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10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10화
"자, 이제 거래를 시작해야지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습니까? 협상은 없습니다. 따르고 살든지 거부하고 뒈지든지 그건 전적으로 여러분 몫입니다. 어쩌렵니까?"
살벌한 협박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귀혼마가 모기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윽… 따르겠습니다."
"좋소이다. 그럼 이제부터 여러분 모두는 산채 생활을 접고 표국에 취직해 일을 하는 겁니다."
"헉, 표국이요?"
"사람이란 살다 보면 가끔은 직업을 바꾸는 모험도 필요하지요."
"표국에서 표사로 일하는 겁니까?"
체념한 투로 말하는 귀혼마에게 더욱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을 구사하는 소천악이다.
"표사는 무슨! 채주님부터 말단 녹림도까지 모두 쟁자수로 취직한 걸 축하합니다."
"쟁자수라 했습니까? 쟁자수라면 표국행에서 짐 지고 다니는 자들 말씀하시는 건가요?"
"물론이오. 왜, 하기 싫소?"
"그게 아니고 저희 같은 무인들이 어떻게 짐을 지고 다니는 쟁자수를 합니까?"
"그럼 죽든지 하세요."
차갑게 말을 끊는 소천악을 보며 귀혼마는 또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저자는 아무리 봐도 인정머리라곤 찾아보기 힘든 냉혈한이었다. 게다가 소가표국을 거론하는 걸 보니 연관이 있는 듯해 더욱 두려움이 커졌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하시오."
"실례지만 강호에서 불리는 별호가 무언지?"
"신의괴협이라 합디다."
"헉, 아수라협이… 크아악!"
한 녹림도가 부르짖다 말고 이마에 갑자기 날아온 몽둥이를 맞아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싸가지 없는 분 같으니라고. 어디서 감히 아수라협이니 뭐니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게요."
새로 생긴 별호가 영 마음에 안 드는 소천악의 징계는 한마디로 무식했다. 이후 귀혼마를 비롯한 모든 녹림도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한 채 바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해야지요. 쟁자수라도 대협이 시키신다면 합니다."
"좋은 자세요. 그게 만수무강에 참으로 보탬이 되는 생각이오. 그렇다고 한평생 여러분을 쟁자수로 부려먹을 건 아닙니다."
"그럼 얼마나?"
"딱 오 년! 더도 덜도 말고 오 년만 일하면 자유롭게 풀어주겠소."
평생이 아니란 건 안도했지만 적지 않은 세월을 부르자 귀혼마 등은 암담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차피 손아귀에 들어간 신세라 생각하니 거부할 기운은 더욱 없었다. 결단을 내린 귀혼마가 말했다.
"대협께서 말하신 조건에 전 따르겠습니다."
"좋은 판단이오. 자, 다른 분은?"
"해야지요."
싸늘하게 말하는 소천악의 말에 비혼을 비롯한 나머지 모든 녹림도가 일제히 따르겠다는 서약을 했다.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소천악은 처음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이리 나오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자, 이제 여기 계시다가 연락이 오면 오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쓸데없이 은자 따위가 있으면 딴생각이 들 테니 모두 제가 가져가지요."
"크흑."
차마 거절하기 힘든 귀혼마가 어쩔 수 없이 승낙하자 소천악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자, 그럼 모두 은자나 패물을 모아 오시지요. 중간에 착복하는 분은 바로 저승길이란 걸 명심하세요."
"네, 대협!"
감히 은자를 챙기려는 마음이 쏙 사라지는 말에 녹림도들은 여태껏 모아둔 피 같은 은자와 패물을 일제히 가져왔다. 내실 있는 산채여서인지 은자와 패물은 쏠쏠하게 나왔다.
녹림도를 시켜 산 밑까지 들고 오게 한 후 길지경을 시켜 마차를 가져오게 해 남김없이 실은 채 소천악은 떠나갔다. 그제야 숨을 돌린 귀혼마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저런 순 악질새끼! 저게 무슨 대협이야! 안 그래, 부채주?"
