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12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12화
"그야 그렇지. 하지만 늦게 크는 놈도 있으니 모르는 일이지."
기대에 찬 얼굴로 소대영을 바라보는 장칠상이었다. 만약 소천악이 친구의 아들이 맞다면 자신도 크게 부자가 될 기회를 잡은 기분이었다.
소대영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아직 정확한 사실이 아니니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게. 소천악이란 자가 금위대주였다면 자칫하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네."
"헉, 그렇구먼. 금위대주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당세의 권력자인데."
"그러니 입조심하게. 만약에 소천악이 내 아들이 맞다면 내 꼭 일러줌세."
"그러게. 아, 그건 그렇고 자네 집 사정이 괜찮나? 내가 바빠서 신경을 쓰지도 못했는데 미안하이. 내일 내가 쌀이라도 몇 섬 보냄세."
십여 년 동안 남 보듯 모른 체하던 장칠상의 입에서 뜬금없이 친절한 제의가 나왔다. 소대영은 내심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망한 후 친구들은 모두 떠났고 장칠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와 무슨 건수가 생길 듯하니 달라붙는 모습에 새삼 세상인심이 더러운 걸 느꼈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사양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소대영의 마음은 들떠만 갔다. 소천악이 아들이라면 신세 필 생각보다 죽은 친구에게 면목이 설 기회가 온 듯하여 더욱 설레는 마음이었다.
집에 돌아간 소대영은 아내에게도 이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묘인아는 걱정스레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아직 나도 모르겠소. 갑자기 거대 상단의 주인이 왜 날 찾아왔는지 아직도 얼떨떨할 따름이오."
묘인아는 목까지 치민 소리를 기를 쓰고 참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라고 왜 기회가 온 걸 모르겠는가!
다만 헛된 기대가 되어 다시 풀 죽은 소대영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갔다.
이튿날.
소천악은 새벽 일찍 남몰래 온유상에게 찾아갔다.
"온 대인! 혹시나 소대영이 저에 대해 물어보거든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라 해주세요. 어차피 황제 폐하가 공포한 나이이니 별 무리가 없을 겁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혹시 소대영 대인과 무슨 관계가?"
"아직은 말할 수 없소이다. 이 비밀을 퍼뜨리면 온 대인과 결별할 것이오."
"음! 알겠소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소 대협의 뜻대로 하지요."
온유상은 인생경험으로 대충 상황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소천악은 더 이상 말없이 자리를 떠나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 후 얼마 안 지나 소대영이 찾아와 온유상과 자리를 함께했다. 소대영은 주춤거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온 대인! 대인의 제안을 고려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소이다."
"말씀하시오."
"제가 알아보니 온가상단 뒤에 금위대주인 소천악이란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분 나이를 아시는지요?"
예상했던 질문이라 온유상은 당혹감 없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스물일곱 살이라고 알고 있소이다."
"아니 혹시 스물두 살이 아닌지요?"
"허허!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신 나이요. 분명히 스물일곱 살이오."
"음, 그러면 혹시 고향이 어딘지 아시는지요?"
"광동성이 고향으로 알고 있소이다."
"그랬군요."
맥없이 대답하는 소대영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얼마나 실망한 얼굴인지 자신도 모르게 진실이 튀어나올 뻔한 온유상이었다.
"소 대인! 이제 가부를 결정하시지요. 저로선 최선의 조건을 내세웠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십니까?"
"온 대인! 왜 제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요? 사실 제가 아무리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미 망한 사람이오. 세상에는 저보다 더욱 잘 나가는 이가 많은데 하필이면 실패한 저를 찾아온 이유를 정말 모르겠소이다."
"장사란 현재보다 과거가 더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오. 전 소 대인의 과거를 알아보고 미래를 함께할 결심을 했소이다."
소대영은 거침없는 온유상의 말을 듣고 밤새 고민해 내린 결론을 말했다.
"저를 이리 높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능력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믿어주시니 함께해 볼 용기가 생겨납니다."
