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18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18화
"저런! 소 대협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인 소천악의 위기를 바라보는 눈길에 안타까움이 그득 담겨 흘렀다. 소천악마저 무너지면 또다시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지옥 같은 수발을 들어야 하는 신세에 가슴이 철렁했다.
주먹 한 번에 돌이 깨지고 나무가 산산조각나 허공에 휘날렸다.
하지만 무서운 공세를 맞이하던 소천악은 오히려 피식 웃으며 내력을 끌어올려 정면으로 두 손을 쭉 내밀었다.
쿵! 쿵! 쿵!
마치 커다란 바위끼리 부딪친 소리처럼 굉음이 들리며 소천악과 탁천웅이 정면충돌했다. 덩치가 탁천웅에 비해 반도 안 돼 보이는 소천악이지만 한 치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마치 태산처럼 굳건하게 제자리에서 달려든 탁천웅의 신력을 감당해 낸 소천악의 표정은 초지일관 담담했지만 내심 약간은 놀랐다.
내력을 좀 더 올렸지만 신력이 장난이 아닌 게 손바닥이 여전히 찌르르 저려왔다. 역시 무식한 외공이라는 생각에 정면대결은 별로 유익하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두렵지는 않아도 성가실 정도의 힘이었다.
결정을 내린 소천악이 빠르게 옆으로 회전하며 몸을 빼돌렸다. 잠깐의 공백이었지만 힘차게 주먹질하던 탁천웅이 허공에 날린 주먹의 헛고생에 순간 휘청거렸다. 허점을 본 소천악의 눈이 번쩍이며 음산하게 경고했다.
"자, 이제 얻어맞을 시간이오. 잘 버티길 바라오."
비아냥거림 소리가 탁천웅의 귀에 들리자마자 육중하게 가슴을 강타하는 연속적인 권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크헉!"
낮은 신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으나 여전히 고통은 지속되었다. 찰나지간에 무려 열두 번의 내공이 남긴 소천악의 권이 연이어 격중되었다.
"크아악."
견디기 힘든 고통에 처절한 비명이 탁천웅의 입을 타고 나왔으나 소천악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번에는 발로 무릎 뒤를 섬전같이 강타했다. 물론 변함없이 열두 번을 두들겨 팼다.
퍼퍼퍽.
처음이나 나중이나 똑같은 강도로 날아든 소천악의 발길질에 탁천웅의 무릎이 절로 꺾이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아파~."
거한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상상하기 힘든 어린아이의 말투였다. 소천악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쳐다보았다.
혈사부는 열 번 패면 된다고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번을 더 때렸다. 혹시나 그새 무공이 발전했을 때를 대비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열 번이면 충분한데 두 대를 더 얻어맞은 탁천웅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소리 질렀다.
"아파~ 왜 때리고 지랄이야~ 말로 해. 말로."
"얼씨구! 좀 전까지는 당신이 지랄했잖아요."
어이없다는 소천악의 말에 탁천웅은 조금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나는 때려도 되지만 너는 안 돼!"
"왜 안 돼요?"
"음, 그건~ 네가 더 세잖아. 원래 세면 약한 사람 봐주는 거야. 나도 쟤들 봐줬잖아."
"누가 그러디요?"
어이없어 묻는 소천악에게 당당하게 대꾸하는 거한이다.
"사부님이 그랬어."
"거참, 골치 아픈 사부님이네. 혹시 사부님 명호가 철신마 아니신가?"
"헉, 우리 사부를 알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탁천웅을 바라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덩치 큰 어린애를 데리고 노는 기분이었다. 왠지 더 이야기를 나누고픈 마음에 넌지시 제안했다.
"잘 알지요. 이리로 와보시지요."
걸어가는 소천악을 보고 잠시 고민하던 탁천웅은 마치 어린애처럼 졸랑졸랑 따라왔다. 아무도 없는 곳임을 확인한 소천악이 말했다.
"혹시 사부님이 객잔에서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 안 하던가요?"
"헉! 그걸 어떻게 아냐?"
"흐흐! 두들겨 팬 분이 내 사부님이시지요."
