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16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16화
이미 완전히 굴복한 곡무영 부채주는 아무런 지체 없이 대답했다.
"끙, 알겠소이다. 발 빠른 놈으로 보내지요."
"역시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탄 동료요, 하하! 자, 이제 마지막 일처리를 해야지요."
시원하게 웃는 소천악은 곡무영 부채주를 데리고 창고에 처박혀 있는 관취 채주에게 갔다. 곡무영은 채주를 보자 가슴이 서늘해져 어쩔 줄 몰랐다. 소천악은 바로 아직도 의식불명인 상태로 누워 있는 관 채주를 바라보며 달콤하게 유혹했다.
"곡무영 부채주님! 이제 만년 이인자에서 벗어나 채주가 돼야지요. 안 그래요?"
"헉, 채주라뇨?"
놀란 곡무영이 소리를 지르자 빙긋 미소짓던 소천악이 말했다.
"아, 사내대장부가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시중을 들 생각이십니까? 모름지기 사람이란 기회를 잘 잡아야 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려운 일입니다. 녹림삼십육채는 모두 총채의 관리를 받습니다. 녹림총채주가 승인하지 않으면 채주가 되기는 힘듭니다."
"저도 다 알아봤습니다. 채주란 자리는 녹림도로서 녹림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자는 거의 승인한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채주님이 버젓이 살아 있는… 크헉!"
말하다 말고 곡무영 부채주는 놀라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어느새 소천악이 번개같이 관 채주의 단전을 발로 툭 차는 모습에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앞으로 쏠렸다. 가벼운 발길질이지만 이미 관취의 단전은 파괴되어 일반인으로 돌아갔다.
"자, 이러면 채주가 공석이네요. 설마 무공도 모르는 자를 채주로 받들 생각은 아니겠지요?"
"아니, 이러시면."
"저자가 무기를 들지 않았으니 죽이지는 않겠소. 뭐 굳이 죽이시겠다면 말리고픈 마음은 절대 없소이다. 저라면 뿌리를 뽑는다는 심정으로 싹 보내버리겠소이다만."
"허!"
장탄식을 내뱉는 곡무영 부채주는 소천악의 독심에 절로 몸이 떨려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채주가 된다 생각하자 역시 제거가 상책이란 결단이 서서히 가슴에서 올라왔다.
"자, 그럼 총채에 채주의 부재를 알리고 채주 자리에 오르시지요. 누가 뭐라 하면 이리 말하세요. 저자가 무례하게 굴어 신의괴협이 징벌했다고 말하면 아무도 채주님을 탓하지 않을 겁니다. 축하합니다, 곡무영 채주님!"
"대협은 녹림의 복수가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무려 일만이 소속된 거파입니다."
걱정스러운 곡무영의 말에 무신경하게 대꾸하는 소천악이다.
"무섭긴요. 수많은 녹림인들을 다 죽일 수는 없어도 그 명령을 내린 분을 죽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요. 명령 내리라고 하세요. 녹림총채주고 나발이고 바로 저승구경을 시켜주지요."
"정말 대협은!"
입을 아 벌리는 곡무영에게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하고픈 충동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적벽채 일은 마무리된 채 소천악은 개운하게 발길을 돌렸다. 따라오던 종천리는 놀라운 일처리에 내심 깜짝 놀랐다.
"대주님! 녹림이 가만있을까요?"
"그분들이 무슨 명분으로요? 먼저 욕하고 난리친 게 관 채주 아닙니까? 무림은 철저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땅이지요. 욕먹고 고개 숙이는 건 약자가 하는 짓이지 제가 할 일은 아니지요."
"거참, 논리가 희한하지만 얼핏 들으면 그럴듯은 하네요."
"내 주관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오라고 해요. 모조리 황천길로 보내버리지요."