"잘 생각하셨소이다. 그리고 표국은 여기가 아닌 광동성에 세울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거기가 아는 무림인들이 많아 움직이기가 편하다는 결론입니다."
"아무 데면 어떻습니까. 의견대로 따르겠습니다."
결정하자 일사천리로 나오는 소대영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온유상이 말했다.
"좋소이다. 그럼 이제 주변을 정리하시고 떠날 준비를 서둘러주십시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조만간 갈 겁니다."
"그러지요."
"그리고 소 대인이 그동안 진 빚은 정리해야 하니 일단 은자 이천냥을 드리지요. 알아서 정리하시고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음, 면목 없으나 일단 처리할 일이 있어 받겠습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나머지 이야기를 나누고 미소와 더불어 헤어졌다.
며칠 후 드디어 이동이 이뤄졌다.
특이한 건 예비 쟁자수로 임명(?)된 산적 떼였다. 모두 성내에서 산 짐 보따리를 바리바리 등에 지고 가는 그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검 하나 들고 산중을 누비던 그들은 생전 해보지도 않은 짐꾼 역할에 자존심이 시궁창에 박힌 기분이었다. 감히 입 밖에 불만을 토로하지도 못한 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울화병이 도지고 있었다.
이 모든 행렬을 암중에서 보호하는 자가 더 많았다. 소천악의 지휘 아래 흑마전과 혈살막의 살수들이 일사불란하게 행렬을 막는 자를 가차 없이 주살할 의도로 따랐다. 덕분에 사소한 일 하나 없이 일행은 무사히 광동성에 오는 대여정을 마쳤다.
이미 표국으로 쓸 장원은 성내에서 알아주던 갑부 정 대인의 건물을 사서 수리를 마치고 사람들을 맞을 준비가 끝나 있었다. 기민한 온가상단의 움직임 탓에 준비를 마친 후 이미 표국의 인원 구성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흑마전의 고수 중 일류고수들인 오십여 명이 아예 눌러앉아 표국 일을 돕기로 했고 혈살막은 생존 살수 팔십여 명 전원이 표국에 취업했다.
흑마전 고수들은 표국 위사대를 맡았고 혈살막 살수들은 표행 엄호대란 신설대를 만들어 암중에서 표행을 방해하는 자들을 암살하는 살벌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물론 혈살막 소속 살수 반은 소가표국에 잘못하고 사라진 표두나 표사를 잡는 일에 투입되어 호송에는 반수의 살수만이 함께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등해린이 주동이 되어 낭인무사들이 수도 없이 밀려왔다. 정처 없이 부초처럼 천하를 떠돌던 낭인무사들은 은밀히 권유한 하오문의 말에 솔깃한 데다가 떠오르는 거상인 온 대인 상단에서 밀어주는 표국이라는 말에 뒤도 안 돌아보고 찾아왔다.
그들도 이미 천축에 간 낭인무사들이 받은 대우를 잘 알았다. 계약한 은자보다 무려 두 배가 넘는 거액을 손에 쥔 채 부푼 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간 벗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 기억이 새로웠다.
특히 이채로운 건 쟁자수들이었다. 여느 표국의 쟁자수와 달리 웅비표국의 그들은 부리부리한 눈매를 지닌 자들로 구성됐다. 자세히 보면 모두 무림인 출신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정도였다.
그들은 다름 아닌 귀혼마를 중심으로 한 녹림도당이었다.
"이런 제길! 기어코 쟁자수의 길을 걷네."
나지막이 투덜거리는 귀혼마의 말에 왕년의 부채주 비혼도 한숨을 푹푹 내쉬며 대꾸했다.
"팔자 더럽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채주님?"
"야, 채주란 말 빼! 혹시나 인간성 더러운 소천악이란 놈이 들으면 우린 바로 반죽음이야."
"육시랄 놈! 어떻게 산중을 주름잡던 우리를 쟁자수로 쓸 황당한 생각을 했는지."