"그럼 혈… 크악!"
나와선 안 되는 말이 나오자 번개같이 소천악의 발이 탁천웅의 복부에 꽂혔고 비명이 터져나왔다.
"말조심하시지요."
"알았다."
복부를 쓰다듬으며 탁천웅이 힘겹게 말하자 소천악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놀라운 외공을 지녔으나 아차 하면 죽음이 도사리는 곳이 강호지요. 부디 몸조심하고 다시는 그 이름을 입 밖에 떠올리지 않는 게 신상에 좋소. 약속할 수 있소?"
"응, 약속해. 그리고 사부님이 이 말도 했어. 나를 제압하는 사람을 평생 형님으로 모시고 살라고."
"뭐라고요?"
엉뚱한 소리에 뒷골이 뻐근해진 소천악이 다급히 묻자 이번에는 탁천웅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부님이 그랬어. 넌 미련하니 이용당하다 죽을 염려가 크다고. 그러니 센 사람 만나면 무조건 형님으로 모시고 살면 오래 산대."
"크! 철신마 그 양반이 완전히 강호에 대해 통달하셨군."
고개를 저으며 소천악이 중얼거리자 탁천웅은 얼른 옆에 왔다.
"형님!"
"헉, 형님? 몇 살이오?"
"몰라! 일 년 전에 사부님이 스물일곱이라 했어."
"엥? 스물일곱?"
놀란 소천악이 새삼스레 탁천웅의 전신을 세세히 살펴봤다. 자세히 보자 나이 든 티가 나긴 났다. 처음엔 덩치 탓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줄 알았지만 그 나이에 맞는 얼굴임이 분명했다. 살짝 고민스러운 소천악이다.
보아하니 고집이 쇠심줄임은 분명하고 저리 다니다 외진 곳에서 고혼이 되기 딱이었다. 말도 반말지거리니 재수 없게 초절정고수를 만나면 맞아죽기 딱 좋은 자였다.
왠지 호감도 들었지만 요는 나이였다. 절대 저자를 형으로 모실 생각은 없던 소천악이 빠르게 잔머리를 굴려 말했다.
"좋아, 동생으로 받아주지. 그리고 네 나이는 이제부터 21살이야. 알았나?"
바로 반말로 나가는 소천악을 보며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희희낙락한 탁천웅이 얼른 대답했다.
"응, 내 나이는 이제부터 21살이야. 형님!"
"제길. 그래도 님 자는 붙여주네."
"응, 사부님이 형 만나면 꼭 님 자를 뒤에다 붙여야 오래 산다고 했어."
"흐! 사부가 역시 제자보다야 낫네. 그러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거지?"
"응. 원래 난 시키면 잘해."
"좋아! 이리로 와봐라. 동생을 삼으려면 형이 무언지는 알려줘야지."
"네, 형님!"
탁천웅은 언제 덤볐냐는 듯이 설설 기며 소천악을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는 기색이다. 탁천웅의 귀에 스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고로 형님이란 유사시엔 부모님과 같은 존재니라. 알겠나?"
"알았다."
여전히 반말로 대답하는 탁천웅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소천악이 말을 이었다.
"형님이 하신 말은 꼭 지켜야 하고 설령 마음에 안 들어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 알겠지?"
"염려 마라."
"그리고 앞으로 형님이 말씀하신 거 대답할 땐 무조건 끝에 '요' 자를 붙여라."
"알았다… 요."
살기를 뿜어내는 소천악의 서슬에 흠칫한 탁천웅이 얼른 '요' 자를 붙였다.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탁천웅의 어깨를 툭툭 치는 소천악이다. 물론 키 차이가 있어 까치발을 들고서야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래! 그 마음이면 우리 형제는 잘 지낼 수 있어."
"알았다… 요."
"자, 그럼 형님 사부에 대해서는 절대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걱정 마… 요. 에이 씨! 요 자 붙이긴 힘들다."
투덜대는 탁천웅을 바라보던 소천악이 딱 잘라 말했다.
"그래도 해!"
"알았다… 요."
