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15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15화
살벌한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곡무영 등 녹림도의 얼굴은 사색으로 변해갔다. 녹림도들은 마주쳐 오는 소천악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이보세요, 가서 구정물 한 바가지 가져오시오. 깨끗한 물이면 아주 골로 가실 줄 아시오."
"네, 대협!"
지적받은 녹림도 하나가 정신없이 주방으로 뛰어가 음식을 씻은 물 한 바가지를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대협."
"수고했소이다."
바가지를 받은 소천악은 역겨운 냄새에 잠시 인상을 쓰더니만 아무 말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관 채주의 얼굴에 확 뿌렸다.
"으음."
차가운 느낌에 비실거리며 정신을 차린 관 채주의 귓가에 소천악의 살벌한 목소리가 들렸다.
"채주님! 아직도 욕지거리를 할 생각이시오?"
"으윽! 어찌 이렇게 무례할 수가! 우리 녹림은 절대 은원을 잊지 않는다."
독기 서린 관 채주의 말이었다. 사실 자존심이 처참히 뭉개진 그로서는 쉽게 고개를 숙일 수가 없었다. 오늘 죽더라도 녹림의 형제들이 저놈을 기어코 죽여주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언변이다.
"후후! 지금 녹림으로 날 겁박하시려는 거요? 오라고 하시오. 녹림이 무너지든지 내가 죽든지 한번 해보자고요."
"이놈! 감히 우리 녹림을 뭐로 보고!"
"제길! 이거 뼈를 보호하면서 팼더니 영 싸가지가 없으십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소천악의 손발이 정신없이 관 채주의 전신에 내리꽂혔다. 아까와는 천양지차의 위력을 담은 권과 각이었다.
빠각! 뿌드득!
가볍게 놀리는 듯한 손발에 맞는 관 채주의 뼈가 부러져 나갔다. 정신이 든 채로 뼈가 부러지는 통증이란 가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으악!"
참다 참다 못해 관 채주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연신 터져나왔다.
"거참, 시끄럽소이다. 아까처럼 당당하게 욕이라도 하든지. 이거 귀찮아서 입도 막아야겠소이다."
무심하게 지껄인 소천악은 관취의 아혈을 봉쇄한 채 구타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뒤틀며 구르는 관취의 얼굴에는 진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녹림도는 물론 종천리마저 그 소름 끼치는 광경에 전율이 온몸에 흘렀다.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경우 어떤 보답을 주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천악의 안색은 초지일관 변함이 없었다. 주위의 모든 이에게 두려움을 던져주는지도 관심 없다는 듯 연속적으로 구타만 반복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관 채주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갈 무렵 비로소 손길을 거두며 주위를 쓱 둘러보는 소천악이다.
"또 여기 걸레로 변하신 채주님처럼 반기를 들 분 나오세요."
"으음."
녹림도는 모두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순식간에 자신들의 두목을 핏덩이로 만드는 그 독랄함에 기가 질렸다. 거친 녹림도들이 한 명에게 기가 죽어 숨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거기에는 부채주인 곡무영도 함께였다. 아무리 채주라 하지만 이 시간에 편을 들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게 너무도 뻔했다.
기습적인 소천악의 구타에 질린 녹림도들은 수적인 우세 따위는 머릿속에 남아 있지를 않았다. 다만 저 가공할 구타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고 빌었다.
소천악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 모든 것이 다 그의 계획에 들어 있었다. 사실 녹림도들이 순순히 그의 주장에 찬성하리라 기대는 아예 품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초강수를 구사해 기선을 제압할 속셈이었다.
예상대로 관 채주는 겁 없이 저항하다가 산화한 가여운 경우였다. 목적을 달성한 소천악의 입에서 싸늘한 음색이 퍼져나왔다.
"지금 바로 산채의 간부들은 회의실로 모이시지요. 열외는 죽음입니다. 아, 그리고 불행히도 채주님이 와병 중이시니 요 앞에 두 분이 업어다가 회의실 바닥에 패대기치시길 바랍니다."
