸이자 강남제일미로 천하에 미명을 떨치는 미녀가 여기 남궁세가에는 있었다. 그 승부수를 내기 전에 하나를 시험해야 했다.
"허허, 소 대협! 듣자하니 무공이 절정을 넘어 초절정에 이르렀다는 소문인데 한번 보여주실 수 있겠소?"
가만히 남궁한의 말뜻을 파악하던 소천악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지요. 단 검을 들고 오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소이다."
"아니 단지 비무만 하라는 이야기지 생사결전을 하라는 말은 아니외다."
"음, 이건 제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라 장담하기가 그렇네요. 무인이 뭐 시험할 게 뭐 있습니까! 강하면 살고 약하면 죽는 게 무림인의 숙명이지요."
나름대로 부드럽게 말하는 소천악이나 듣는 자로서는 모골이 송연했다. 쉽게 말해서 보여줄 수는 있지만 목숨을 걸어라, 이 식이었다. 이미 초절정이라 암암리에 소문난 그를 상대할 이는 천하의 남궁세가라 할지라도 전대 가주 외에는 없는 처지였다.
무공을 알아보려면 세가의 고수 한 명을 죽여야 한다는 논리에 남궁한의 말문이 콱 막혔다.
"허허! 살벌하시구려. 그저 비무나 하며 세가고수의 안목을 넓히려는 뜻이건만."
아쉽다는 듯 말하는 남궁한을 보며 소천악의 내심은 걸렸다 하는 심정이었다.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정 가주님이 그리 나오시면 간단한 내기라도 거시지요. 세가의 고수와 비무할 때 오 초 내로 제가 제압하면 남궁수란 소저와 함께 차 한 잔 마실 영광을 주시는 걸로. 그렇게만 해주시면 비무인데 목숨이야 걸겠습니까!"
"응! 수란이와?"
뚱딴지같은 제안에 잠시 머쓱해졌던 남궁한은 이내 소천악의 내심을 짐작하고 실소를 머금었다. 거절하기 힘든 조건을 제시하고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그 능구렁이 같은 마음이 절로 느껴졌다.
어이없이 바라보던 남궁한이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어디 소 대협이 우리 수란이와 차 한 잔을 마실 자격이 되나 시험해 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수란 소저는 폐관수련 중이 아닌가요? 경비무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던데요."
"그거야 하도 우리 수란이의 미모가 출중하여 늘 청년영웅들이 만나기를 흠모해 부득이하게 거짓말을 한 것이외다."
"다행이군요. 혹시 내기에 이겨도 몇 달을 기다릴까 봐 적잖이 걱정했습니다."
"허허, 자, 그럼 연무장에 가십시다."
남궁한 가주는 끝까지 이십 년이 넘게 어린 소천악에게 반존대를 잊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그의 내심은 만약 기대 이하인 경우 철저히 능멸해 버리리라는 속셈이 똬리 틀고 앉아 있었다. 연무장은 전각 옆에 백여 장에 가까운 거대한 규모로 설치되어 있었다.
바닥을 청석으로 깔아 보기에도 시원해 보였고 연륜을 자랑하듯 군데군데 이끼가 끼어 있었다. 그 단단한 청석 곳곳이 파여 있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비무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했다.
"자, 소 대협! 여기가 우리 세가의 비무장이오."
"놀라운 규모군요. 과연 대남궁세가의 성세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는 소천악의 말에 남궁한의 입가에 새겨진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총관! 가서 남궁세가의 자랑인 창룡검대를 데려오시오."
"네? 전부 말입니까?"
"아니 그럼 소 대협을 무시하고 한 명만 데려오려고 하셨소? 창룡검대 모두에게 하늘 높은 줄 깨달게 해야지요."
"존명!"
돌아가는 이야기가 묘한 여운을 풍기는 걸 소천악이 감지했다. 이건 말이 비무지 남궁세가에서 자신을 엿 먹이려고 하는 계략이 분명했다. 사실 크게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남궁한 가주의 속셈은 의외로 간단했다.
소천악이 창룡검대를 이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섭해 세가의 버팀목을 만들고, 지면 강호에 다시 한 번 창룡검대의 위명을 떨치게 되는 일이니 손해날 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지략에서 나온 비무 제의였다.
창룡검대!
실질적인 남궁세가 핵심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가전검법인 창룡무애검법부터 시작된 세가의 비전검술을 이십 년 가까이 고련해 온 자들이다. 하오문에서 받은 서찰 내용을 되새기던 소천악의 이마가 깊은 내천자를 만들어갔다.