단단히 주의를 준 후 소천악은 다시 산채로 돌아왔다. 이미 산채 무리는 모두 소천악의 무공에 제압되어 일제히 그의 입만을 주시했다.
산채주 휘지경을 불러 이야기를 나눈 소천악은 순조롭게 마무리한 채 드디어 녹림 정리 작업을 완료했다.
휘지경 채주 이하 녹림도의 열광적인 환송 소리와 함께 마지막 산채를 나서는 소천악의 발길이 가벼워졌다. 얼떨결에 동생 하나를 얻었지만 손익을 따져보면 당연히 득이었다. 초절정고수를 동생으로 두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종 막주님! 이제 막주님은 웅비표국에 돌아가셔서 총표두 일을 해주셔야겠습니다."
"헉, 총표두요?"
"겨우 그거 가지고 놀라시면 안 되지요. 이제 웅비표국은 중원 각지에 분국을 만들 것이니 막주님의 지위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을 겁니다."
"이런 광영을 주시다니, 정말!"
"조그만 보답입니다. 막주님이 아시다시피 제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표국을 직접 보살피지 못합니다. 특히 소대영 일가를 아무쪼록 잘 부탁하겠습니다."
드디어 소천악의 입에서 소대영 이름이 나오자 종천리는 내심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혈육 돌보듯이 하지요."
"흠, 그거 하나면 됩니다."
고개를 살짝 돌리는 소천악의 눈망울에 이슬 같은 게 비쳤다. 아무도 모르는 그만의 아픔이었다. 혈사부에서부터 이어진 무림공적의 운명과 자신이 저지른 일이 많은 걸 모르지 않았다.
당장 부모 앞에 나타나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혹시 모를 불상사를 사전에 예방하는 기분으로 떠나는 게 도와주는 일일 성싶었다. 아무리 자신이 무공이 강하다 해도 아직은 무림공적 제자였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정파에서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아차 하면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마음에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린 소천악이다.
그 마음을 인생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는 종천리는 처음으로 안쓰러움을 느끼며 말했다.
"마음이 안 좋으시죠?"
위로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진 소천악이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는 건 안 되지요. 하지만 제 의지로서 한번 바꿔보고픈 마음도 드네요."
의미심장한 소천악의 말에 조용한 미소로 답하는 종천리였다. 한때 사람을 죽이던 살수였지만 막상 은퇴를 하고 보니 평범한 중년 남자로 보일 뿐이었다.
우뚝 서 서로를 주시하는 두 사람 사이에 미운 정 고운 정이 조용히 흘러넘쳤다. 이별이 길어질 듯하자 아무래도 인생경험이 많은 종천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자, 그럼 전 이만 웅비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고 다시 뵐 때까지 편안하게 지내시길."
"종 막주님도 잘 지내세요. 천웅아, 가자!"
일부러 딱딱하게 대답한 소천악은 훌쩍 신형을 뽑아 올려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멍하니 바라보던 종천리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나왔다.
"쯧쯧! 혈육을 보고도 그냥 가야 하는 강호의 비정함이란."
쓸쓸하게 발길을 돌리는 그도 강호무림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뇌리를 지배했다.
소천악은 반은 홀가분하고 반은 찝찝한 기분을 달고 제비가 땅 위를 차듯 빠른 속도로 신형을 움직였다. 답답한 마음에 시원한 질주라도 하고픈 마음이다. 달리면서 머리에 떠오른 건 이 기분을 지울 수 있는 일이었다.
덕분에 옆에서 따라오던 탁천웅은 죽을 맛이었다.
"형님, 천천히 가자요!"
버럭 소리치는 말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소천악이 옆을 돌아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탁천웅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허둥지둥 따라오는 게 보였다.
"그래. 여기서 잠깐 쉬자."
"제길! 형님 하나 만들었다가 숨막혀 뒈지겠다요."
투덜대는 탁천웅이 털썩 땅에 주저앉자 옆에 서서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서찰을 꺼내 들고 유심히 살펴봤다. 그의 보물 중에 으뜸이 아니라면 서러운 귀중한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