"그러게 말이다. 성질대로라면 당장 뒤엎어버리고 싶다."
"아서야 합니다. 그런 낌새만 보여도 우리는 한 달 내로 뒷간귀신이 될 겁니다. 그 악랄한 놈이 절대 해약을 줄 리가 없습니다."
"정말 이걸 해독할 이가 없을까?"
기대 서린 귀혼마의 말에 비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새끼 별호가 신의괴협입니다. 신의란 말이 헛된 건 아닐 겁니다."
"휴우, 내 살다 살다 녹림호걸이 쟁자수가 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가 완전히 새 역사를 쓰는 거죠."
"녹림동도가 알까 봐 요새 내가 자다가도 벌떡벌떡 깬다."
구시렁거리는 두 사람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일이 벌어졌다. 새로 표사로 임명된 한 낭인이 거만하게 다가와 발치에 은자 두 냥을 던지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봐, 쟁자수들! 가서 술 몇 동이만 사 와라. 우리 표사들이 오늘 한잔하기로 했다."
"뭐야? 이건 또 뭐 하는 놈이야?"
성질이 폭발한 귀혼마가 살기를 드러내며 당장에라도 요절을 낼 기세로 쏘아붙이자 심드렁하게 서 있던 낭인무사가 갑자기 다가온 기세에 오금이 저려왔다. 오랜 강호경험으로 귀혼마가 일류고수임을 한눈에 알아본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 제가 실수를! 죄송합니다. 쟁자수인 줄 알고 그만."
"이게 정말 성질 건드리네. 야, 이 새끼야! 나 쟁자수 맞아. 그것도 쟁자수 수장이야."
"아니 무림인들이 쟁자수라뇨?"
어안이 벙벙한 표사가 묻자 신경질적인 귀혼마의 대꾸가 이어졌다.
"자꾸 신경 건드릴래? 나 쟁자수 맞으니까 어쩌라고? 술 사다 달라 또 지랄할 거야?"
"이런 황당한 경우가! 일단 실례가 많았습니다."
급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표사가 허둥지둥 자리를 벗어났다.
"별 거지 같은 표사가 신경 건드리네. 야, 비혼! 이거 앞으로도 쭉 이런 경우가 생기면 어쩌냐?"
"뭘 어쩝니까? 우리 식대로 바로 썰어버려야지요."
"그래야겠지?"
기세등등하게 말하는 귀혼마의 귀에 섬뜩한 전음이 들렸다. 꿈에도 듣고 싶지 않은 음성의 주인공이었다.
[썰긴 뭘 썹니까?]
전음을 들은 귀혼마의 안색이 급변하며 외치다시피 말했다.
[소 대협!]
[이거 쟁자수가 표사를 썰면 누가 상단을 호위합니까?]
[아니, 소 대협도 보셨잖습니까? 저 싸가지 없는 표사 놈이 떠드시는 걸.]
귀혼마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하소연에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대꾸하는 소천악이다.
[들었지요. 그런데 어디 감히 쟁자수가 표사를 썬다는 게 말이 되는가요?]
[아니 그게.]
뭔지 몰라도 서러움이 복받친 귀혼마가 하소연하듯 말하려다 말문이 막히며 목이 메었다. 산채를 주름잡던 그가 이런 수모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도록 하시오. 내 표사들에게는 단단히 일러둘 테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오.]
[네, 소 대협!]
억울하지만 이 정도에서 물러서야 한다는 걸 안 귀혼마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한편 표사로 임명된 자들도 한 표사의 말에 난리가 났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쟁자수들이 무림고수들로 구성됐다니?"
"말도 말게. 아까 술 심부름을 시키러 갔다가 아주 요절이 날 뻔했어. 이건 쟁자수가 아니라 완전히 흑도의 돌격대 같은 놈들만 모여 있더라고. 더구나 쟁자수 대장이라는 작자는 일류고수도 보통 일류가 아닌 기세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