"네, 대협!"
지적을 받은 두 녹림도가 놀라 얼른 인사하며 순식간에 고깃덩어리로 변한 관 채주를 업고 회의실로 움직였다. 그 뒤로 천천히 소천악이 따라갔고 곡무영 부채주를 비롯한 간부들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인 양 어기적거리며 따라갔다.
회의실에 자리한 산채 간부들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눈치만 살살 살폈다. 소천악은 만족스러운 듯이 좌중을 쓸어보며 말문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무력을 행사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다 좋게 좋게 하자는데 말귀가 어두운 분이 계셔서 이 꼴이 난데 대해 먼저 유감을 표합니다."
살짝 고개까지 숙여가며 말하는 소천악을 가증스러운 마음으로 쳐다보는 간부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내색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도 제이의 관 채주 꼴이 나고픈 자는 없었다.
억지로 곡무영 부채주가 대표로 말을 받았다.
"음! 사과하시니 일단 받겠습니다."
"역시 부채주님답습니다. 이리 화목하게 이야기를 진행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음음."
차마 더 이상 대답을 못 하고 헛기침만 하는 곡무영 부채주였다.
"자, 이제 제가 온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제가 웅비표국이라는 표국을 열어 표국 사업에 진출했습니다."
"헉, 표국 사업!"
간부들은 깜짝놀라며 퍼뜩 고개를 들어 소천악을 바라봤다. 이제야 그가 온 이유가 감이 잡혀왔다.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해서 여러분 같은 녹림호걸과 미리 안면을 트고 협조를 요청하러 온 길입니다."
"당연히 협조해야지요. 천하의 신의괴협께서 표국업을 하신다는데 도와드려야지요. 앞으로 우리 적벽채는 절대 웅비표국에 관련된 어떤 일에도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노련한 녹림도답게 곡무영 부채주는 소천악의 진심을 간파하고 필요한 바를 먼저 말하는 순발력을 보였다.
"하하! 말씀은 고맙지만 세상사라는 게 꼭 그렇게만 된다면 재미가 없지요. 저도 알아볼 대로 알아봤습니다. 녹림의 가장 큰 수입이 표국과의 공생으로 받는 부수입이라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
"험험!"
정곡을 찌르는 말에 곡무영 부채주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제안 하나 하지요. 새로운 일인데요, 사실 우리 표국이 신생표국이라 인원의 여유가 빡빡합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상부상조할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요?"
"적벽채에서 우리 웅비표국에게 통과세를 받는 대신 표사를 보내주시는 겁니다."
"헉, 녹림도가 표사를요?"
"세상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하게 되는 게 이치지요. 표사를 보내주시면 우리는 무사가 늘어서 좋고 적벽채는 통과세를 편하게 받아 좋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거래가 이뤄지겠습니까?"
곡무영 부채주는 소천악의 놀라운 계책에 치를 떨었다. 얼핏 들으면 서로 좋자는 소리지만 사실상 웅비표국에 대해 어떠한 도발도 사전에 차단당하는 꼴이 되는 걸 모르지 않았다.
같은 녹림도가 표사로 있는 표국을 공격한다는 건 곧 동료를 공격한다는 말이었다. 녹림도의 규칙상 절대 실행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장 거절했다가는 당장 도륙이 날 판이다. 저자는 소문보다 더욱 악랄한 자임을 두 눈 똑똑히 뜨고 바라본 그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옆에 자리한 간부들 모두 얼른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압력을 쉴 틈 없이 보내는 형편이다. 사나이 자존심도 좋지만 결과가 너무도 뻔한 일에 목숨을 걸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좋소이다. 우리 적벽채는 소 대협의 제안에 적극 찬성하며 바로 간부 두 명을 표사로 파견하겠소이다."