"채주님! 말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동료라 해도 어느 순간 채주님을 배신하고 소천악에게 고자질할지도 모릅니다."
"크흠! 이런 빌어먹을."
귀혼마도 비혼 부채주의 말에 가슴이 살짝 긴장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모든 녹림도들은 코가 꿰인 서글픈 표정으로 마냥 마차만을 주시했다. 어제까지 흥청망청거리던 산채가 이젠 알거지 신세로 마냥 연락을 기다릴 처지였다.
제4-2장 표국 세우기
산채를 정리한 소천악은 은자와 패물을 일단 하오문에 맡겨놓았다. 대연강 지부장이 조심스레 말했다.
"소 대협! 지금 객잔에 심자앙이란 분이 찾아와 계십니다."
"오, 그래요?"
얼굴에 반색이 떠오른 소천악은 바로 객잔으로 날다시피 사라졌다. 객방을 물어 들어선 소천악은 반가운 얼굴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심자앙 책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 대주님 뵈니 기분이 상쾌합니다."
"그리 생각하시면 저야 뭐 바랄 나위가 없지요. 그리고 이젠 대주 직은 걷어찬 지가 오래입니다. 그 호칭이 영 어색하네요."
"무슨 말씀을! 한 번 대주님은 영원한 대주님이지요."
미소를 지으며 묘한 눈빛을 보내는 심자앙이 부담스러워 얼른 말을 돌리는 소천악이다.
"자자, 그런 말씀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심 책사님이 하실 일이 태산입니다. 많은 도움 부탁합니다."
"허허, 말씀만 하시구려. 이 몸이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망설이겠소이까?"
덤덤한 심자앙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소천악이 대답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소가장 부흥 작전입니다."
"소가장이라뇨?"
"네, 표국을 하다가 일이 더럽게 꼬여 망한 곳인데 이번에 일으켜 세워야겠습니다. 물론 현재로선 표사는커녕 표국 건물 하나 없는 빈털터리 상태지요."
미안한 듯한 소천악의 말에도 심자앙은 미소를 잃지 않고 여유 있게 말했다.
"음, 그리 쉽지도 어렵지도 않은 겁니다만 도대체 어느 정도 부흥이 목표이십니까? 그리고 여기서 표국을 시작할 겁니까?"
가만히 생각하던 소천악은 시원하게 말했다.
"뭐 표국으로는 중원에서 십대표국 안에만 들어가면 만족입니다. 여기는 아무래도 재수 없는 터인 데다가 연줄이 없으니 아무래도 광동성이 좋을 듯합니다만."
"헉, 십대표국! 대주님, 말이 쉬워 십대표국이지 그들 모두 오랜 역사와 배경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제 시작해서 그 안에 들어가는 게 쉬울 리가 없소이다. 다만 광동성이라면 좋은 선택입니다. 흑마전도 멀지 않고 하니 그 의견 하나만은 마음에 듭니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소이다. 까짓것 한번 해봅시다."
속 편하게 떠드는 소천악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심자앙이 골머리를 싸맸다. 저 대주란 작자는 한다면 하는 성격임을 적지 않은 경험으로 익히 알았다. 게다가 말투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념을 보아하니 죽어도 반대란 말을 꺼낼 형편이 아님을 바로 눈치챘다.
한동안 주판알을 굴리던 심자앙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제가 책사인 바에 지시하는 대로 따라야지요. 단 그 목표에 가시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그 조건이 만만하지 않은데 다 들어줄 수 있는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요."
"우선 표국을 운영할 고수가 필요합니다. 최소한 일류고수 오십 명과 정예고수 백오십 명이 먼저 필요합니다. 아마 흑마전과 혈살막을 이용한다면 가능할 겁니다."
"알겠소이다. 바로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지요. 게다가 초일류고수 두 명과 나름 쓸 만한 무인 이백여 명을 쟁자수로 이미 구해놨습니다."
"네, 일류고수와 무사들을 쟁자수로요? 도대체가?"