소천악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갔다. 이미 곡무영 채주에게 가까운 산채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받은 터라 길을 잃고 헤매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곡무영 채주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 녹림도에 의해 소천악의 만행에 대해 다른 산채의 채주들도 들었다. 각 채주들은 온몸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관취 채주의 무공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채주들이었다. 자신들보다 두 단계 이상 고수인 그가 손 한 번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제압되어 무공이 폐쇄되었다는 말에 얼떨결에 단전을 두 손으로 가리는 진풍경을 선보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녹림삼십육채에 속하는 거대한 적벽채도 힘없이 무너진 판에 소규모 산채들이 겁 없이 저항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초면에 부드럽게 존대까지 하는 소천악의 미소에 다들 오금이 저려 얼른 협조하기로 하고 산채에서 나름대로 고수라 일컬어지는 한 명을 표사로 보내기로 약속했다.
제4-4장 동생을 얻다
가는 데 시간이 걸릴 뿐 막상 일처리 시간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뤄졌다. 보름의 시간이 지나자 앞으로 웅비표국이 출행할 길에 자리한 모든 산채가 제압되어 갔다. 유유히 걷던 소천악이 유쾌한 듯 말했다.
"이제 하나 남았나요?"
"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요. 산적을 털어먹는 전문 직업인으로 나서셔도 대성하시겠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해야 하는 겁니다. 자, 어서 처리하고 돌아가 좀 쉽시다. 집 떠난 지 오래니 여독이 쌓이네요."
"그러시구려."
무덤덤하게 대답한 종천리의 발이 마지막 산채가 있는 주왕산으로 향했다. 높이가 약 천여 장에 이르고 산 둘레가 이백여 리에 이르는 커다란 산이었다. 산세가 하도 험해 지나가는 표행 외에는 개인 상인들은 얼씬도 하지 않는 척박한 산이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던 소천악이 신기한 듯 입을 열었다.
"이런 산에 산적이 있다니 신기하군요."
"비록 산세가 험해도 지름길이죠. 이 고개를 넘어가면 돌아가는 것보다 무려 이틀을 당겨 갈 수 있어 표국들이 선호한답니다."
"오호! 그럼 그때를 노려 산적들이 덮치면?"
"미리 표국과 산채가 협상하여 적당한 행채를 주고 가는 걸로 묵계가 이뤄졌다네요."
"음! 어찌 보면 팔자 좋은 수입이군요."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산을 올라가는 두 사람을 제지하는 산적의 모습은 어디에도 안 보였다. 혹시나 하며 걸어가도 여전히 사방은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이거 왜 안 오죠?"
"글쎄요. 오늘이 산채 회식 날인가!"
종천리도 영문을 몰라 주춤거렸다. 분명히 하오문에서 받아 온 서찰에는 산에 들어서자마자 산적들이 들이닥친다고 쓰여 있건만 벌써 고갯마루가 코앞에 보여도 녹림도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거 참 황당하네요. 또 소리쳐야 하나요?"
"먼저 간 적벽채의 녹림도가 말을 전했으니 곧 올 겁니다. 저기 고갯마루에서 한숨 돌리며 기다려보지요."
"그러시지요. 나참, 이거 산에서 녹림도를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둘은 고개턱에 여장을 풀고 두 다리를 쭉 뻗고 편하게 기다렸다. 하늘에 구름은 저마다의 형상으로 지나가며 시간이 흐름을 알려줬다.
무려 한 시진이 지나도록 녹림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열이 받은 소천악이 막 발작하려는 순간 숲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며 여러 사람이 나타났다.
소천악의 눈이 번쩍이며 그들을 주시했다. 얼핏 보아도 주왕산에서 사는 녹림도가 분명해 보였다. 그들의 옷은 녹림도 전통인 가죽 옷이었다. 반가운 듯 소천악이 밝게 소리쳤다.
"허, 이제야 오는군요. 참 빨리도 오네요. 이러다 지나가면 완전히 새 될 텐데 저래 가지고야 어디 직업정신이 있다고 하겠소이까?"
"……."
종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답무용이란 말이 이렇게 절실하게 생각나기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녹림도들은 숲속을 막 벗어나려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 흠칫한 표정으로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급하게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이 아니고 팔자 늘어지게 턱에서 편하게 기대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맨 먼저 나선 한 녹림도가 뒤를 보고 말했다. 그는 주왕산채의 부두목인 구절생(仇折生)이었다. 칠 척에 육박하는 키에 온몸이 근육질로 뭉쳐진 거한이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잘못 본 거 아니지?"