"역시 부채주님은 상황판단에 능하시군요. 이리 협조적으로 나오시니 정말 감격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소천악의 말에 곡무영 부채주와 간부들은 내심 코웃음을 날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말만 그럴싸할 뿐 소천악의 눈에는 이슬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순전히 접대용 발언이었다. 하지만 빈말이라도 전해줘야 할 곡무영 부채주의 입이 마지못해 열렸다.
"껄껄, 천하의 소천악 대협이 이리 말씀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그렇소이까? 하하!"
곡무영 부채주와 간부들은 안 열리는 입을 억지로 열어 웃음을 지으려니 이것도 고역이라면 고역이었다. 포만감이 가득 생긴 소천악은 이런 정도는 애교로 봐주며 다음 말을 꺼냈다.
"자자! 저야 표국에 대해서는 장님이니 표사로 갈 분을 선발해서 웅비표국에 보내면 표국주께서 자세히 설명하고 보수를 결정할 겁니다. 뭐 그리 박하게 쳐주기야 하겠소이까!"
"하하! 대녹림호걸들은 그런 거에 소탈합니다."
"역시 인생을 아시는군요. 하긴 그런 거 챙기다가 북망산 여러 분 가셨지요."
웃으며 섬뜩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소천악을 보며 마음이 서서히 풀어지던 곡무영 부채주와 간부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똥빛으로 변했다. 역시 저자는 잠시라도 마음을 놓으면 바로 저승길에 갈 위험이 커 보였다.
"물론이죠. 서로 협조하는데 은자가 방해가 된다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피눈물을 흘리며 곡무영 부채주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소천악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
"내 오늘 녹림호걸의 진면모를 본 듯하오. 자! 이 좋은 날 술이 없어서야 되겠소이까! 자, 어서 술을 내오시구려."
마치 자기 집 창고에 있는 술을 주는 듯 당당하게 말하는 소천악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곡무영이 짐짓 호탕하게 대답했다.
"껄껄, 역시 소 대협은 풍류를 아시는 분이시군요. 뭐 하느냐! 어서 창고에 있는 술을 모두 내와라."
녹림도들은 그 후 술동이를 나르느라 정신없이 오가야만 했다. 말술을 마다 않는 녹림도의 전통에 술이라면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소천악이 합세하자 술은 무섭게 빈 통으로 널브러져 갔다.
취기가 도는 녹림도와 달리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연신 술통을 끼고 비워대는 소천악이다. 사실 그는 술을 취하기 위해 마시지 않았다. 호랑이 굴에서 취해 쓰러지면 다음 날 목 없는 시체 꼴이 될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은 자신의 위명과 무공에 압도되어 친한 척하지만 자신이 잠이 들면 웃으며 목을 딸 위인들임을 뻔히 알았다.
시간이 지나 하나둘씩 곡무영 부채주를 비롯한 녹림도들이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들었다. 가만히 술을 마시며 바라보던 소천악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옆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던 종천리를 불렀다.
"종 막주님! 이제 우리도 편히 쉬러 갑시다. 어차피 오늘 술자리는 파장인 듯하네요."
"거참, 아무리 생각해도 대주님의 배포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건 호랑이 간을 씹어 먹은 것도 아닌데 어디서 이런 호기가 나오시는지."
"어려서부터 하루하루가 지옥인 삶을 살다 보면 다 이렇게 변합니다. 자, 가서 쉽시다."
팔을 잡아끌며 숙소를 찾아가는 소천악을 멍하니 바라보며 끌려가는 종천리였다.
이튿날.
아직 술기운에 절어 비실거리는 곡무영 부채주를 찾아간 소천악이 말했다.
"상쾌한 아침입니다. 자,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지요. 제가 보기보다는 할 일이 많아 바빠서."
"으, 골치야! 알겠소이다. 표사로 일할 두 명을 정하지요."
"그리고 하나만 더 부탁합시다. 아무래도 다른 산채도 방문해야 하는데 혹시 불필요한 일이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 미리 인편으로 간다고 소식이나 전해주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