황당한 소리에 반문하는 심자앙을 이번엔 소천악이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보시면 압니다. 완전히 염가로 부려먹으셔도 됩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좋소이다. 원래 대주님이 하시는 일이 황당한 일투성이니 그거는 넘어가고 다음은 자금이 필요합니다. 단시간에 십대표국에 들어서려면 거금이 필요한데……."
말꼬리를 흐리는 심자앙의 말에 단숨에 대답하는 소천악의 말이다.
"은자야 있는 대로 퍼부어 주겠소이다. 말씀만 하시구려."
"허! 결심이 대단하십니다. 아무래도 궁금해 이건 알아봐야겠습니다. 도대체 소가장이 대주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요?"
"험! 밝히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말씀드리지요."
말을 얼버무리는 소천악을 바라보며 심자앙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더욱 확신했다. 사실 그는 오는 도중에 여러 가지 상황을 두고 생각한 끝에 한 가지를 느꼈다.
소천악과 소가장!
아무리 봐도 혈육임이 분명하다는 느낌이었다. 막상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자 더욱 확신이 든 그는 내심 결심을 굳혔다.
사실 그의 뛰어난 머리로 소가장을 중원 십대표국에 넣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건 단지 십대표국으로 불리는 게 아니라 이십 년 내로 중원제일 표국으로 키우겠다는 야무진 목표였다.
세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불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노력하면 되는 일이었고 표국을 운영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강호무림에 인연이 생기는 법이다. 그걸 이용해 세력을 키우고 강호 최강의 문파를 만들고 싶었다. 기회가 생각 밖에 빨리 오자 가슴이 절로 쿵쿵거리며 뛰었다.
책사로서 최고의 영광인 강호 제일문파의 군사가 될 날을 그리며 설레는 가슴을 애써 달랬다. 물론 그런 그의 마음을 소천악이 벌써 알 리가 없었다. 생각 외로 심자앙이 꼬투리를 안 잡고 협조적으로 나오자 기분이 좋아진 소천악이 말했다.
"자, 그럼 자세한 계획은 알아서 세워주세요. 전 이제 흑마전과 아는 분들에게 연락을 취해 도움을 받지요."
"그러시지요. 아무 걱정 마시고 편하게 일을 추진하세요. 내부적인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지요."
"전 심 책사님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후후! 최고의 단어입니다. 실망 안 시키도록 열심히 노력하지요."
두 사람은 훈훈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소천악은 바로 하오문을 찾아 닦달을 시작했다.
"이 서찰을 어서 보내주시고 길지경 그 양반에게 산채에 있는 녹림도들을 데려오라고 하세요. 그들이 임시로 거처할만한 곳을 골라 아무도 모르게 있게 하고요."
"네, 대협!"
"물론 식량이나 여러 물품은 알아서 조달해 주시지요."
뜸도 안 든 밥을 달란 식으로 서두르는 소천악의 말에 침착하게 대응하는 대연강 지부장이었다.
"네! 그러시지요, 대협! 바로 조치를 취해드리죠."
그날 이후 하오문 지부를 오가는 전서구의 양이 부쩍 늘어나며 문도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 얼굴이 누렇게 떠가기 시작했다.
연락을 받은 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소천악의 말에 따를 준비를 서둘렀다. 흑마전은 이미 섬서성에서 자리를 확고하게 굳혀나갔다. 단목세가와의 충돌 이후 점점 세력을 키워낸 그들의 힘의 원천은 딱 하나, 엄청난 재력이었다.
막말로 강호고수라도 빈손이면 굶어야 하는 게 세상인심이다. 수입을 벌어낼 곳이 마땅치 않아 단목세가의 영역을 침범하려던 그들이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들어오는 은자를 세기도 바쁜 처지였다.
당연히 은자를 찾아 많은 유랑고수들이 흑마전을 찾아왔다. 흑마전도 전처럼 수입을 벌기 위해 화류계나 도박장을 기웃거리는 일을 일절 중단하고 나름대로 흑도로서 자존심을 지키다 보니 절로 전의 안 좋은 인상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며 휘하 고수들의 자부심도 커져만 갔다.