소리장도(笑裏藏刀) 같은 느낌이다. 보아하니 말로는 호감을 표시하고 뒤로는 개망신을 안겨줄 속셈이 분명했다. 한마디로 중원천지에 대명이 자자한 자신을 무참하게 뭉개버리고 남궁세가의 성세를 더욱 과시할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옅은 비웃음을 입가에 단 채 소천악이 차갑게 비꼬았다.
"이거 영광입니다. 제가 감히 남궁세가의 창룡검대와 비무를 하게 되다니!"
"허허, 부디 우리 무인들에게 호연지기를 잔뜩 심어주시길!"
역시 가시에 가시로 응대하는 남궁한이다. 확실한 마음을 짐작한 소천악은 잠시 가졌던 호감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걸 느껴야만 했다.
강호무림이란 음험하고 잔인한 인간군상이 득실거린다는 혈사부의 탄식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초반의 좋은 인상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투지란 괴물이 뇌리를 감도는 순간 멀리서 무사들의 움직임이 감각에 잡혔다. 예리하게 기감을 높여보니 일류를 넘어 절정 초입에 다다른 고수라는 게 직감됐다.
찰나의 여유가 지나자 연무장에 나비가 내려앉듯 사뿐하게 모습을 드러낸 열 명의 고수가 어깨를 숙이며 말했다. 하나하나가 예사 무인은 아닌 듯 날카로운 예기가 온몸에서 풍겼다.
"21대 창룡검대 제일대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우렁차게 소리치는 자 중 맨 앞에 자리한 사람은 남궁철(南宮鐵) 창룡검대 일대주였다. 창룡검대는 총 삼 대로 구성된 세가의 정예였다. 남궁세가가 수많은 고비를 넘기는 데 그들의 역할은 참으로 지대했다. 다른 문파에서 감히 남궁세가를 넘보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가 이들의 존재란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었다.
자부심이 섞인 그들의 모습에 남궁한이 듬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수고했다. 오늘 너희들이 강호에 위명이 쟁쟁하신 아수라협 소천악 대협과 비무를 할 것이다. 어렵게 받아낸 승낙이니 아무쪼록 많이 배우길 바란다."
"존명!"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강호는 나이보다 무공실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이니 혹여 소 대협의 나이가 어리다고 방심하는 자가 없길 바란다."
말뚝을 팍팍 박는 남궁한의 말은 소천악의 비위를 있는 대로 건드렸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뒤집어보면 어린놈이 명성 조금 얻었다고 기고만장하니 적당히 주물러주라는 의미라는 게 확 귀에 들어왔다.
소천악은 말싸움을 즐겨 하는 위인이 아니었다. 가주의 말이 끝나자 훌쩍 연무장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절정의 신법이라기보다는 마지못해 다가선다는 기분이 여실히 드러나게 행동했다.
청석의 딱딱한 감촉을 발로 느끼며 입이 천천히 열렸다.
"반갑소이다. 강호무림에서 신의괴협이라는 과분한 명호를 받은 소천악이라 하외다. 본시 무인이란 입보다 무공으로 검증하는 법! 자, 신명나게 놀아봅시다. 오늘 남궁세가의 정예란 창룡검대의 위용을 온몸으로 받아보겠소이다."
"이런."
도발적으로 나오는 소천악을 보며 남궁철을 비롯한 창룡검대 일대원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도전적으로 나오는 소천악의 말뜻을 모를 리 없었다. 노화를 애써 참고 남궁철이 싸늘하게 말했다.
"조심하시오. 마음은 몰라도 검은 인정이 없소이다."
비위가 뒤틀린 소천악의 입에서 좋은 응대가 나올 리 만무했다.
"후후! 그 말 후회하지 않소이까? 귀하의 검만 인정이 없는 게 아니라 제 검도 눈이 없어 아무 데나 벨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말투에 깔린 스산한 살기를 느낀 남궁철이 순간 움찔했다. 그뿐만이 아니고 나머지 창룡검대는 물론 멀리 떨어져 있는 남궁한마저 등골이 순간 서늘해졌다.
호기를 잔뜩 부린 남궁철의 도발적인 말이 소천악을 심하게 자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궁한은 연이어 피어오르는 거센 기세에 절로 다급해졌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 날아간 상태!
이젠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궁한 가주는 창룡검대를 믿었다. 아직껏 강호에서 별다른 적수를 찾기 힘든 세가의 정예 중에 정예였다.
과연 그의 기대대로 남궁철을 비롯한 창룡 일검대는 검진을 형성하여 소천악을 압박해 갔다.
"소 대협! 조심하시구려."
"후후! 걱정도 팔자요. 어서 오시구려. 제가 오늘 강호가 넓음을 보여주지요."
일부러 자극적인 말을 구사하는 소천악이었다. 이미 심기가 상한 그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는 만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