구절생의 말에 뒤에 있던 녹림도가 대답했다.
"저도 보이긴 보입니다만 황당하네요. 저놈들이 무슨 배짱으로 저리 편하게 있는지."
"야! 가서 족쳐 봐라. 기분도 산란한데 수틀리면 아주 묵사발나게 패버리자."
"흐흐, 그건 좋은 생각입니다. 일단 털고 한 놈을 인질로 잡고 심부름도 시키죠. 이 험한 산길을 내려갔다 올 생각을 하니 아주 아찔합니다."
부하의 잔머리에 희색을 띠며 구절생이 얼른 말했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야. 어서 가서 으름장을 놓아라."
"네, 부두목!"
칭찬에 기분이 좋은 녹림도가 기세당당하게 소천악에게 다가서며 버럭 소리쳤다.
"웬놈인데 감히 우리 주왕산채의 호걸들이 오셨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앉아 있는 것이냐?"
"주왕산채고 쥐새끼 산채고 간에 적벽채에서 사람 하나 안 왔소이까?"
"뭐? 적벽채!"
흠칫한 녹림도가 안색이 변하여 소리치자 소천악은 귀찮다는 듯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서서 말을 이었다.
"그래요. 적벽채에서 한 사람이 오셨을 텐데. 이상하군요."
"음! 너희들은 적벽채에서 온 자들이냐?"
"뭐 적벽채에서 온 거는 아니지만 비슷하다고 볼 수 있소이다."
"잠시 기다리거라. 내 부채주님에게 여쭤보고 오마."
놀란 녹림도는 서둘러 구절생에게 다가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부두목님! 저놈들이 아무래도 적벽채에서 온 듯한데요?"
"뭐? 적벽채에서!"
"네, 거기서 왔다고 하는데요. 어쩔까요?"
"기다려 봐라. 제길! 되는 일이 없네. 부려먹으려니 별게 다 말썽이네."
투덜거리며 구절생은 앞으로 쭉 나서서 소천악이 앉아 있는 근처에 와 소리쳤다.
"난 주왕산채 부채주인 구절생이라 하오. 귀하는 녹림 형제시오?"
"거참, 절차 복잡하오이다. 난 녹림호걸이 아니고 소천악이라 하는 강호무부요."
"소천악?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고개를 갸우뚱하던 구절생이 뒤에 있는 부하들에게 물었다.
"야 이놈들아! 너네 혹시 소천악이라고 들어봤냐? 굉장히 귀에 익은 이름인데 생각이 날 둥 말 둥 하네."
"소천악이요? 저도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어디서 들었더라."
한 녹림도가 머리를 싸매고 생각에 빠진 사이 뒤에 있던 한 녹림도가 불현듯 떠오른 무서운 별호를 연달아 외쳤다.
"신의괴협! 아수라협! 검사권생! 요번에 적벽채에서 온 자가 말한 이름이다!"
"헉! 아수라협 소천악 대협!"
그제야 소천악의 정체가 기억난 구절생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신의괴협 소천악!
당금 강호무림을 진동하는 절정 아니 초절정고수였다.
초절정고수!
감히 얼굴조차 맞대기 힘든 하늘에 사는 고수였다. 일검에 절정고수가 낙엽처럼 날아간다는 극한의 무공을 지닌,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먼 자들이다. 일개 녹림도가 맞상대하기에는 턱도 없는 그야말로 천외천(天外天), 하늘 위의 하늘인 고수였다.
두려움에 질린 그는 주춤거리다 자기 손에 들린 도를 보고 놀라 경악하다 떠오른 소문에 얼른 내던지며 소리쳤다.
"야, 무기 버려! 검사권생 대협이시다."
쨍그랑!
도는 삼 장여를 날아가 조그만 바위에 부딪쳐 청량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다들 정신을 차린 녹림도들이 앞다투어 손에 든 무기를 사정없이 집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